역사기행 | 해방 이후 사회운동의 망각된 계보를 찾아서
2022년 11월 16일
이번 가을 지리산 역사기행은 해방 이후 지배체제에 맞서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민중의 죽음을 애도하고, 한국 사회운동의 잃어버린 계보를 돌아보고자 기획됐다.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이 한창이던 시기엔 역사기행 사업이 어려웠지만, 방역 통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2년만에 재개된 것이다. 앞으로 플랫폼c는 매년 꾸준하게 역사기행 사업을 기획할 예정이다.
이번 기행은 오랫동안 정치학을 연구해온 좌파 연구자 손호철 명예교수(서강대)의 가이드로 이뤄졌다. 손 명예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나타난 이론적 틀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논문을 쓴 바 있다. 기행자이기도 한 그는 라틴아메리카와 중국, 쿠바,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지난 6월과 8월에는 한국 현대사를 배경삼아 두 권의 기행서를 냈다. 2021년 3월부터 1년반에 걸쳐 한국일보와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이 책들은 전국 102개 장소와 얽힌 현대사의 장면들을 소환한다.
지리산 곳곳에서 죽어간 민간인들
지리산 역사기행 버스는 28일 금요일 아침 7시 양재역 인근에서 출발했다. 크고 편안한 버스에 올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행에 나섰다. 다들 어떤 마음과 기대를 갖고 기행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첫 일정은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 시작됐다. 버스에서 내린 참가자들은 가이드를 따라 이 공원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오랫동안 ‘거창 양민학살’로 불려온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시기 가장 널리 알려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51년 2월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에서 시작해 함양 지곡면을 거쳐, 2월 11일 거창에 이르기 까지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5일간 이어진 이 학살을 통해 총 1,424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1951년 빨치산 토벌에 나선 군경은 지리산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함양, 산청, 거창 지역에서 민간인 대상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산청, 함양과 달리 거창에서는 종전 이전부터 학살에 대한 거센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고, 4.19혁명 직후에는 전국적인 사회운동의 부흥 속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둘러싼 유족들의 움직임이 분출하기도 했다. 우리가 찾은 거창 민간인학살 추모공원은 이런 투쟁 끝에 세워질 수 있었다.
5.16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자신의 좌익 경력을 세탁하고 미국과의 신뢰를 구축하는 차원에서 유족회의 운동에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거창사건 유족들은 공권력의 강요 하에 자신들이 손수 세운 추모비를 정으로 쪼아 훼손해야 했다. 추모공원 내에 뿌리뽑힌 채 누워있는 비석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이 얼마나 오랫동안 망각을 강요당했는지, 그 속에서 지속되었을 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발부터 참담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우리는 바로 다음 일정으로 옮겨야 했다. 2박3일 간의 여정이 이렇게 쉴 틈 없이 진행됐는데, 지리산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대형버스라는 좋은 이동수단으로 진행된 기행이지만 그만큼 부족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적 배경
대도시의 가을 산책으론 절대 감지할 수 없는 지리산의 가을 풍경이 우리를 압도했다. 뱀사골 트래킹 코스를 걸을 땐, 왜 사람들이 지리산의 가을을 사랑하는지 절로 알 수 있었다.
1950년대 내내 이 아름다운 산 속에서 수만 명의 빨치산들이 자신의 싸움을 펼쳤다. 빨치산이란, 저항운동이나 내전에서 비정규적인 군사활동을 의미한다. 통상 ‘게릴라’와 ‘빨치산’은 모두 비정규적 저항활동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구분 없이 사용되는데, 한국적 맥락에서 ‘빨치산 운동’은 사회변혁을 위해 저항군 및 지역주민으로 조직된 무장 유격활동을 가리킨다.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태업과 파괴공작, 선전선동 활동 등을 포괄한다.
