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 지정학적 논리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영원히 말할 수 없다
2022년 3월 20일
[역자의 말] 중화권의 정치연구자 한따거우(韩大狗; 가명)의 글 “分離主義”的無奈:脫離民衆的“民族自決”,如何成爲俄羅斯區域霸權的傀儡(‘민중과 유리된 ‘민족자결’은 왜 러시아의 지역패권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번역 및 보충했다. 이 글은 돈바스 지역의 민족갈등을 다른 ‘얼어붙은 갈등’이 발생한 지역들에 대한 역사 서술과 함께 설명한다. 전쟁의 시급한 종결과 더 이상 무고한 민중들이 삶을 빼앗기지 않길 기원한다. 아래로부터의 반전 운동만이 그 힘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2월 24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우크라이나로의 병력 진입 작전을 진행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정세는 우리에게 단호하고도 과감한 행동을 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면서, 그것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러시아를 향해 구조를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독립을 인정하는 이유로 “돈바스 지역(즉,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두 지역) 주민들의 희망과 인상, 그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꼽았다.
- 우크라이나 정부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무장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2014년 6월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3월 도네츠크 자치권 요구 시위가 발발한 직후 도네츠크 지역 일부를 점유한 러시아 출신 무장집단은 러시아의 네오나치 극우정당인 러시아국민통합(Russian National Unity)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에도 네오나치를 이념으로 삼는 부대가 편재되어 있는데, 바로 악명 높은 아조프 연대(A30B)다. 즉, 2014년 돈바스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네오나치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 그 뒤에는 두 나라 정부가 있었다. 파괴된 것은 민중의 삶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원을 민족 갈등,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어 사용 인구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만 돌리는 것은 현지 문제를 단순하고 평이하게 이해하는 발상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한 푸틴의 해석이기도 하다. 이런 해석이 의도하는 바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호소할 수 있게 만들고, 러시아의 침공에 대해 명목상 법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 있다.
애석하게도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로 침공한 이래 푸틴이 구상했던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권역 시민들이 줄지어 러시아군을 환영하는 장면은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푸틴의 주장은 일련의 간단한 조사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불합리하다는 걸 보여준다. 2016년, 오타와대학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인구의 분리주의운동에 대한 지지율은 고작 12퍼센트에 불과하며, 돈바스 지역에서도 31퍼센트에 그친다.
- 2016년 『유럽 정치와 사회』(European Politics and Society)에 실린 이반 카챠노프스키(Ivan Katchanovski)의 논문 「The separatist war in Donbas: a violent break-up of Ukraine?」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연방의 일부로서 자치권 획득을 찬성하는 비율은 23%,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분리와 독립국가의 형성을 찬성하는 비율은 8%, 우크라이나에서 탈퇴하고 다른 국가에 합류하는 선택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23%를 차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2018년에 발표된 컬럼비 아대학의 또 다른 연구 논문은 고작 29퍼센트의 돈바스 사람들만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분명하게 분리주의운동을 반대한다고 밝힌 사람은 52퍼센트를 차지했다. Giuliano, Elise. “Who supported separatism in Donbas? Ethnicity and popular opinion at the start of the Ukraine crisis.” Post-Soviet Affairs 34, no. 2-3 (2018): 158-178.
바꾸어 말해, 만약 푸틴이 전쟁 이후 크림반도에서처럼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했더라도 푸틴은 결코 그가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어 사용 인구는 확실히 비중이 높다. 2001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부 크리미아와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모어로 삼는 인구 비중은 70퍼센트를 상회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러시아로의 편입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상기한 바와 같이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하여 러시아로의 편입을 지지하는 비중은 29%에 불과했고, 반대한다는 입장은 52%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유럽이라고도 규정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맹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관세동맹 가맹을 둘러싼 여론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유럽연합보다는 유라시아 관세동맹을 국적 불문 크게 지지한다. 사무엘 차랍(Samuel Charap)과 티모시 콜튼(Timothy J. Colton)의 저서 『Everyone Loses: The Ukraine Crisis and the Ruinous Contest for Post-Soviet Eurasia』에 따르면, 2014년 봄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각각 73%(도네츠크)와 64%(루한스크)로 EU보다 유러시아 관세 동맹 가입을 선호했다. 이는 중·서부 지역에 비해 26~42% 포인트 더 높다.
