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론의 함정과 국제주의의 재구성
2026년 3월 20일
이 글은 아미르 키안푸르(Amir Kianpour)와 모르테자 사만푸르(Morteza Samanpour)가 포르톨란(portolan)에 기고한 글 「Many Shades of Campism: An Internationalist Critique」를 번역한 것이다.
역주: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해방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하다 보면, 국가를 넘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질 서가 자기 자신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 체제에 고통받는 전 세계 사람들이 대응하고 싸워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희망이 언뜻 보이지만, 거대 세계 자본은 미사일과 폭탄, 국가 폭력과 사법 살인, 심지어 범죄 조직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이런 해방의 지평을 부수고자 한다. 당장 올해 새해 벽두부터 미국은 거의 10년간 경제 봉쇄를 통해 목을 졸라오던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폭탄을 날리며 마두로 대통령 내외를 납치했고, 60년간 조여오던 쿠바에 대한 경제 봉쇄를 강화해 석유 공급을 완전히 막고 있으며, 중동에서 자신의 완전한 패권 구축을 방해하는 이란과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거대 자본 권력의 파괴력 앞에서 국제적으로 좌파로 호명되는 이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는 바로 본문에서 비판하는 진영론(campism)이다. 악의 축 그 자체인 미국-이스라엘-서방에 맞서 이에 반대하는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무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진영론자들은 너무나도 강력해 보이는 거대 체제에 맞서서, 그나마 경제적, 군사적 권력을 지닌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등의 세력 확대와 미국과의 패권 대결에 희망을 건다. 본문에서는 이란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들은 같은 논리로 2019년 홍콩 범죄자 인도법안 반대 시위를 서방의 제국주의적 책동으로 폄하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진영론과 이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나타난 도덕주의 혹은 민중주의다. 이 논리 속에서 정당하고 진정으로 해방적인 투쟁은 바로 ‘순수한’ 민중의 투쟁에 기반한다. 진영론자들이 보내는 反서구, 반제국 주의 국가들을 향한 지지에 대한 반감으로, 도덕주의자들은 이들 국가 내부의 시위, 봉기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이들 국가의 억압적, 반동적 성격을 규탄한다. 이들의 규탄은 종종 서방 언론 및 정보기관의 공작과 궤를 같이하기도 하며, 해당 국가 내부의 민중이 결코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국가 주권 수호와 반제국주의 투쟁 사이에 분명한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진영론과 도덕주의/민중주의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적과 아군”의 보편적 이분법을 통해 각 지역의 정치와 투쟁이 지니는 고유성을 무시하고 지정학적 체스의 일환이나, 민중 봉기의 카타르시스로 소비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대한 비판은 자칫하면 다른 한쪽을 지지한다는 흑백논리로 귀결되기 쉽다. 하지만 서방 패권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 속에서 끊임없이 전쟁과 폭력이 자행되는 오늘날, 세계 민중은 실존적 위협에 처해 있다. 실효성 있는 국제주의의 부재의 결과는 베네수엘라의 사례로 통렬하게 드러난다. 차베스 대통령 시절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 통합과 연대를 시도한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제재와 라틴아메리카 극우의 집권이라는 맥락 속에서 고립되었고, 미국의 경제 봉쇄로 터져 나오는 불만을 잠재우고 경제 재가동을 위해 억압적 조치와 BRICS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이를 빌미로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들과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은 베네수엘라의 비민주성을 규탄하며 연대를 철회했다. 정작 카라카스에 폭격이 이루어지고 마두로 대통령 내외가 납치될 때, 중국도, 러시아도 이들을 돕지 않았고, 도덕주의/민중주의자들은 마두로도, 트럼프도 반대한다는 논리를 내밀었다. 고립과 실질적 미사일의 위협 속에서 현재 베네수엘라 정부가 생존과 회복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 자세를 보이자, 진영론자들은 “배신자”, “하수인”이라며 등을 돌리고 있다.
본문은 이런 현실을 날카롭게 짚으면서 도덕주의/민중주의와 진영론 비판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며 국제주의를 재구축하고자 한다. 비록 본문의 논지와 결론에 역자도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국제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 독자 여러분의 고민과 생각을 촉발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해 소개한다.
