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인터뷰 시리즈 첫번째, 플랫폼c 회원이기도 한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활동가 인터뷰를 이어간다. 지난 7월30일, 반빈곤운동 단체들이 모여 있는 남영동 아랫마을 사무실에서 이뤄진 이 인터뷰는 ‘활동가 김윤영’에 집중한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는 ‘반빈곤 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윤영은 학생운 동을 거쳐, 2013년부터 빈곤사회연대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정을 비롯한 빈곤정책과 주거권, 강제퇴거 반대를 이슈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인터뷰 읽기
플랫폼c(이하 ‘플씨’) :빈곤사회연대는 반빈곤 운동을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빈곤 퇴치나 빈민 운동이 아니라 ‘반빈곤’인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걸 목표로 하는 운동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윤영 : 보통 빈곤운동이라고 하면, 세계적으로는 밀레니엄 개발 목표라던가 절대빈곤 퇴치운동 같은 것들이 있죠. 근데 저희는 빈곤의 발생이 신자유주의 사회 아래서 강화되는 경쟁과 착취로 인해서 심화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빈곤의 원인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 맥락에서 반빈곤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이 만들어졌다라는 걸 인식하고,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외면하지 않는 태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현재의 조건들 을 ‘지양’하면서, 그러나 이것이 구조적인 결과라는 점을 인식하는 운동을 반빈곤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곤율을 몇 퍼센트로 낮추자든지, 평균 소득 수준은 얼마까지 하자든지, 이런 방식으로 목표를 정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현재 빈곤한 상태인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그걸 통해 갈등을 조직하는 거죠. 그렇게 모인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해 나갈 때 빈곤 없는 세상, 차별없는 세상의 단초가 마련된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빈곤에 맞선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를 꾸려나가는 게 빈곤사회연대의 목표에요.
플씨 : ‘주체’를 강조해서 ‘빈민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반빈곤 운동’인 이유가 있을까요?
윤영 : 철거민, 노점상 등 예전부터 이어져온 빈민운동의 맥락과 외환위기 이후에 등장한 빈민들이 처하는 조건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저임금이나 불안정한 노동조건 때문에 일상적으로 빈곤을 경험하잖아요. 기존의 빈민운동은 노점상, 철거민과 같이 특정한 이름이 있었어요. 그런 점 때문에 ‘빈민운동’이라는 말론 새로운 빈곤문제를 담기 어려웠죠. 철거민과 노점상인 경우에도 철거, 노점 문제로만 빈곤을 경험하는건 아니거든요. 한 사람의 경험 안에서도 빈곤의 모습은 다양해요. 장애인 가구원에 있는 노점상이나 파산한 철거민처럼요. 가만히 보면 회원들이 실제 그런 일을 경험하는데, 기존 단체들은 자기 의제가 있으니까 회원들이 겪는 빈곤문제를 꾸준히 고민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던거죠.
반빈곤운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플씨 : 저희도 대학생으로서 빈활에 참가해봤었는데 참여하면서 해소되지 않은 고민이 있었어요. 빈민에 대한 어떤 혐오, “게으르다”, “더럽다”, “위험하다” 이러한 부정적 편견이 있잖아요. 그러한 편견에 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이 사람들을 불쌍한 대상으로, 시혜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인데, 그러면 또 소위 “벤츠 노점상”이라든가 자영업자 철거민 식으로 시혜적인 시선에 맞지 않은 경우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요. 이런 시선들에 어떻게 대응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들어요. 그리고 빈활을 하면서 같이 참가했었던 사람들에게서 이런 고민이 뭔가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처음 반빈곤운동을 접하게 되면 받는 딜레마,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윤영 : 먼저 부정적 편견이라든지 이런 거 있잖아요. “스스로 일하지 않는 더럽고 냄새나는, 폭력적인”과 같이 몇몇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징을 전체의 이름으로 덮어 씌울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들이 차별받는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노숙인들에 대해 다들 “저렇게 맨날 술을 먹는데 나아질 리가 있냐”고 얘기하잖아요. 근데 대부분의 노숙인은 술을 먹지 않아요. 마시는 분들이 오랜 시간 거기서 머물고 밖에 있다보니깐 눈에 보이는 거죠. 사람들은 쉽게 그걸 전체의 특징으로 치환하죠.
실제로 그런 모습들이 있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겪어온, 겪고 있는 빈곤의 결과이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원래의 특징’이라고 보긴 힘들어요. 사람들은 “그래서 가난해졌다”고 하지만 그건 선후관계가 바뀐 얘기라는 거죠. 예를 들어 빈곤층에 대해서 무력하다든지, 진취적이지 않다든지, 좀 더 장기적인 시선으로 계획하지 못한다든지, 이런 식의 비판들이 특히 많죠.
이런 점을 교정하는 게 탈빈곤을 위한 길이라고 정책적으로도 생각을 해요. “무력함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 무력함이 왜 만들어지는 지 생각해보면 저는 너무너무 이해가 되거든요.
