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香港市民支援愛國民主運動聯合會; Hong Kong Alliance in Support of Patriotic Democratic Movements of China; a.k.a. 지련회) 상무위원회가 1989년 창립 이래 32년만에 해산을 결의하였다.
지난 8월 21일 해산 여부에 대한 내부 토론을 거친 지련회 상임위원회는 오는 9월 25일, 해산안에 대한 회원단체 투표에 들어가기로 했다.
또한 지련회는 웹사이트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게시물을 모두 삭제하고, 계정 운영을 중단했다. 30년 넘게 매년 개최해온 집회 관련 동영상, 1989년 중국 천안문 시위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인터뷰 자료 등 수천 건이 지워졌다. 이는 경찰 당국의 명령 때문인데, 경찰은 “지련회의 게시물이 홍콩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밝히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콘텐츠가 불법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의 포괄적이고 모호한 설명은 시민사회의 혼란과 운동의 위축을 야기한다.
기실 지련회 해산은 그 수순이 예고된 것이었다. 2020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이 통과된 후, 지련회 주석 리척옌(李卓人)은 지련회가 갖고 있는 모든 개인정보를 파기하고, 그간 지련회의 여러 출판 활동 결과물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 높은 탄압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진지를 지키며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이미 일종의 항쟁입니다”라고 덧붙였다.
해산을 추진하겠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홍콩 경찰은 지련회에서 활동하던 여러 활동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지난 8월 25일 경찰로부터 자료 제출을 요구받은 지련회 활동가들은 열흘이 지난 9월 5일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요구하는대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활동가들은 “지련회는 외국세력의 대리인이 아니”며, 경찰이 아무 증거 없이 지련회를 협박하는 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공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9월 9일, 지련회 상무위원회에 소속된 7명의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를 적용하고, 220만 홍콩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동결했다. 공안당국의 목표는 지련회의 ‘궤멸’로 보인다.
올해 4월 16일, 불법집회를 준비했다는 혐의로 징역14개월 판결을 받아 복역 중인 리척옌은 지난 9월 20일 발표한 옥중 서신을 통해, “지련회는 1989년 설립 이래 항상 홍콩인들을 주체로 하였으며, 홍콩인 스스로 조직하고 운영해온 단체”라고, 공안당국의 혐의를 반박하면서, 그럼에도 지련회 회원 단체들에게 해산안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지금의 정세에서는 해산만이 가장 좋은 해결방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난 32년 간 지련회는 홍콩 민주파의 구심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1989년 5월 21일, 홍콩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100만 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진 당일 저녁 ‘홍콩민주제도촉진연합(香港民主政制促进联委会)’을 투쟁의 임시 사무처로 선언하였는데, 이것이 지련회의 전신이다.
“반환을 앞두고 1989년 대륙의 톈안먼 사건 당시 ‘조국’의 젊은이들이 유혈진압되는 광경은, 정치는 역시 폭력적인 것임 을 느끼게 해주었다. 홍콩에는 정치와 폭력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 뿌리 깊게 자리잡았다.”
1989년 당시 홍콩의 대규모 시위는 같은 시간 베이징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톈안먼 항쟁에 대한 연대의 성격으로 이루어졌다. 지련회는 “중국 대륙의 민주운동을 지원하고, 민주와 자유, 인권, 법치를 쟁취하여 대륙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① 민주화운동 인사 석방, ②톈안먼 항쟁에 대한 재조사, ③ 학살 책임 추궁, ④ 일당독재의 종결, ⑤ 민주중국의 건설을 5대 사업 강령으로 삼았다.
운영상에서 지련회는 매년 20여 명의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여 일상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상무위원회 산하에는 비서부, 조직부, 재무부, 전신·출판부, 교육·청년부, 권익보호부, 해외연결부가 있어 구체적인 사업 영역을 담당해왔다. 지련회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제토 와(司徒華)가 2011년 초 세상을 떠난 후로는 노동운동가 리척옌과 호춘옌 등이 주석 직무를 맡았는데, 실제로는 집단적인 리더쉽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지련회의 주된 활동 중 하나는, 매년 6월 4일, 지련회는 톈안먼 항쟁을 기억하는 대규모 집회를 주최하는 것이다. 홍콩의 중요한 정세마다 이 집회는 대중행동으로 이어지는 기촉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출판 사업과 6·4기념관(六四纪念馆) 설립 등 대시민 교육과 선전도 주요 사업 중 하나다.
이와 같은 지련회의 활동은 중산층과 엘리트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얻어 온 민주파의 기반을 바탕으로 했다. 톈안먼 사건 추모집회에서 ‘민주’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공유했고,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비전으로 삼았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홍콩의 청년 세대는 지련회와 구세대 민주파, 중산층들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자신의 미래로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가령 “비폭력”이나 “법치” 등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중국 대륙의 민주주의를 기원하는 지련회의 구호에 대해 “왜 우리가 ‘다른 나라’의 문제에 신경써야 하느냐”고 의문을 던졌다. 우산운동 이듬해 홍콩의 몇몇 대학 학생회가 보인 ‘6·4’ 참여에 대한 거부, 2019년 이후의 명백한 외면 등이 그 예다.
이는 과거와 같은 민주파 운동이 지속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때문에 2014년 홍콩 우산운동을 과거 민주화 운동과 하나로 묶어 거칠게 바라보는 시각은 홍콩 내부의 다양한 이견들을 드러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지련회의 운동이 여전히 상징적으로는 홍콩 항쟁의 구심적 지위를 차지했으면서도, 청년 세대에서는 그렇지 못했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서구의 매스미디어들은 우산운동을 단순하게 서구적인 시각, 서구가 원하는 틀에 가두어 설명하지만, 이런 시각으로는 우산운동을 경과하며 드러난 내부의 분열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2019년 반송중 운동에서는 시대간 갈등, 용무파와 비폭력파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수면 아래로 감추기 위한 시도들이 지속되기도 했다. 많은 민주파 인사들은 「兄弟爬山,各自努力」(모두가 산을 오르는 형제이나,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자)라는 구호가 가진 일종의 빅텐트 전술이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홍콩 항쟁이 지닌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진 못하기도 했다.
어쩌면 공안당국의 탄압과 국가보안법에 의거한 총체적인 봉쇄가 시민사회의 활동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홍콩 항쟁의 무엇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련회의 해산을 두고 이를 단순히 민주vs.반민주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홍콩 사회 내부의 복잡한 모순과 지난 항쟁의 한계를 정확하게 돌아보는 걸 방해하기도 한다.
홍콩 사회가 “이견을 수용하지 않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이는 심각한 사회 파괴 행위이고, 단기적으로는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 사회와 역사에 미칠 악영향이 매우 크다. 이를 홍콩만의 문제, 혹은 중국공산당의 문제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순을 돌아보는 지난한 과정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홍콩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누군가 말했듯 홍콩의 미래는 벽 위에 쓰여져 있지 않다. 세상 일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며, 오직 사람의 마음이 죽지 않는 한, 언젠가 우리는 다시 빅토리아공원에서 정부청사까지 행진하면서,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7월 1일이 오기를 기대한다.” – 리척옌의 옥중서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