작금의 자본주의는 전쟁의 분기점에 접어들고 있다. 글로벌 시장이 분절되면서, 지리적-경제적 열강 간의 대결 구도가 심화되고 있다. 이는 자주 전면적인 군사적 충돌로도 이어지고, 군사화의 논리는 전장을 넘어 정치적 통치 체계와 일상에까지 넘쳐흐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국제주의를 쇄신할 역사적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진다. 특히 지역 수준에서의 조건이 세계화된 여러 흐름에 의해 점점 더 좌우되고, 글로벌 전쟁 체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현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자행되는 제국주의 전쟁에 맞설 수 있는 국제주의 기획은 지역 고유의 시공간에 기반한 비보편적인 사회 운동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획이 다양한 형태의 진영론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중국이 되었든, 러시아가 되었든 이란이 이끄는 소위 “저항의 축”이 되었든 간에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세력과 동맹이라면 누구든지 그 세력 내부에 있는 지배와 제국주의적, 지역적 개입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지하는 입장과 경향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가자에서의 시온주의 학살, 서안 지구에서의 정착 식민주의 확장, 레 바논과 예멘에 대한 반복적 폭격에서부터 시리아 일부 합병, 이란과의 12일 전쟁 등 전면전이 한창 진행 중인 현재 상황에서 진영론에 대한 비판은 “비생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정확히, 지금 이 유혈이 낭자한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우리는 지금 진영론을 비판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통합된 정치 세력으로서의 반제국주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진영론은 특정한 지역적, 국가적 시공간에 뿌리를 둔 다양한 해방 운동에 대해서만 분열과 폐해를 조장하지 않는다. 진영론은 이를 넘어 이들 투쟁이 서로 결합하고 함께하여 국제주의라는 형태로 나아가는 것을 저해한다. 진영론은 현재 전쟁 국면의 객관적 모순이 낳는 국제주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재구축할 실질적 가능성을 좌초시킨다. 더 나아가, 진영론은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제국의 지역적 변형과 같은 역사적 서구 너머의 다양한 제국주의들 앞에 눈을 감는다. 수단을 찢어발기는 UAE(United Arab Emirates)와 같은 행위자들은 단순히 서구의 종속국이 아니라 국경선을 넘나드는 초국적 축적 회로를 통제하고 재구성하려는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있는 행동 주체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진영론만 국제주의의 길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영론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새로운 국제주의 정치의 주요한 장애물 중 하나로써 공적으로 호명하고 토론해야 한다.
진영론은 국제주의의 막다른 길이다.
바보들의 진영론
진영론은 이데올로 기와 민족주의부터 전략과 탈식민까지 다양한 지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바보 같은 논리는 진영론의 다양한 층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진영론은 [반서구] 세력의 반서구적 입장을 찬미하면서 그들의 억압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에는 눈을 감고 지정학을 내부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한다.
“바보들의 진영론”의 계보는 냉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와 1968년 프라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 전차의 배치를 옹호했던 “탱키(tankie)” 공산주의자(편집자 주 - 소련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를 이르는 말)들의 발흥까지 닿는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탱키”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알렉산드르 두긴(Aлександр Дугин)과 같은 이들이 이론화한 노골적인 “유라시아-식민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나토(NATO)의 동진(東進)에 대한 부정적 반향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세계 시장을 재구축하려는 비서구 세력의 능동적인 지정학적 야망을 그저 서구 제국주의의 수동적 “피해자”로 환원하는 이 논리는 시리아 혁명에 대한 수많은 해석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이란, 헤즈볼라, 러시아는 독재자 아사드가 권력을 유지하게 하고 시리아 민중의 민중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해 약 50만의 사망자와 1,200만의 피난민을 만들어냈다. 이들 세력의 반동적, 제국주의적, 개입주의적 성격을 강조했던 시리아인과 활동가 및 지식인들의 비판적 목소리는 진영론 조류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바보들의 진영론”이라는 문구를 프레드 할리데이(Fred Halliday)가 1979-81년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태를 “바보들의 반제국주의”라고 표현한 데에서 따왔다. “바보들의 반제국주의”는 신흥 호메이니 세력에 의해 당시 인질 사태가 권력 공고화를 목적으로 좌파를 탄압하고, 노동자 민중 평의회를 해체하고, 여성에게 강제로 히잡을 씌우는 등 반동적, 가부장제적 조치를 부과하는 데 전유되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미국에 가해지는 피해면 그 어떤 것이든 찬미하는 반제국주의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1979년 3월 8일 히잡 의무 착용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페미니스트 활동가 잘레 아흐마디는 이후 “대악마 미국의 입을 내려치려 쥐어졌던 호메이니의 주먹은 그 대신 이란 여성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고 썼다.