남한 빨치산은 대체로 ‘구빨치’와 ‘신빨치’로 나뉜다. 구빨치는 1946년 10월 대구항쟁 전후까지 산으로 들어간 이들, 신빨치는 한국전쟁 이후 산으로 들어간 이들을 가리킨다. 해방 직후 미 군정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했던 조선공산당과 급진적 사회운동 진영은 신탁통치 파동으로 난관에 처하다 1946년 초 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에 조선공산당은 미 군정의 공세에 대해 더는 물러서지 않고 반격하겠다는 ‘신전술’을 채택하고, 그해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 투쟁에 돌입한다. 10월부터는 대구에서 시작된 자생적인 민중항쟁이 추수철 전국의 농촌을 휩쓸었는데, 당시 항쟁 진압 과정에서 산으로 숨어든 ‘산사람’과 ‘야산대’가 빨치산의 근원이 됐다.
아래로부터의 봉기가 고조되던 시기 조선공산당은 인민당, 신민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창당해 비타협적 투쟁 국면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빨치산 투쟁이 본격화된 계기는 남조선노동당 중앙에서 예상치 못했던 1948년의 여수·순천 봉기였다. 제주 4.3 항쟁 진압을 거부한 14연대는 토벌군에 밀려 지리산 지역으로 입산했고, 후일 빨치산 지도자로 유명해질 이현상이 유격대를 재편성하며 이 사태의 수습을 맡아야 했다. 한국전쟁 시기의 ‘신빨치’와 구분하여 ‘구빨치’로 불렸던 전쟁 이전의 유격대는 1949년 동계 토벌 작전으로 고사 직전에 이르렀으나, 한국전쟁 이후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이 합류하면서 규모가 늘어난다. 이현상이 새롭게 재편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은 1951년 6월, 대부대 단위 편성을 위해 덕유산 송치골에 소집된 6개 도당 위원장 회의에서였다.
지리산국립공원 뱀사골 입구에 위치한 ‘뱀사골 지리산역사관’은 토벌대의 시선에서 그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 동안 지리산에서는 무려 10,717회의 교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 민간인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군경과 빨치산들이 목숨을 잃었다. 군·경 6,333명, 빨치산 11,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장기화와 규모, 빈번한 전투 등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쿠바의 체 게바라의 게릴라 활동이나 중국 마오쩌둥의 대장정보다 훨씬 지독하고도 험난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처절한 저항기에도 계속된 선전 활동
뱀사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잠시 샛길로 빠져 길이 아닌 곳을 지나면, 흐르는 계곡 물을 끼고 숨어 있는 거대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바로 빨치산들의 인쇄소였던 ‘석실(石室)’이다.
지리산 빨치산들은 이 거대한 바위 틈을 작은 인쇄소로 삼고, 선전물을 제작했다. 세 개의 커다란 바위가 겹쳐져 생긴 폭 3미터, 높이 3미터 가량의 석실은 성인 4명이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면적의 공간이다. 스마트폰 라이트를 켜고 밝혀야 그 안의 생김새를 엿볼 수 있다. 대체 어떻게 여기서 신문을 제작했을까 의아하기도 했지만, 5년에 걸친 산 속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뭐든 못하겠는가. 바위가 눈비를 막아주고, 바로 옆에는 세찬 계곡물이 흐르니 신문 찍어내는 소리 정도는 잘 막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빨치산들은 이곳을 “삐라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제작했던 인쇄물의 제작방법은 종이에 등사를 하는 것이었다. 학교와 면사무소, 치안대에서 사용하던 갱지와 등사기가 인쇄 도구였다. 이렇게 인쇄된 전단은 지리산 인근에서 사는 주민들에게 뿌려졌다. 동시에 토벌대 측도 무수히 많은 삐라를 배포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이 삐라들은 빨치산들의 투항을 권고하는 문구로 가득하다.
