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소득불평등과 빈곤 감축을 위한 좋은 수단이 아닌 이유
2019년 10월 23일
이 글은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정치적 전통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지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또한 기본소득 도입의 주요 근거로 제기되는 일자리 부족, 빈곤 감축, 소득 재분배는 모두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힘 관계에 따라 변화해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노동의 약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기본소득으로 해 결할 수 있는가가 의문시 된다. 원인을 따지고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원래의 이유이다.”
기본소득으로 빈곤과 소득불평등을 줄일 수 있지만, 나바로에 따르면 더 좋은 방안들이 이미 존재한다. 기본소득은 전통적인 사회정책들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들고 그 효과도 매우 부족하다. 빈곤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점차 커지고 있는 자산 격차도 기본소득이 다룰 수 없다. 즉, 기본소득은 오늘날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는 최선의 정책이 아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한 단일한 해석은 없다.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양의 돈(보통 그 나라의 빈곤선과 비슷한 수준의)을 지급하는 국가(전국, 지역, 지방 모든 범위에서)의 공적인 프로그램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공적인 현금의 최초 지지자들은(정확한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 전통에 속하는 사상가들이었다. 그들은 사회민주당과 같이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치적 전통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치적 전통의] 사상가들은 연금, 실업보험, 가족지원과 같은 공적 소득 이전[부조]과 의료, 교육, 보육, 공공서비스, 재가보호, 사회서비스, 공공주택 등의 공공서비스의 확립을 지지했다. [반면에]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개인적 자유를 지지하고, 그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반대하는 원칙에 따라 개인들에게 돈을 주고, 시장의 힘 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도록 두자고 제안했다. (실 제로 최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성향이 연합한 핀란드 정부가 제안한 모든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소득은 이런 자유주의적 방향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보다 최근에는, 로봇과 같은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수의 급격한 감소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의 보편적 [소득] 이전이 필요하다고 주장된다. 단순히 충분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노동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노동 없는 미래’가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테제는 역사적으로 기술, 생산성, 일자리 간에 [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무시한다. 케인스주의 시대의 생산성의 엄청난 성장은 신규 일자리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케인스의 유명한 예측이 있다. 노동생산성의 증가 때문에 21세기 초에는 주당 노동일이 5일에서 2일로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5일이다. 일자리와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시간과 노동일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는 생산성과 기술혁신과 같은 경제적 변수가 아니라 노동의 힘과 같은 정치적 변수이기 때문이다. 같은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각 국가의 노동-자본 권력 관계에 따라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 게다가 인간의 욕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실업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남유럽이 명백한 사례이다. 그곳의 높은 실업률은 기술혁신이나 인간 욕구의 결여 때문에 발생한 것이 전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수권력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국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높은 실업이 발생했다. [따라서] 높은 실업은 노동의 엄청난 약화를 나타낸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빈곤 감축의 최선의 수단인가?
보편적 기본소득이 빈곤을 감축할 수 있는지는 이슈가 아니다. 일자리가 없고 빈곤한 어떤 사람이 보편적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빈곤을 감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빈곤을 감축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아니라, 어떤 방법이 더 낫거나 나쁜가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빈곤을 감축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매우 명백한 증거가 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빈곤을 줄인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사회민주당이 집권했지만 보편적 기본소득은 없었다. 이 나라들은 모두 노동연계 정책과 특수한 상황에서의 소득 이전, (모든 사람이 아니라 빈곤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보장 소득을 결합했다.
보장 소득의 주요 목적이 노동자의 생활임금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장 소득은 대개 보편적 기본소득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다. 그 경험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뿌리를 둔 대부분의 당들이 이런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좇았다. 이런 정책들이 강화된다면 보편적 기본소득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효과적으로 빈곤을 감축할 수 있다는 증거는 명백하다.
빈곤층에게 보장 소득을 제공하고 다른 수단들로 빈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데 훨씬 적은 돈이 드는데(GNP 비중으로 보면 약 70분의 1 수준),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써야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사람에게 돈을 주기 보다는, 빈민들에게 돈을 주고 또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가난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빈곤은 돈이 부족한 문제만이 아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최선의 소득 재분배 정책인가?
보편적 기본소득이 소득 불평등을 감축하는 최선의 수단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데에도 비슷한 상황이 대두한다. 물론 보편적 기본소득은 어떤 형태의 소득 불평등을 감축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사례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불평등을 감축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속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재정 정책과 재분배 정책, 노동시장 개입을 통해서 불평등을 낮춘 나라들이 있다.
이번에도 소득 불평등을 감축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정치적인 것이고 각 국가들의 노동-자본 관계의 상태에 기초한 것이다. 노동의 힘이 약한 나라에서 불평등이 크다. 이것이 바로 많은 국가들과 북대서양 양편(북미와 유럽)에서 소득 불평등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이유다. 노동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그 결과,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사실 불평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부(소득을 발생시키는 자산)의 집중이 매우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들이 동일한 양을 받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통한 불평등 개선은 매우 불충분하다.
불평등을 감축하려는 정당들은 보편적 기본소득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 재정정책, 재분배 정책, 노동시장 개입을 결합시켜서 전체 소득에서 자본 소득의 비중을 줄이고 노동 소득의 비중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의 진보 정당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노동력의 3분의 1(남유럽에서는 거의 절반)이 불안정 노동을 하고 노동시장이 황폐화되는 것, 빈곤과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는 주요 원인은 노동의 힘이 갈수록 약해지기 때문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프레카리아트’[불안정노동 계층]라고 불리는 [문제의] 해법(또는 부분적 해법)이라고 믿는 것은,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수단이 그 원인을 여전히 건드리지 않고 남기기 때문에 노동시장 황폐화의 직접적인 원인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건드리지 않고 남는 것’이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보편적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원래의 이유이다. 불안정 노동, 프레카리아트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와 노동시장에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 관계를 건드려야만 한다. 💥
필자 : 빈센트 나바로 (존스홉킨스대 교수)
번역 : 구준모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