반제국주의 투쟁을 다른 사회적 투쟁과 분리함으로써, 이 부류의 진영론은 반제국주의를 추상화한다. 이런 추상화의 논리적 귀결은 “반서구”로 불리는 국가 내부의 좌파 반대파와 사회 투쟁들, 예를 들어 이란의 ‘진 지얀 아자디(여성, 생명, 자유, 페르시아어:زن، زندگی، آزادی, 잔, 전더기, 아자디)’와 같은 운동들이 단순한 시온주의와 제국주의 열강의 창작품이자 음모로 격하되는 것이다. 진 지얀 아자디 봉기의 페미니스트들이 감옥에서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 저항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라며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말이다.
사회 투쟁을 저해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반제국주의라는 가면 아래에서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습관을 키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서 역사가 내린 “공짜 선물”, 즉 식민 지배의 과거, 집단 트라우마, 반식민 투쟁 등은 현재의 억압적 장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전유된다. 이는 이스라엘이 기나긴 반유대주의의 역사와 유럽에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집단학살을 이용하는 방식과 비슷한 울림을 지닌다. 탈식민 국가들이 자신의 범죄를 “반제 워싱”으로 정당화한다면,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저지르는 집단학살에 퀴어 무지개 깃발의 색을(핑크워싱) 입히고 이란에 대한 공격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하에 소위 영웅적인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수행하는 “해방”으로 포장한다.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적 작동 기제 간의 변증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거대한 비대칭적 관계를 대칭적으로 만들거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두 가지가 해방의 지평에 맞서 서로를 반영하고 강화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비상 상황 하에서의 전략적 진영론
바보들의 진영론이 지정학을 내부 사회적 관계로부터 추상화시킨다면, “전략적 진영론”은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의 반동적 성격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전쟁 비상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 세력에 대한 조건적 지지를 표명한다.
전략적 진영론은 레바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2019년 ‘켈론 야니 켈론(모두 다라고 하면 모두 다라는 뜻이다)’ 봉기에서 헤즈볼라는 시위대 진압에서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며 반혁명의 최전선 집행인으로 행동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이 심화되며 익숙한 논조가 새로운 동력을 갖고 다시 돌아왔다.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매우 종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이스라엘에 대항할 유효한 억제제로서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논리는 이데올로기적 친연성이라기보다는 이른바 보다 높은 전략적 필요성이다. “우린 지금 헤즈볼라가 필요하다.” 다른 모든 투쟁은 비상 상황을 이유로 기다려야만 하고, 헤즈볼라를 “차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패러다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79년 이란 혁명의 초기 몇 년에서 드러난다. 이란 내부의 두 상반되는 좌파 전략이 미 제국주의의 현실적 위협을 마주했을 때였다. 한쪽에는 친소파 투데당이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길을 따르는 굳건한 전사들“과 함께 “인민연합전선”을 주창하고 나섰다. 여성, 좌파, 소수민족 투쟁은 국가 통합을 위험에 빠뜨리는 “제국주의 음모” 분열 책동으로 호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민주전선(NDF)은 혁명의 민주적 성격을 심화하고, 민중의 근본적 권리를 수호함으로써만 반제국주의적 지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슬람 공화국이 반제국주의의 깃발 아래 NDF와 여타 좌파 및 소수민족 운동을 짓밟았을 때, 투데당은 침묵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 억압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 억압 기계가 결국 투데당 자신의 지도부에게 향하기 전까지 말이 다.
