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우에 맞서는 탁월한 전략, 차별금지법 | 월례포럼
2026년 2월 27일
플랫폼C의 새해 첫 월례포럼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에 대해 다루었다. 트랜스젠더 퀴어로서 차별금지법에 ‘진심’이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에서 활동했던 사람으로서 큰 기대를 안고 참가했다.
나에게 차별금지법은 다양성을 품고 수평적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이다. 무엇보다 차별은 단순한 1:1의 구도나 하나의 기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여러 기준이 복합적으로 작동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불행하게 만드는지 드러내는 법이라 생각한다. 차별 금지 사유인 성별, 성적 지향, 인종, 국적과 지역, 고용(노동)형태, 학력, 신분, 장애 여부 등은 사회가 얼마나 촘촘하게 위계서열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에게만 한정된 법이 아님에도, 극우 보수 개신교 세력과 반대자들은 성소수자 혐오 여론을 앞세워 논점을 흐리고 왜곡된 정보를 재생산한다.
사실 극우 보수세력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차별인지, 차별이 왜 문제인지, 차별받는 당사자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을 동료 시민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학력과 직업은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범주임에도, 그러한 불평등은 종종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깨뜨리는 출발점이라고 믿어왔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왔다. 포럼에 참여한 사람들은 차별금지법 자체가 궁금해서 온 것인지, 나처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한지, 지금 이 시점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윤석열 퇴진 광장 이후의 사람들에게 차별금지법은 어떤 의미일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 장예정 집행위원장과, 그리고 <저주토끼>의 저자이자 차별금지법 제정 투쟁에 꾸준히 함께해온 정보라 작가가 각각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역사와 극우를 제재하는 장치로서의 차별금지법을 발표했다. 차별금지법은 1997년부터 논의가 시작된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장 집행위원장의 발표는 2017년 차제연 재출범 이후의 흐름에 초점을 맞췄다. 집회, 수다회, 전국 버스 순례, 오체투지 및 농성 등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으로는 차제연 담론 운동의 토론회나 발간물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노동 영역의 차별을 다룬『노동/일의 세계』,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쟁점을 짚은 연속 토론회 「평등을 토론하라」, 한국여성학회와 차제연이 공동 주최한 긴급 토론회 「차별금지법과 함께 전진하는 페미니즘」 등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자료가 많다.
정보라 작가의 발제는 무지개행동에서 발간한 극우리포트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극우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짚었다. 서구 극우 집단과 조금 다른 맥락이 있지만, 한국의 극우 역시 평등의 가치와 소수자의 권리를 부정하고, 불평등은 집단 간 우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여기며, 법치와 권위에 대한 맹신을 기반으로 한다. 특히 단편적인 정보 위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인터넷 미디어 환경은 혐오 발언을 비롯한 극우 담론의 확산과 인권 담론의 왜곡을 동시에 촉진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런 면에서 차별금지법이 극우적 담론의 전파와 재생산을 제어하는 장치라는 설명에 크게 공감했다. 성소수자 혐오와 인종차별주의를 확산하는 극우 담론의 예시로 할랄식품의 수입이 곧 근본주의적 종교 테러의 위험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언급하신 것도 인상 깊었다.

발제가 끝난 후 곰곰이 생각했다. 왜 ‘극우와 차별금지법’인가? 이런 담론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차별금지법과 극우세력을 연결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란 세력이 득세한 배경에는 불안정한 개인들의 냉소를 파고든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있었으며, 그 논리가 현실에서 구현된 결과가 바로 내란이었다. 또, “한국은 사실 항상 파시스트 사회였다”는 정보라 작가님의 말처럼, 우리는 극우적 사고를 파시즘적 체제에서 학습해왔다. 야만적인 군부와 극우 정치인들에 저항해 부분적인 정치적 민주화를 성취했지만, 경제적 민주화는 얻지 못했고 정치적 민주화조차 다시 위협받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평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을까? 차별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자신이 극우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극우화는 사회구조적 위험 부담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 공존 대신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경향’이라는 표현은 극우 개신교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는 학교나 채용 경쟁에서 겨우 이겼는데, 왜 저들은 노력 없이 특혜를 받는가”라거나, “다른 약자들은 모르겠고, 특정 집단만 ‘잘’ 살아야 한다” 등의 부정적 감정에서 나온 배제적 조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 말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차별과 불평등은 일자리와 생활의 불안정, 학교나 직장 등 일상 공간에서의 괴롭힘, 가정 내 폭력의 전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극우 세력은 이런 문제에 대해 “(너희들의) 불행은 특혜를 받으려는 여성, 중국인,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소수자 탓”으로 돌리며 구조적 문제를 축소하고 현실을 왜곡한다.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불안을 이용해 ‘나(우리) 집단만 잘 살면/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이기적 정서를 퍼뜨리고, 분노를 엉뚱한 곳에 투사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약자들끼리 서로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삶의 불안이 해소될까? 애초에 적을 완전히 잘못 설정했다. 극우화의 원칙을 따르면 평범한 사람들의 불안정은 더 심해지고 경쟁 꼭대기에 있는 자들의 독점만 계속된다. 반면 사회운동이 보는 불안의 원인은 특정 범주만 우대 받으며 부를 독점할 수 있는 불평등한 구조, 즉 성·인종·장애차별적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 있다. 그래서 사회운동의 해법은 극우세력처럼 하향평준화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자유를 신장함으로써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평등과 안전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고,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도록 만드는 공적 제도로서 차별금지법은 ‘극우를 막을 힘’이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의 실제 적용과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과 관련한 질문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법이 제정되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해외 차별금지법의 사례는 어떤지 등을 토론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참가자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성차별적 관행이 있는 직장에서 차별금지법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궁금해하는 분, 극우에 대한 설명으로 차별금지법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도 계셨다. 건강한 토론의 자리가 만들어져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바뀐 세상에 대해 좀 더 얘기하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흔한 오해인 표현의 자유 침해나 여성공간 ‘침범’이라는 논리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하는 질문도 나왔다. 사실 이런 편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나는 바깥의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꺼리는데,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들이 싫고 내가 여성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는 것도 부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바깥의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에 시달린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서 복잡한 심정으로 말을 덧붙일까 망설였지만, 발제자 두 사람이 성심성의껏 해주는 대답이 설득력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세계 인구의 1% 이내인 트랜스젠더들은 트랜스 혐오 정서로 인한 자살/폭력으로 많이 죽는다. 이런 낙인 속에서 트랜스젠더들이 공중화장실에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서 더 이상 이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보라 작가님의 말에 순간 울컥했다. 장 집행위원장의 공중목욕탕 등에 대한 문화적 관행이나 차이를 차별금지법이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인상적이었다.
나를 비롯한 트랜스젠더와 성소수자,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차별금지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혐오 세력과 사회적 차별에 있다. 평등한 사회에 대한 요구는 퇴진 광장 이후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 1순위에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2025년 8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입장은 45.8%로, 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31.4%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정부가 우리를 ‘민생’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더라도, 평등을 향한 요구는 광장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 넓게 손을 잡는다.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연대는 결코 소수의 목소리가 아니며, 그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 확장될 것이다.
글 : 김현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