따라서 푸틴이 비록 “우크라이나 러시아어 사용 인민의 해방”이라는 구호 아래 전쟁을 일으키긴 했지만, 오히려 우크라이나 인민 자신의 목소리는 여지껏 나타난 적이 없다. 이번에 푸틴에게 구원을 요청해 러시아 침공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두 정치적 실체(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정권 존립 합법성이 돈바스 지역에서 얼마나 인정받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도 문제다. 분리주의 이데올로기가 현지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고 있다면 분리주의 정권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들의 존재는 지역민에게 어떤 의미일까?
돈바스와 그밖에 러시아 주변의 분리주의 충돌을 함께 살펴보면 이 지역의 ‘민족 갈등’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 곳곳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살펴보면 문제는 ‘민족모순’이나 ‘민족자결’로 표현될 정도로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적 정서가 존재하고 때로는 그 정도가 선명할 때도 있지만, ‘민족자결’은 지배 엘리트나 러시아 쇼비니즘에 의해 지역민을 마음대로 짓밟는 구실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통치 엘리트들은 러시아와 비공식적으로 이익을 교환했고, 이러한 이익 교환으로 인해 현지의 러시아에 대한 물질적 의존은 충돌이 장기화되는 뿌리깊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지아의 ‘얼어붙은 갈등’
러시아 남서부이 인접한 조지아[조지아어로 자국을 지칭하는 토착지명은 사카르트벨로(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 sakartvelo)이며, 조지아(Georgia)는 영어 국호이다.]는 돈바스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로 독립된 두 개의 정치체, 즉 조지아 북서부 압하지야와 북부 남오세티야를 포함한다. 학계에서 두 지역에서의 충돌은 흔히 ‘얼어붙은 갈등’(frozen conflict)로 묘사된다. 두 나라의 정세가 우크라이나와 같은 전쟁 양상으로 격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통과 협상이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세가 얼어붙게 된 배경에는 지역의 유일대국인 러시아가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통제를 가한 결과가 작용됐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국 게임’과는 다르게 이런 얼어붙은 갈등은 주류적인 국제 여론이 무시한 비공식 거래와 범죄,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다.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분리주의는 소련 붕괴 직전 모스크바 중앙권력의 붕괴를 앞두고 조지아 소비에트 정부가 지체 없이 새로운 국경에서 조지아화 정책, 특히 조지아어 교육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러한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의 행태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또 다른 소수민족 지역인 아자라(Adjara)의 민중들에게 불만을 안겨주었다. 더불어 당시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실권을 빼앗기 위해 러시아와 소련의 다른 가맹 공화국 내 자치지역에 “더 큰 권력을 쟁취하라”고 호소했다. 당시 많은 자치지역 정부들이 이에 호응하였고, 그 중에는 이후 옐친에게 크게 성가시게 할 체첸과 타타르스탄, 조지아 등 3개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1990년 남오세티야는 자치주에서 자치공화국으로의 승격을 자체적으로 선포했다. 이에 맞서 조지아 정부는 남오세티야 자치구 지위 박탈을 선언했다. 압하지야 역시 조지아에 더 큰 자치권을 요구했고, 협상 실패 후 내전으로 치달았다. 1992년과 1994년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각각 러시아의 중재로 조지아와 휴전했고, 러시아는 두 지역에 상주부대를 파견했다.
