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1년 |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원한다

비상계엄 1년 |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원한다

비상계엄 1년을 맞아, 76개 사회운동단체 및 진보정당들이 12.10 민중의 행진을 선포했다.

2025년 12월 5일

[읽을거리]사회운동계엄령, 광장의 목소리를 넓히는 사람들, 기자회견, 사회운동, 불평등

2025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1년을 맞아 광장의 목소리를 되새기고,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묻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세한 기자회견 내용은 👉사후 보도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1년을 맞은 12월 3일.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76개 사회운동 단위와 진보정당이 모였다. 지난 내란 사태로 맞닥뜨린 위기 국면에서 광장을 지킨 시민들은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12월 10일 열릴 ‘가자, 평등으로! 민중의 행진’의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광화문광장은 여전히 흔들리는 민주주의, 여전히 불안한 삶의 현장을 증언하는 발언들로 채워졌다.

윤석열을 퇴진시킨 후 우리는 ‘정권 교체’라는 정치적 사건을 경험했다. 하지만 광장이 바랐던 사회대전환이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은 단지 대통령 한 사람의 퇴장이 아니라, 불평등과 혐오, 성장주의에 기대 유지되던 낡은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향한 길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재명 정부의 국정 운영은 친자본 성장 정책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국민주권을 내세운 거버넌스는 관료·전문가 중심의 제한된 의사결정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그 결과는 분명할 것이다. 청년·여성·성소수자·이주민·장애인·노동자·농민의 불안정한 삶은 지속되고, 공공성은 후퇴하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은 ‘성장 기회’로 포장된 채 기업 중심의 방안으로 쏠리고 있다. 76개 단체가 공동으로 발표한 기자회견문은 이러한 현실을 겨냥해 “정부는 공공성 강화와 평등 증진을 외면한 채 자산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발언 중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 공동대표
발언 중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 공동대표

민주주의는 누구의 것인가

기자회견의 첫 발언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 공동대표가 열었다. 그는 “장애인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바깥에 놓여 있다”는 말로 현재의 민주주의 구조적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87년 체제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가져왔을지 몰라도 장애인의 이동권·자립생활·탈시설과 같은 일상적 민주주의는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는 지난해 계엄이 선포되던 바로 그 시각 전장연이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UN이 정한 '인권의 날'이 독재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고 말했다. 장애인의 존재가 ‘민주주의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현실은 단지 한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깊은 결함을 드러낸다.

민주주의가 전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구조로 재구성되지 않는다면, 내란의 토대였던 혐오와 배제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불평등이 만든 ‘일상의 계엄’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은 내란 1년을 “잊기 어려운 밤”으로 회상했다.

“극우가 만든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단호함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민중의 일상은 여전히 계엄과 다르지 않습니다.” —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은 의료급여 정률제 개악, 철거민·노점상에 대한 폭력적 대응, 지연되는 주거 대책, 장애인 이동권 투쟁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을 구체적 사례로 들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빈곤·차별·배제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놓는 정치 질서 전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요구와 맞닿아 있다.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

성장주의는 기후위기의 답이 아니다

기후정의동맹의 은혜 집행위원장은 기후위기의 현주소를 “이미 참혹한 일상이 된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기후위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 불평등이 더 악화된다는 의미입니다. 기후위기 대응은 공공성을 다시 짓고 자본을 통제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 은혜, 기후정의동맹

은혜 집행위원장은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2035년 감축 목표 ‘53~61%’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온실가스 감축을 ‘성장 기회의 확보’로 규정하는 정부 인식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비판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명분으로 블랙록 등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반도체 특별법을 통해 막대한 물·전기를 소비하는 산업을 더 확장하는 정책 방향은 결국 기후위기 해결이 아니라 기후 부정의의 심화를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삭제된 이들의 권리를

무지개행동 이호림 공동대표는 민주주의 위기와 성소수자 인권의 관계를 명확히 짚었다.

“민주주의는 일부 시민의 권리만 선택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으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내란 청산의 핵심은 가장 먼저 삭제된 이들의 권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 이호림, 무지개행동

이호림 대표는 차별금지법 제정, 동성혼 법제화, 트랜스젠더 권리 보장을 “정치적 부담”이 아닌 “민주주의 회복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혐오를 기반으로 성장한 극우 정치의 토대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내란을 막아낸 경험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성소수자 인권은 한국 민주주의의 ‘부록’이 아니라 중심부라는 주장이 광장에서 울렸다.

왼쪽부터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 은혜 기후정의동맹 집행위원장, 이호림 무지개행동 공동대표
왼쪽부터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 은혜 기후정의동맹 집행위원장, 이호림 무지개행동 공동대표

바뀌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비정규직이제그만 공동투쟁의 김선영 지회장은 가장 구체적이고 절박한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지만 시행령으로 취지를 무력화하고 있습니다. 정권만 바뀌었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김선영, 비정규직이제그만

김 지회장은 수년간 원청 교섭조차 불가능한 구조 속에서 노동3권이 무력화되고 있는 현실, 경찰 폭력과 검찰 기소가 반복되는 사례, 기업의 명예훼손 고소에 대해 무죄를 받아도 계속되는 항소를 이야기했다.

노동 현장은 정권의 교체를 넘어선 구조적 억압이 지속되는 공간이며,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명확히 드러났다.

12월 10일, “가자, 평등으로!”

세계인권선언일이기도 한 12월 10일, 시민들은 다시 보신각 앞에 모인다. 이번 행진은 작년 내란을 막아냈던 그 밤의 연대를 다시 이어가는 자리이자, 그때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회의 윤곽을 함께 그려나가는 첫걸음이다.

이날 참가 단위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극우가 번성했던 토양은 불평등과 혐오였다”며 내란 세력의 단죄와 동시에 구조적 전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다섯 가지 방향—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노동이 존엄한 나라, 기후정의 당연한 나라, 공공성 든든한 나라, 진보정치 빛나는 나라—를 공동의 실천 과제로 제시했다. 이 다섯 문장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지난 내란 1년을 통과한 한국사회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민주주의 조건이다.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행진 포스터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행진 포스터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원한다. 그리고 체제전환을 통해서만 더 많은 민주주의를 보장하고 평등 사회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비상계엄 1년, 우리는 여전히 위태로운 민주주의 위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길을 만들 힘 역시 시민들의 연대 속에서 다시 확인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더 나은 민주주의와 더 넓은 평등을 원한다면, 12월 10일 저녁 7시, 보신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욱 많아져야 한다. 그 길 위에서 다시 묻고, 다시 선언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원한다. 가자, 평등으로!”

글 : 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