삶이 가면 갈수록 단순한 생존으로 수렴하고 AI 기반 집단학살을 통한 절멸로 위협받는 오늘날, 사람들은 그저 살아남기만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초국가적 네트워크 피플스 원트(Peoples Want)의 국제주의 선언이 강조하듯이,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와중에 “수동적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혹은 유사한 범주에서 쿠르디스탄이나 우크라이나의 무장 저항 등은 민족 해방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적 생존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나 다른 국가의 일시적 자금 및 물자 지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실제 투쟁의 실질적 모순을 회피하는 교조적인(puritanian) 도덕적 시각에서 진영론을 비판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이 사회적 투쟁이 자신의 생존을 전술적(tactically) 차원을 넘어 전략적(strategically) 차원에서 반동적 세력의 손에 넘겨주게 만들 때 이들 세력에 대한 의존성이 유일한 정치적 기획으로 변한다면, 이 강제된 의존의 위험은 해방 그 자체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진정한 국제주의적 지원의 부재 속에서, 투쟁은 일시적 전술적 의존으로 시작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것이 강화되어 자신의 정치의 전략적, 필수적 요소가 되어버리는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투쟁의 실제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현재 이 비상 상황, 즉 이스라엘의 위협이 반동적 세력에 의해 예외적 초법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승인하고, 일상화하는 데 활용되는 것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로 한다. 비상 상황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하는 것을 넘어, 여기 서의 핵심적 질문은 그 비상 상황을 누가 선언하고, 그것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낳으며 이에 대한 대응이 견고한 전선을 형성해 낼 수 있느냐에 있다. 아사드는 시리아 혁명을 짓밟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과 “서구의 음모”를 소환했다. 12일 전쟁 기간에는 일부 좌파가 전시 비상 상황이라는 압력 속에서 일명 “더 큰 악”을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란 정부는 그 비상 상황을 “이스라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전례 없던 대규모의 아프간 이민자 추방을 수행하는 데 이용했다. UN에 따르면, 이스라엘 공격 이후 16일 동안 50만 명 이상의 아프간인이 이란에서 추방되었다.
국가주의 진영론에서 탈식민 진영론까지
오늘날 진영론의 지배적인 형태들은 잔존하는 냉전 시기의 형상보다는 남-남(South-South) 연대 자체의 내부적 모순에서 더 많이 도출된다. 이들 진영론은 탈식민 민족주의의 복잡성과 떠오르는 지정학적 연횡 구성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현재 전시 체제 정권의 급부상과 평행선을 그리며 국가주의 진영론이 인기를 얻고 있다. 국가주의 진영론은 민족-국가의 형태, 즉 영토의 온전성, 주권의 중앙집권화, 국가 안보, 국제 질서에서의 위상 차지 등을 민주적 대표성, 사회적 권리, 집단적 자기결정으로 이해되는 국가성의 주체적 성격보다 체계적으로 우선하는 정치적 지향이다. 이 논리는 시리아 전쟁 시기부터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시리아 전쟁 시기 “우리는 테헤란[이란의 수도]에 서 싸울 필요가 없도록 시리아에서 싸운다.”는 공식으로 개입을 정당화했다. 이는 이란에서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 담론의 중심 이데올로기적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 틀 속에서 식민 지배 해방 이후 주권 국가의 권력은 폭력적인 동화와 무력화라는 내부를 향한 논리와 경쟁적 전쟁이 확장된 전장에서의 국가 간 전략적 연횡이라는 외부를 향한 논리 간의 관계를 중재하는 중추적 요소로 다시 태어난다. 이전에 반식민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 “국가/민족적 단결”은 “국가 안보”라는 교리로 탈바꿈하여 구분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영으로 표상되는 제국주의에 맞선 방어적 수축 태세 속에서 조직된 동질적이고 획일적인 시공간을 강요한다. 이 국가 시공간은 계급, 젠더, 인종, 생태 투쟁의 다양성을 부수어 항구적으로 보이는 국가 비상 상황의 단일한 시간성으로 수렴시켰다. 이로 인해 모든 것은 국가와 제국주의 간의 소위 “최우선 투쟁”에 종속되었고, 이 투쟁은 다른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위협받는 “국가 안보”라는 지속적인 상황을 통해 일상적으로 정당화된다.