이를 언어정책과 민족신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짜 이야기는 휴전협정 이후 벌어졌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분쟁에 민족주의적 정서가 더 많이 얽혀 있었다면, 휴전 이후 새로운 국가의 운영과 유지에는 러시아의 보급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소련 붕괴 전 남오세티야의 일자리는 광업(연광·아연광)과 농업에 의존했지만, 압하지야는 농업(특히 헤이즐넛· 감귤 등 상업작물의 수출)과 흑해 연안 관광업에 의존했다. 90년대 초 조지아 내전 후 인구의 대규모 방출로 인해 남오세티야의 광업은 더 이상 가동되지 못했다. 압하지야의 관광업 역시 비자 문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신생 독립국가 정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생존의 지혜는 새로운 독립과 함께 도래하는 고립된 환경과 산업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때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정부에게 있어 ‘비공식 산업’은 가장 편리한 답이 됐다. 90년대 이후 남오세티야는 광업을 부흥시킬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하였고, 수출이 없어 농업에서 얻는 재정수입은 턱없이 적었다. 다행히 남오세티야의 지배자들은 다른 나라들이 원하는 편리한 조건인 교통의 독점을 가지고 있다. 남오세티야 수도 츠힌발리에서 러시아 내 북오세티야 도시 블라디캅카스로 통하는 고속도로 터널은 남오세티야가 조지아와 왕래를 끊은 뒤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통로였고, 남오세티야 사업자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코스다. 남오세티야 정부는 이 터널에 검문소를 설치함으로써 정상 관세 외에 공식 명분이 없는 통행료를 많이 받고 있다. 결국 이 통행료는 대부분 남오세티야 주민들의 일상용품의 소비에 의해 전가되었고, 그 수익금은 정부 비용으로 착출되거나 중간에서 몰래 빼갔다. 반면 이런 교통 독점의 이점이 없는 압하지야에서는 반(半)관영 마피아들이 매년 가을마다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농민들이 헤이즐넛을 수출하는 차량을 약탈한다. 두 지역에서 정부가 돈을 벌어들이는 또 다른 통로는 마약 판매자로부터 보호비를 받는 것이다. 코카인 무역을 금지하는 것은 현지의 세미-정권에게는 득이 되지 않는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약 판매상과의 협력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 된 것이다.
조지아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는 분리주의 정권인 두 정권(남오세티야, 압하지야)의 거의 유일한 무역 파트너이다. 이런 무역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현지 분리주의 정권을 대대적으로 육성한다. 가스프롬(러시아의 에너지 국영기업)이 조지아와의 천연가스 거래에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빚을 독촉할 때, 분리주의 지역들에게는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것만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인민이 경제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이며, 혹은 이와 같은 혜택마저도 평범한 민중들의 머리 위까지는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 지역은 러시아로부터 생활용품 수입을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지 정부에게는 독점적인 권력이 부여되고, 이는 동시에 주민들을 옥죄게 된다.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는 러시아 루블과 교환할 수밖에 없다. 현지의 러시아인 고용주들은 루블을 사용해 임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은 러시아와 거의 결속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은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줄어들수록 러시아에 의존해야 하고, 러시아에 의존할수록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현지 지배 엘리트들이 러시아와 단일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생활용품과 생산재를 철저하게 독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립된 환경은 대개 저주이지만, 두 지역의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조지아와의 관계 정상화가 아니라 오히려 현지에 대한 확고한 통제와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하는 보장 수단이다.
- King, Charles. “The benefits of ethnic war: understanding Eurasia’s unrecognized states.” World politics 53, no. 4 (2001): 524-552; Lynch, Dov. “Separatist states and post-Soviet conflicts.” International affairs 78, no. 4 (2002): 831-848.