<남부군>을 쓴 이태가 이곳 석실에서 일한 사람 중 하나다. 기관지 “승리의 길”을 비롯하여 해방구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언론이 석실에서 인쇄되었다. 한 줄기 빛만 비쳐 들어오는 석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산지로 내몰려 싸우다 죽어간 투사들에 대해 숙연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앞으로 작업 환경에 대해 불평하지 못하겠다”는 아픈 농담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가이드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과 석실을 처음 찾아왔던 기억을 회고했다. 박헌영이 관 속에 숨어 38선을 넘은 후로 이현상 부대를 찾아 입산한 원경 스님은 석실이 위치한 뱀사골에서 빨치산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에게, 석실과 뱀사골은 춥고 고달프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복잡한 공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석실을 구경하고 나온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여지 없이 단체사진을 남겼다.
화엄사에서 만난 토벌대장
‘천년송’으로 유명한 와운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둘째날 방문한 화엄사는 결이 다른 기억을 담고 있었다. 1951년, 국군 지휘부는 구례 화엄사가 빨치산 은신처로 활용될 수 있다고 여겨 사찰을 전부 태울 것을 명령했다. 당시 차일혁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절을 불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이 오늘에 이르는 데는 천년이 걸린다”며 불복종을 결심한다. 그의 이런 결단은 충분히 경탄할만 하다. 하지만 군대와 경찰에서 실제 출세한 것은 수백년 된 절을 불태우고, 민간인들과 빨치산을 마구 학살한 지휘관들이었다.
20세기 초 아니키즘 계열의 항일 운동에 참여했던 차일혁은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 그 시신을 정중히 장례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과거 반공주의적인 국가 기억에서 배제되었던 차일혁은 지금은 전국적으로 ‘양심적’ 경찰의 역사적 상징이 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첫날 방문한 뱀사골과 둘째날에 찾은 빗점골의 낡은 역사관들, 기념물들은 빨치산 토벌대의 ‘충혼’과 ‘순국’에 초점을 맞춘다. 통해 빨치산에 대한 반공주의적 관점을 재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차일혁이 화엄사 방화 명령을 거부하거나, 이현상의 시신을 정중히 장례 지낸 것에 대한 역사적 기억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양심적’인 토벌대가 강조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빨치산의 투쟁과 죽음이 국가가 끌어안을 수 있는 아픔의 기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보기 드물게 ‘양심적’이고 ‘인간적’인 토벌대장을 국가 기억의 상징으로 부각하고 있는 셈이다. 반공주의적 기억에 비해선 진일보했지만, 역사의 ‘선한’ 정통성을 세워나가는 과정으로 비치기도 한다.
“미완의 혁명가” 이현상
전쟁이 막바지로 흐르며 빨치산에 대한 포위망도 점점 좁혀졌다. 대성리 계곡에서는 네이팜탄 폭격이 쏟아져 수천 명이 죽었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남부군은 빗점골 지역에 은신하게 된다. 정전 이후 1953년 8월에 소집된 빗점골 회의에서 이현상을 비롯한 남로당계는 가혹한 비판을 받고 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북로당계는 휴전협정 과정에 남한지역 빨치산을 북한으로 송환하는 안을 내놓지조차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빨치산이 하산하여 도시에서 지하운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측이 박헌영 등의 남로당계에 전쟁 책임을 전가하며 숙청을 시도하였고, 남한 빨치산을 버린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현상은 같은해 9월 17일경 빗점골에서 하산하던 와중에 사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화엄사를 떠난 기행단은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 계곡으로 이동했다.
한데 “미완의 혁명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현상 사살 현장을 디오라마로 전시한 역사관을 둘러본 후 한참 동안 숨 가쁘게 산을 탔지만, 국립공원 입산 통제에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통제에 나선 직원 분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시신이 발견된 이현상 바위를 멀리서부터 찾아왔는데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결국 약소하게나마 통제 구역 초입에서 이현상과 지리산에서 죽어간 빨치산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노제를 지냈다. 손호철 교수의 말처럼 세계 게릴라 전쟁사에서 한국만큼 열악한 조건은 드물었음에도,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려진 이현상과 빨치산들. 남한에서 체 게바라보다 덜 기억되는 혁명가 이현상을 생각하며 안식을 빌었다. 우리는 사진으로나마 가지 못한 바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곡 어딘가 쉽게 찾을 수 없어 보이는 바위에 누군가 선명히 “이현상 바위”라고 새겨둔 모습이 찍혀 있었다.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 청년·학생운동의 경험을 쌓았던 이현상은 김삼룡, 이관술 등과 함께 1930년대 이재유로 상징되는 경성 트로이카에서 혁명적 노동자운동에 종사했다. 이재유의 체포 이후에는 초기 조선공산당의 명사였던 박헌영을 영입하고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며 엄혹한 1940년대를 투옥과 은신으로 보냈다.