자신의 시도가 정당하게 보상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힘을 낼 수 있을까요? 하다 못해 돈을 모으는 일도 월급이 한 500만 원 되는 사람은 그냥 100만 원씩 떼서 모으고 400만 원을 쓰고 살면, 그래도 1년이 지나면 1200만 원이 모일 거 아니에요. 그에 비해 월급이 100만 원인 사람은 20만 원씩 모으려고 해도 일상에 엄청 스트레스가 오거든요. 근데 치과 한 번 갔다 오니까 100만 원 나갔어, 그러면 진짜 더 이상 돈 모으기 싫죠.
저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하게 총체적으로 실패하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결과로서 지금 현재 상태를 바라보는 구조적인 시선, 이 사람의 경험에 대해서 조금 더 상상할 수 있는 통시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 하고요.
이게 지금 당장 이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진 않겠죠. 그래도 일단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인정할 수 있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빈민들이 유일하게 인정받는 고유성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이 사람이 딱 부합할 때잖아요. 그걸 벗어나면 악마화되기 쉬운 것 같아요. 꼭 노점상 철거민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열심히 연대했는데 “저 사람들 연봉 4천만 원 5천만 원인데” 이러면은 갑자기 다들 띠용하잖아요. “생산직 노동자들이 연봉이 5천이야?“ 라고 하면서. 그래서 이거는 노점상 철거민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고 차별받는 집단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플씨 : 연대가 필요한 상황이 있고, 또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빈곤이 어떤 사회적 조건이고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를 띌 때, 모든 사람들이 빈곤 문제랑 무관하다고만 얘기할 순 없겠네요.
윤영 : 그래서 ‘반빈곤’이라는 관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빈민 운동이랑 반빈곤 운동이 대당하는 건 아니에요. 기존에는 ‘빈민’이라는 호명을 통해 주체화되고 모일 수 있었다면,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빈곤 문제를 다룰 필요성이 생긴 거죠. 산업화 시기에는 이농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도시 빈민이라는 집단이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IMF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빈곤의 양상이나 지금 굉장히 일상적으로 만연하고 반복적인 빈곤은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거든요. 그런 새로운 범주들을 통과하기 위해서 반빈곤이라는 관점이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왜 운동의 길에서 빈곤을 해결하고자 하는가
플씨 :빈곤 문제 해결에 있어 관공서나 NGO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 같은 길도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무원이라는 진로를 선택하고, 국가의 일부가 되어야만 국가 정책을 바꿀 수 있다라는 논리가 이 선택을 뒷받침할텐데요. 이런 다른 진로들과 비교했을 때의 김윤영 활동가가 반빈곤 운동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 묻고 싶어요.
윤영 : 제가 운동을 선택한 이유는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에요. 지금 노인 빈곤률이 43%인데, 그럼 우리는 노인이 됐을 때 절반의 확률로 가난에 빠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거에요. 대개는 그 확률에서 탈출하기 위해 건물도 사고 하려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더라도 결국 43퍼센트는 가난해진다면, 그 43퍼센트가 가난해지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쪽이 합리적이지 않나 생각한 거죠.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게 내가 잘 살기 위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살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겠구나 싶어서 저는 세상을 바꾸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 군대갔다 온 선배가 자기는 더 이상 활동 안 한다고 선언하고 도서관으로 갔어요.“선배 왜 도서관 가요? 과방도 안 오고.” 중도(중앙도서관) 앞에서 만나 물어봤더니 그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너는 세상을 바꾸는 전선이 지금 거리에 있다고 아직도 생각하지만, 나한테는 중도야. 내가 지금 학점이 안 좋긴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대기업에 들어가면 나는 상위 10% 소득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 밑으로 그럼 내려올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잖아. 그러면 ‘거리에 나가서 세상을 바꾸자’고 얘기하는 것보다 중도 가서 공부하는 게 나한테는 개인적으로 훨씬 맞는 선택인 것 같아”라고 얘기했어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죠. “그래,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그냥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근데 저는 “그렇게 하면 물론 나의 안전이 보장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나중은 또 모르는 거잖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은 결국에는 또 누군가는 가난해지는 사회는 그냥 놔두고 사는 건데 찝찝해서 어떻게 살아요. 모두가 덜 위험한 사회로 함께 가는게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나왔죠.
