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지 못한 이름, 여성 홈리스
2019년 12월 13일
한 남성이 여성에게 물었다.
“요즘은 어디서 지내요?”
“…날씨가 좀 나아지려나, 추운건 가시질 않아”
“춥죠.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디가서 주무실 거에요?”
“…아이구. 그런건 묻지 마요. 그런걸 알려주는거는 내가 너무 무서워.”
질문을 피해보려던 여성은 첫번째 완곡한 거절이 실패하자 두번째엔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오늘 어디에서 잘 것인지 알려주 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이 대화의 대답을 한 사람은 여성 홈리스다.
예상할 수 있듯 거리는 여성들에게 더 험난하다. 거리생활이 험한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지만 거리 생활에도 요령은 있기 마련이다. 요일별 문을 여는 무료급식소, 계절별로 운영되는 잠자리, 마른 상자를 구할 수 있는 장소나 바람이 덜 불고 눈에 띄지 않는 잠자리 등.
역사가 문 닫기 전에는 의자에 기대어 두세시간 눈을 붙이고, 역사가 문을 닫은 뒤에는 박스잠을 서너시간 잔 뒤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쪽잠을 자는 생활은 단지 ‘집이 없는’ 풍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24시간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스트레스, 계절이나 날씨의 영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진자리를 피할 수 없고, 젖은 양말 한 켤레를 널 곳 없는 연속되는 시간의 합, 그 결과가 남겨진 신체가 노숙이다. 때로는 노숙을 하지만 때로는 쪽방이나 여인숙, 찜질방과 피씨방을 전전하는 삶 전체를 일컬어 우리는 ‘홈리스’라 부른다.
여성노숙인의 비가시화 : 이중의 구별짓기
“무료급식소에 70명 정도 남자들이 있고, 여자는 나 혼자야. 내 앞에 남자가 대놓고 꼴린다고 해요. 안 되겠다, 밥 먹으러 안 가겠다 하고 안 갔죠. … 여자 혼자서 노숙한다는게 힘들잖아요. 잘데도 없고 그래서 화장실에서 잤거든요. 남자들이 위협할까봐 무서워서 도망만 다니고 혼자 다니거나 아니면 롯데리아에서 여자분 있으면 뒤쪽에 앉아 있거나 그렇게 생활했어요”
– 2018년 홈리스추모제기획단 여성팀의 여성홈리스 구술인터뷰 중
여성노숙인은 노숙인,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중의 구별짓기에 처한다. 안정적인 자리에서 잠을 청하기 어려워 밤새 도심을 배회하다가 지하철을 타고 낮에 쪽잠을 자거나, 목욕탕이나 기도원에서 무상의 노동을 제공하고 잘 곳을 확보하는 여성노숙인들의 생존 방식은 이들을 비가시화한다. 여성노숙인의 비가시화는 여성이 처한 고유의 위협(성폭력 등)과 더불어 여성노숙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상호작용 결과다.
“여성 노숙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정처 없이 떠도는 부랑 여성이 남성 노숙자 사이에 끼어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아이엠에프 노숙자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일 뿐입니다.”
– 서울시 노숙 대책 담당 직원 인터뷰 (1999년-2000년 모니터링팀, <복지의 배신> 송제숙에서 재인용)
아이엠에프 직후 미혼여성은 부양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기혼여성은 부양해줄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우선 해고 당했다. 사라진 일자리의 많은 수가 여성이었음에도 여성노숙인은 존재조차 부정당했다. 남성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보호 받을만한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으로 차별적으로 이뤄졌다면, 여성노숙인은 존재자체가 이성애적 가족규범에서 부적절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가시화는 실제 정책의 부재로, 정책의 부재는 다시 여성 노숙인들이 모이거나 정보를 나눌 공간조차 없는 현실로 나쁘게 순환한다. 2016년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노숙인이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로 “잘 몰라서”(32.7%)를 꼽았다. 여성 노숙인이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정보나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숙을 해야하는 여성들의 대응은 각자의 몫이 된다.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바짝 깍고 모자를 눌러쓰거나, 지저분한 행색으로 주변에 오지 못하게 방어하거나, ‘노숙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의 규칙성을 줄이기도 한다. 같은 장소에서 잠을 청하고 일정한 패턴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조금 더 편안한 일이지만, 여성홈리스에게는 타인의 시선에 자신의 동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위험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쓰다보면 거지할머니 된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는 ‘화장품을 살 바에는 화장품 회사의 주식을 사라’, ‘꾸밈비용에 돈을 쓸 바에는 미래에 투자하라’는 조언이 많았다. 여성에게 꾸밈을 강요하는 세상에 저항하고 더 나은 선택지를 늘려가자는 취지에 공감하였지만 이 와중에 본 ‘그렇게 쓰다보면 거지할머니 된다’는 글은 마음을 스산케 했다. 거리의 여성노숙인들이 ‘꾸밈 비용’을 많이 써서 홈리스가 되었을까. 더 나은 선택을 하자는 구호에 ‘거지 할머니’를 동원할 필요가 꼭 있을까? 홈리스여성은 여성연대의 대상이 아닌가?
가난은 게으르거나 잘못된 선택을 한 ‘실패’의 결과물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낮은 임금으로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공정하지 않은 가족위계 속에서 자신을 오랫동안 착취한 결과로, 배우자의 폭행이나 부채를 떠안다가 거리로 나서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는 여성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착취받는가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본이기도 하다. 설사 실패했다 할 손, 어떤 존재도 실패로 취급될 수는 없다.
“얼마 전에는 어떤 남자가 날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다. 내가 동서남북에 짐을 두고 다니니 그 짐을 보고 나보다 먼저 그 곳에 가서 날 기다린다. 자기 주먹 안에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나한테 말을 건다. 나는 너무 불편한데 자기는 아무 불편도 못 느낀다. 난 잘못한 것도 없이 도망을 다닌다.”
– 2019년 1017빈곤철폐의날문화제 <살아왔습니다>
여성홈리스는 이러한 스토킹 범죄로부터 피할 문 한짝도 없다. 이를 ‘로맨스’로 보는 주변인들은 스토킹에 가담하고 공모하기도 한다. 공권력에 고발하는 일은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경찰은 홈리스 편이 되어준 바가 없으므로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우리 사회 용감한 여성들의 성폭력, 성차별에 대한 고발과 승리가 가장 가난한 여성들에게까지 닿아야 한다. 여성차별과 억압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 야만적이며, 이 모든 것을 종식시키지 않고 페미니즘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 :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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