해방 이후 사회운동에서 지도부와 중견층을 맡았던 세대는 그처럼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합법 공간과 비합법 공간 모두에서 잔뼈가 굵은 운동가들이었다. 탈식민 혁명의 국면이 냉전의 격화와 맞물리면서 운동을 이끌던 중견 활동가들도, 해방 이후 새롭게 급진화되어 운동에 투신한 젊은 활동가들도 모두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현상과 그의 동지들이 쓰러진 골짜기는 우리에게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죽음을 맞는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대전 골령골 학살지 : 죽음을 넘어
하동에서 둘째날 밤을 보낸 기행단은 서울로 향하는 길에 대전에 들렀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길이 1km에 달하는 학살지로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1950년 6~8월 전쟁 개전 초기에 이곳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7,000명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1,360여 구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대전과 충청도 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 그리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이었다. 제주 4.3 항쟁과 여수·순천 10.19 항쟁에 참가했던 정치범들도 당시 대전에서 복역하던 중 무자비하게 학살 당했다.
영국신문 데일리워커(the Daily Worker)지의 중국 특파원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은 대전을 나치의 벨젠 수용소에 비유한 기사와 팸플릿으로 학살의 진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평생 서방세계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미군 장교들이 학살을 지원하면서 남긴 사진과 보고서는 1999년에 이르러서야 기밀 해제로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기자의 취재와 미군의 기록으로 남겨진 사진 전시를 보며, 기행단은 대량학살의 참담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진실과 화해의 숲”이라 이름 붙여진 평화공원은 첫 삽도 뜨지 못한 가운데, 다행히도 발굴된 유해들은 차가운 콘크리트 가건물 대신 젊은 지역 목수들이 지은 나무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훼손된 추모비 옆으론 기억에의 의무와 진상규명을 외치는 현수막과 만장들이 나무에 걸려 스산한 바람에 흩날렸다.
쉽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대량 살상의 현장에 다녀온 터라,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선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참가자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희생자들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이기도 하다며 말문을 텄다. 수감 중에 학살된 정치범들은 물론이고,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던 민간인 중에도 해방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급진적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주체들은 상당히 많았다. 우리가 죽어간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들의 삶과 투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그들을 수동적 희생자가 아닌 주체적인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골령골 어딘가에 묻힌 투사들 중에는 이재유와 이현상의 오랜 동지였던 이관술도 있었다. 변장과 은신의 달인이라 불릴 만큼 민중 속에 깊이 착근했던 그였다. 정판사 위폐 사건 조작으로 시작된 조공 탄압 국면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관술은 대전형무소 정치범들 중 전시에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인물로 간주되었다. 학살에 참여했던 한 증언자는 가장 먼저 총살되던 이관술이 무척 담담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진화위 조사에서 증언했다.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순수한’ ‘양민’의 프레임은 여전히 우리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아야 했던 피해자들을 능동적인 주체가 아닌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간주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한계적 관점에서 벗어나 해방 전후의 시대를 살아갔고 또 투쟁했던 주체들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사회운동의 과제와 좌절, 그리고 오늘날 사회운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국가주의 서사에 맞선 민중운동의 기억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이후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우리 사회와 제도정치를 뜨겁게 달궈왔다. 그러나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워온 거대양당의 목표는 사실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국체’를 세우고 역사를 국가주의적으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에 있다.