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국가를 조직범죄에 비유한다. 틸리에 따르면, 국가가 전쟁을 일으켜 안보위기를 조성하게 되면 국가는 이를 통해 국민에게 보호비(즉, 세금)를 받는다. 그러면 다시 보호비를 활용해 군사력을 증강함으로써 국민들에 대한 통제·조세 능력을 강화하고, 전쟁의 위협을 더욱 확대한다. 그리고 이를 이유로 더 많은 보호비를 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이런 문제설정은 현대 전기의 서유럽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국가와 조직범죄의 유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분리주의 정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분리주의 정권은 전쟁의 위험을 통해 현지 통제를 구축하고 (말 그대로) 보호비를 받는다. 주민들에게 사회서비스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정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정권이 모든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독점한다. 그 때문에 ‘얼어붙은 갈등’ 속에서 전쟁의 위험은 여전히 지역민의 눈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지역의 민족주의 정서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순 없다. 1990년대 초 조지아 정부의 문화정책이 소수민족 정서의 반등을 초래한 것은 분명 사실이며, 그에 따른 소수민족들의 반발은 정당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개입, 러시아에 의존적인 현지 정권의 육성, 그리고 이들 정권이 조직적 범죄를 통해 현지를 통제하는 수단이 지속적으로 충돌해온 문제는 지역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관건적 요소이다.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것은 1990년대 초반 마찬가지로 민족운동이 일어났던 또 다른 자치공화국 아자라의 경우에는 소련 붕괴 이래 현지 정치인과 군벌 아슬란 아바시저(Aslan Abashidze)의 손아귀에서 상당한 자치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태 전개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면, 바로 아자라가 가장 필요로 했던 바깥과의 연계 대상이 러시아가 아니라 터키였다는 점에 있다. 터키가 조지아에 대리정권을 수립하는 데 있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에 아자라 정세는 무장충돌이나 얼어붙은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아자라는 트빌리시(조지아 정부)와의 협상 이후에도 자치공화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아바시저가 현지 시민들에 의해 전복된 것은 2003-04년 발생한 ‘장미혁명’ 때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 : 그들은 러시아인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둔 몰도바는 구 소련 영토 내 또 다른 분리주의 ‘얼어붙은 갈등’의 사례다. 몰도바 동부의 트란스니스트리아 좌안 지구는 역사적으로 결코 특별한 소수민족 밀집지역이 아니었다. 소련 시절에는 철강생산의 요충지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에서 주로 온 체제 내 일꾼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철강기업 외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소련군의 주둔지였다. 따라서 러시아어 사용 인구의 대다 수는 소련 시기의 당과 국가기구와 신분적 정체성과 일상생활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붕괴의 풍파 속에서도 몰도바는 조지아와 마찬가지로 주체적 민족으로서의 문화주권을 자기 경내에서 재확인하려 했다. 이는 소련의 70년 묵은 러시아 문화패권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지만,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 러시아어 인구의 이익과 정서를 건드리고 말았다. 결국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구 소련의 주둔군은 공장주들과 함께 현지 정부와 안보기구를 장악하였고, 몰도바가 소련으로부터 독립(1991년 8월)한 후에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다비아 공화국은 독립을 선언(1992년 3월)하고 국기의 좌측 상단에는 아직도 낫과 도끼를 상징물로 내세우고 있다.
그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지는 않지만, 압하지야나 남오세티야 못지않게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1992년 러시아군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 지원군 명목으로 참전하였지만 러시아 관공서에서는 ‘지원군’ 지휘관들에게 대대적으로 승진 포상을 내렸다.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함으로써 몰도바와 철군에 합의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러시아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는 거의 유일한 교역 상대인데,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구 소련의 오래된 공업기지로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1990~2000년대 소총 등 경무기를 만들어 동병상련의 상황에 놓인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아제르바이잔 내) 나카 등 다른 분리주의 충돌지역에 수출했다. 루블화는 압하지야나 남오세티야보다 더 잘 유통되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1990년대에 오랫동안 러시아 정보요원을 맡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중앙은행은 모스크바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 King, Charles. The Moldovans: Romania, Russia, and the politics of culture. Hoover Press, 2013.
민족주의 충돌에 대한 연구에서 광범하게 내린 결론이 있다. 바로 자치지역의 경우, 소수민족 인구 비중이든 민족문화간 차이의 정도이든, 분리주의 충돌 내지 내전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것에서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평화로운 시대에 중앙정부가 이 지역에 부여한 자치권이 클수록 위기가 도래하며, 국가주권이 훼손될 때 그 지역의 충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Cornell, Svante E. “Autonomy as a source of conflict: Caucasian conflicts in theoretical perspective.” World politics 54, no. 2 (2002)
하지만 실제로 이 결론은 “관련성을 인과관계와 동일시한다”는 논리적 오류의 단적인 예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사례는 바로 이 관점의 오류를 말해 주고 있다. 소련 시절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자치지역이 아니었지만, 소련 붕괴 과정에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통해 지역을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