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좌파 웹진 딘덩(เกี่ยวกับเรา)의 짧은 글 ‘Was Thailand Colonised?’을 번역해 소개한다.
태국은 종종 에디오피아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유럽 강국들의 식민화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몇 안 되는 제3세계 또는 남반구 국가로 언급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된 국가들에 대해서나 태국에게나 이러 한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다. 실제 ‘시암’은 19세기 후반에서 시작해 20세기까지 내내 ‘거의’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여기서 전자는 대영제국을 지칭하고, 후자는 그 후계자인 미국을 가리킨다. 미국은 1900년대 중반 내내 왕국을 수십년 동안 사실상의 가신 국가로 운영했다.
‘식민지 시대’
태국에서 지배적인 서사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몇몇 군주들이 기예적인 외교술을 구사하고, 서구 전통을 수용함으로써 유럽인들이 시암의 통치권을 용인하도록 명백하게 설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암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와 영국의 식민지 인도(미얀마 포함) 및 말레이 영토 사이에 위치한 완충지대였을 뿐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핵심적인 두 식민 세력은 식민지를 보유한 상황에서 양국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고, 따라서 완충지대였던 시암은 일정한 주권을 허용받은 것에 불과하다.
1950년대 초기 태국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시각에서 태국은 1826년 강압에 의해 체결된 버니 조약(the Berney Treaty)과 1855년 보링 조약(the Bowring Treaty)과 관련하여 ‘반(半)식민지(semi-colonial)’ 국가였던 것으로 이해됐다. 해당 조약들은 영국인들에게 엄청난 양보를 허용하였는데, 봉건시대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을 시작하면서 본질적으로 무역을 독점하는 시암 왕국의 항구를 식민지화하는 것을 허용한 바 있다. 또한 이 조약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왕조가 인준한 불평등 조약(난징조약, 베이징 조약)과 유사한 시암 법(Siamese law)에 따라, 모든 영국인들에게 기소면제권과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실제로 영국군은 해군을 방콕으로 보내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총포를 동원한 이러한 외교는 바우링 조약 체결에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시암 왕국은 형식적인 수준이라도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식민지’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이 조약들은 왕정에 반대했던 카나트랏사돈당(Kanatratsadorn Party)이 1932년 쿠데타를 일으켜 시암이라는 국명을 태국(Thailand)으로 바꾸고, 당시 피분송크람(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육군 중령이 권력을 쥘 때까지 유지됐다. 열렬한 파시스트이자 경제적 민족주의자였던 피분송크람은 2차 세계대전이 개전될 때 조약을 폐지했다. 하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군이 태국을 점령하고 이어서 태국이 동맹국들에 선전포고를 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차 대전 이후
전후 대영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태국을 위한 새로운 디자인이 마련되고 있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 태국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필수적인 동맹국으로 인식됐다. 태국 수도 방콕에서의 치열한 권력 투쟁에도 불구하고, 모든 분파들은 궁극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의제에 충성심을 보였다. 1950~55년 태국은 한반도에 1만1,000명 이상의 병력을 파병했다. 내부적으로 태국은 나중에 에어 아메리카로 이름이 바뀌는 Civil Air Transport를 비롯한 서구 기업들이 현지에서 법인을 등록하고 운영하는 것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CIA의 전방기업(front company)인 이 회사는 1951년부터 1976년까지 태국에서 운영됐다.
그러나 1957년이 되자 확고한 왕당파이자 미국 충성파, 반공주의자인 사릿 타나랏(Sarit Thanarat)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왕국을 군사 통치로 몰아넣었다. 사릿 정권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이라면 체포해 즉결 처형했고,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의 동남아시아 침략
지리적으로 볼 때 이 왕국(태국)은 캄보디아와 라오스, 태국 내에서의 반란 운동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침략에 호응할 수 있는 완벽한 위치에 있다. 사릿 정권 하에서 미군은 태국 군대를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는 그들의 외부 후원자들에 대한 충성 문화가 내재되어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태국의 외교 정책은 NATO와도 보조를 맞추었다.
1962년 사릿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리자, 그 자리는 사릿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군사 독재자 타놈 키티카콘(Thanom Kittikachorn)으로 대체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소련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은 크게 비판하면서도, ‘태국인들은 사랑하는 군주를 방어하기 위해 선출되지 않은 강한 지도자를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태국식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시기 태국은 7곳의 미 공군기지의 설치와 약 50,000명의 병력을 수용했다. 그 대가로 15억 달러 이상의 경제 원조만이 아니라, 방콕의 반동적 정권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군사 원조가 쏟아졌다. 한편, 반미 정치조직에 친화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체포하거나 초법적인 처형으로 처리하였다. 반면 태국공산당 소속 반란자들은 점점 더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이따금 미 공국기지를 향해 산발적인 타격을 가했다.