역사를 ‘국체’의 소재로 삼고자 하는 욕구는 늘 강렬하다. 뉴라이트의 부상과 함께 이승만 재평가에 몰두해온 보수우파는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지칭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산업화’의 가치에 입각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해왔다. 한편, 민주당계 자유주의자들은 상하이와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국 가 헌법의 ‘법통’을 찾고 그 계보가 민주화와 이어져 있다는 역사관을 주창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그 절멸이 배제되지는 않을지 모르나, 결국 국가의 정통성 속에서 독립운동의 부차적인 흐름으로 배치되거나 현대사 속의 안타까운 ‘아픔’으로 대상화될 뿐이다.
1980년대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커지면서 국가주의 내러티브에서 벗어나 사회운동의 계보를 모색하려는 시도들이 폭넓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모색은 이후 민주당계 역사관 구축에의 동원으로 귀결됐다. 일부 시도들은 반공주의적인 기성 역사관에 대한 반대급부로, 되려 북한에서 특권화해온 역사적 기억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기울었다. 1920~30년대 조선 내 공산주의 운동을 “종파주의적”이라고 폄훼하며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의 투쟁만을 특권화하는 경향, 해방 전후사에 있어서 운동의 실패를 모두 박헌영과 남로당계의 책임으로 돌리며 북로당의 노선을 절대화하는 경향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사회운동의 역사적 계보를 재구성하기보다 북한의 정권이 만들어온 ‘국체’에 경도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리의 사회운동은 그러한 국가주의적 욕망에 포섭되지 않고 대안적 역사를 모색해나가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작업은 국가의 ‘역사 만들기’ 속에서 배제되고 망각을 강요당한 운동사의 계보를 모색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남한과 북한의 국가적 기억 속에서 공동으로 잊혀진 ‘빨치산’의 역사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빨치산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빨치산 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기억해나가기 위한 시도들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때로 일부 경향은 남로당계를 배제하면서 국가주의적 정통성을 성립시켜온 북측의 역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혹은 정반대로 남로당계의 인물들을 운동의 정통으로 내세우며 낭만화하는 경향성도 나타났다.
빨치산의 역사를 추적하고 돌아보는 것은 그들의 투쟁을 절대화하거나 새로운 노선의 정통성으로 삼아 교조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현상과 같은 투사적 인물들의 삶을 영웅화하거나 낭만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현상과 남로당계는 험난한 조건 속에서 강한 의지로 투쟁을 이어가면서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종전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결정들을 내리기도 했다. 냉전 시기가 짓누른 압도적인 제약 조건이 가져온 한계들이 운동의 역량을 소진시키거나 희생을 낳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운동의 특정 노선이나 인물을 정통성의 근원으로 삼는 획일적 ‘역사 만들기’를 넘어서야 한다. 오히려 그간 우리가 잃어버렸던 민중운동사를 재조명하면서, 오류와 한계까지 비판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사회운동의 바탕이 될 풍부한 경험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전쟁 전후로 급진적 사회운동의 흐름은 사실상 절멸당하고 말았지만, 빨치산 투쟁에서 살아남은 후 꾸준히 과거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재생하며 운동을 이어나간 사람들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 중 이일재나 박현채 등 빨치산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80년대에 학생운동, 노동자운동과 농민운동이 다시 급진화하는 데 중요한 실천적 혹은 이론적 기여를 제공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빨치산의 투쟁도, 해방 전후의 사회주의 운동도 낡은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혹은 역사의 아픔으로서 잠시 추모한 후 덮고 나아가야 할 문제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운동의 역사는 그대로 되풀이해야 할 전범이나 정통성을 끌어와야 할 도그마(dogma)가 아니다.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본령을 이어나가야 할 유산이다. 현대사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 속에서, 빨치산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 우리 사회운동이 스스로 고민해보아야 할 때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손호철,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 이매진, 2022
- 이태, 『남부군 – 최초로 공개된 지리산 빨치산 수기 개정판』, 두레, 2014
- 안재성,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 2007
- 안재성, 『경성 트로이카』, 사회평론, 2004
- 이태, 『이현상 –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학원사
글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