공무원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활동가를 한 이유는요. 저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바뀌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중요한 변화들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하고 그 편에 서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에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긴 해요. 심지어 ‘사회혁신’이니 그런 말들을 기업들도 많이 하죠. ‘그런 것과 운동은 어떻게 다른 걸까?’라는 생각을 계속해요. 그냥 “아니야 아니야. 그거는 운동이 아니야”라고 얘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저들은 우리를 배신했기 때문에’, 혹은 ‘저 사람들은 계급적으로 어떠하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아무도 설득할 수 없는 말이니까요. 대답을 좀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동은 무엇이 다른가?’ 일단 우리는 당사자들과 상담을 하는 거에 있어서 도 복지 기관과는 달리 권리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하니까 당사자분들도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반빈곤운동과 전문가주의
플씨 : 사회운동의 전문가주의에 대해 ‘반빈곤 문제 전문가’로서 어떤 의견이 있으신지 묻고 싶어요. 활동하다 보면 이 문제에 대해 공부만 한 분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활동이 정책자문 식으로 흐르기도 해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윤영 : 전문가들이 우리를 부를 때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기보다 그런 목소리를 한 번 걸러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운동의 효과와 반대로 가는 것 같은 거죠. 소수의 전문가들만 남아서 어떤 입장을 대변하는 방식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문제를 A부터 Z까지 다 파악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뿅’하고 나타나 운동하는 방식은 지양해야죠. 모든 사람들에게 인권이 확장되는 게 중요한데, 소수의 인권 문제 전문가만 양산하는 게 운동의 결과가 되면 안 되잖아요. 반빈곤운동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빈곤사회연대의 성과는… 단체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
플씨 : 이전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빈곤사회연대의 훌륭한 성과 중 하나로 “단체가 남아있다”라고 꼽은 것을 봤는데요. 지금껏 단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요?
윤영 : 빈곤사회연대를 필요로 하는 일들 때문이었겠죠?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저희가 5년 동안 광화문에서 농성을 했었어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와 장애 등급제 폐지를 걸고 장애인 단체들하고 같이 농성을 했었는데, 그런 경험이 “빈곤사회연대가 계속 해야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구나”라는 걸 확인하는 일들이었어요. “기초생활 수급자들의 수급비가 높아져야 된다”라든지, “최저생계비 인상하자”, “부양의무자기준 폐지하자” 와 같은 주장은 항상 있었어요. 하지만 어디에선가 빈곤층의 죽음이 발생하면 또 “사각지대에서 이런 일이 다 발생했다”하면서 그제서야 사람들이 관심을 잠깐 기울였다가 사라지는 일이 되기가 일쑤죠. 그런데 광화문 한복판에 중증장애인들과 홈리스들이 모여가지고 농성상을 차려버리니까 이 사람들이 계속 보이는 존재가 됐잖아요. 그러면서 반빈곤운동이 하고 있는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실제로 대선 후보들의 공약으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다 채택되기도 했었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주장이 이렇게 실체가 될 수 있구나” 라고 믿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농성장을 차려놓고 있으니까, 그 농성장에 찾아와서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시민들도 있었어요. “이런 농성장이 있다고 들어서 와봤다. 나도 지금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수급자가 못 되고 있는데 그게 너무 한스럽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언젠간 바뀌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와봤다” 라는 얘기를 해주신 분이 계셨거든요. 이런 문제를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면 나만의 문제가 되는데 누가 함께 얘기하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잖아요. 그런 일들을 계속 해 나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플씨 : 솔직히 이 질문을 준비했을 때에는 “조직적으로 무엇을 했다”와 같은 답변을 기대했는데, 훨씬 더 좋은 대답을 해 주신 것 같아요. 이어서 준비한 질문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였는데 대답을 듣고나니 결이 달라진 것 같네요.
윤영 : 아니에요. 비슷하죠. 모든 단체는 해소하는 게 목표 아닌가요? 빈곤사회연대는 빈곤이 철폐되면 해소하는 게 목표인 단체니까 해소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지만요. 어쨌든 계속 남아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결국 계속 이 공간에서 활동을 할 사람들이에요. 상근 활동가만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빈곤 문제를 반빈곤이라는 관점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계속 발견하고 연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죠.
정치운동과 반빈곤운동의 관계
플씨 : 의회를 통해 관련 법률이 입법되도록 압박하는 운동 역시 빈곤을 해결하는 한 방법이 될 것 같은데, 그런 정치운동과 반빈곤 운동의 관계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윤영 : 정치 중요하죠. 그런데 물으신 것은 사실 정당 운동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사회운동이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운동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정치 중에 하나잖아요, 진보정당운동이 제 일이었던 적이 없었던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거칠게 얘기하면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회운동의 역할과 정당 운동의 역할이 다르고 <나는 사회운동 영역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에 좀 가까운 것 같아요. 사실 진보정당 운동에서 무언가를 같이 도모한 경험이 많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저기에 나의 친구가 있다> 그냥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주 구체적으로 <정당 운동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에 대해 고민할 계기가 많이 없었어요. 오히려 저는 여야의 거대 양당을 만나고, 그들에 대해 입장도 내고, 이야기를 많이 하죠. 기본적으로 정당정치는 빈곤층을 별로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국민의 영역에 그다지 포괄시키지 않는다는 느낌이 커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런 게 항상 고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