수천 명의 태국 여성들 또한 주둔 미국 군인들의 성매매 행위를 위해 공군기지 근처 마을로 옮겨졌다. 오늘날 이 지역의 성산업 수도 파타야(Pattaya)가 과거 태국 내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가 있던 우타파오 공항(Utapao Airport) 바로 옆에 위치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은 11,000명 이상의 군대를 베트남 남부로 파병했다. 태국군은 라오스와의 ‘비밀전쟁’과 캄보디아 폭격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됐다. 당시 서구에서 온 주인들은 자기들이 거느리는 사람들의 지형과 문화,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국군은 필수적인 최전방 동맹국으로 입증되었다. 본질적으로 잔인한 독재 정권의 강력한 지휘 아래, 태국 정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적대를 중재하고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에 맞선 봉기
당연히도 방콕의 통치 엘리트들은 이러한 분업에 대한 합의를 만족스러워 했지만, 태국 인민들에게까지 똑같이 말할 순 없었다. 197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만행에 반대하는 정서가 커지면서, 태국 내 급진주의적인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동맹은 공개적으로 (미국 비판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972년 미군은 베트남에서 지상군 대부분을 철수시켰지만, 태국 주둔은 유지하고 있었다. 서구 세력이 뒷걸음질치고 타놈 키티카콘의 권력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대중들은 대규모 거리 시위를 전개했고, 며칠간의 봉기로 타놈 정권을 추방하고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태국에 민간 정부를 세웠다.
새로운 민간 정부는 불안정했고, 여전히 전 군부 정권에 대한 수많은 흔적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적으로 미군의 주둔을 국경 바깥으로 빼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따르기를 꺼려했다. 태국 군대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들의 반동적인 지도자들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지도자들은 차례로 서방의 후원자들에게 충성했다.
1975년 사이공, 라오스, 캄보디아의 함락 이후 도미노 효과가 나타났고, 태국은 그 다음이 될 것으로 보였다. 1976년 6월, 태국 정부는 남아있는 미군 마지막 병력을 인정사정없이 내쫓았다. 10월, 타놈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망명지에서 돌아왔다. 그가 귀환하자 태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태국 내의 반동적인 군국주의 파벌들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탐마삿대학(Thammasat University)에서 벌어진 학살이었는데, 50~100명의 학생들이 살해됐고, 수백명의 학생들 이 잔인하게 짓밟혔다. 그날 저녁, 군부는 이후 10년의 통치를 이어갈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반공 강경파인 타닌 크라이비첸(Thanin Kraivichien)을 총리로 임명했다. 당시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서는 서구 강대국들이 타놈의 쿠데타를 위해 비공개로 도와주었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민주주의로의 전환”
짧은 기간 동안 민간 통치는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사릿-타놈 시대의 반동 통치로 돌아갔다. 1980년대에 점진적인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는 계속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태국은 여전히 사릿의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서구 열강들에 의해 실현된 군사 독재 정권의 강력한 권력 아래에 있다. 실제로 현 프라윳 총리는 서방이 한국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 창설한 군부대 출신이다. 그 중 캄보디아는 태국 군부에게 크메르루즈(the Khmer Rouge)와 함께 일하며 자기 검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면서 2014년 군부 쿠데타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재정적 자본을 제공했다.
소련이 해체되고 미 헤게모니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세계적인 저항 이후, 오늘날 미국은 태국과 같은 지역에 대규모 군사 주둔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비록 태국군 상부에는 여전히 기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소규모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대신, 금융 지정학적 메커니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미 헤게모니가 도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심미적 관점에서는 20세기 중반의 잔인한 군국주의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만, 여전히도 의심할 여지 없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다.
태국은 식민화됐었나?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태국에서 ‘미군 주둔기’로 알려진 시기로 돌아가서 그것이 식민화의 성격들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한다. 195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미국은 효과적으로 태국 왕국의 외교, 경제, 군사 정책을 통제했고, 대규모 군사력을 배치시켰다. 1969년 <트리컨티넨탈>지는 이렇게 서술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태국은 워싱턴의 지시를 가장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그러므로 키티카콘 사령관이 “미국이 태국을 자신의 51번째 주로 간주하는 것 같다”고 언급했을 때 그는 의구심 없이 진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글 : 딘덩(เกี่ยวกับเรา)
번역: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