식민 지배 이후 국가 형성의 외재적 축과 함께, 식민 지배 직후 시기에 형성된 전략적 남-남 연맹은 국가주의적 진영론의 합리성을 더욱 공고화했다. 1955년 반둥 회의는 이 남-남 연맹의 논리가 일반화된 상징적 시점으로 나타난다. 억압받는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급진적이고 투쟁적 언어는 신생 독립국 간의 경제적, 문화적 협력의 어휘로 재편성되었다. 반제국주의 전투적 투쟁에서 식민 지배 이후 국가 통치로의 이 전환은 오늘날 다극적인 질서를 객관적-비판적 범주에서 원칙적 범주로 변환하는 기반을 놓았다. 혁명 세력을 국가 간 체제의 경쟁 논리로, 궁극적으로는 다극 간 대립 구도로 흡수함으로써, 이 전환은 해방의 기획을 지정학적 관리의 틀로 변신시켰다.
소위 “반둥 정신”은 반식민 투쟁의 진전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영감의 원천적 힘이 되었고, 냉전기에 냉전 논리를 반대하는 효과를 불러왔지만, 최근 들어 점점 더 다극 질서를 진영론적으로 찬양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연료로 재사용되고 있다. 이 다극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 질서에 대한 본질적으로 긍정적이고 자명하게 해방적인 대안으로 취급된다. 이런 관점에서 진영론자들은 다극 질서를 “힘의 균형”과 남방 세계/글로벌 사우스 국가의 “진전된 자율성”으로 찬양한다. 다극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개념은 이와 대조적으로 다극 질서를 해결책이 아닌 헤게모니의 심화되는 위기로 호명한다. 헤게모니 위기는 항구적 위기, 고조되는 군사화, 분열된 국가 주권 권력, 만연한 전쟁 지대로 특징지어진다. 비제이 프라샤드(Vijay Prashad) 등의 작가들은 반둥의 유산에 무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또한 진영론자들은 국제주의를 비서방 국가 주권 권력 간의 협력 플랫폼으로 축소시킨다. 이런 행태는 중국의 제국주의적 기획인 ‘일대일로(一带一路)’를 다음과 같이 포장하는 오늘날 진영론 담론을 가능케 한다. “[일대일로는] 글로벌 사우스에서의 새로운 자신감, ‘새 분위기’의 시작이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이 더 이상 금융과 기술을 위해 글로벌 노스의 기관들에 그토록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국가주의적 혹은 다극적-규범주의적 진영론(multipolar-normativist)은 우리가 탈식민 진영론이라 부르는 또 다른 진영론의 현재적 형태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탈식민 진영론은 제국주의를 문화적인 범주로 재정의한다. 이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역사적 유물론적 기반, 즉 일반 민중의 실질적 생활 조건에서 분리한다. 세계 시장에 대한 구조적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부 식민 지배 이후 주권 국가들은 자신들이 가진 서구적 근대화의 물질적 기원, 예를 들어 완전히 베낀 군사 조직, 관료적 기관들, 개발주의 계획 모델 등을 문화적 진실성, 문명적 예외주의, 종교적 고유성에 대한 호소를 통해 차별화된 문화적, 영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상쇄하고자 했다.
탈식민 진영론은 “제국주의”의 의미를 부풀려 변화무쌍한 귀신과도 같은 위협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위협은 소위 후진성과 개발의 실현태에서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다. [제국주의]는 문맹률과 마약 중독뿐만 아니라 대학 교육에서, 가리지 않은 여성의 머리뿐만 아니라 넥타이를 매는 것에서 나타난다. (편집자 주 -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남성이 정장을 입을 때 넥타이를 매는 것은 서양적인 것이라며 넥타이 착용을 지양하게 했다) 이는 이슬람 혁명 이후 1980년대 이란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오늘날 이와 같은 탈식민 진영론의 틀 하에서, “진 지얀 아자디” 운동의 이란 여성의 봉기는 직접적으로 서구 자유주의의 산물로 식별되고, 자연스럽게 제국주의의 표출로 식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