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기상캐스터 정규직화는 “제2의 오요안나를 막는 길”

방송사 기상캐스터 정규직화는 “제2의 오요안나를 막는 길”

“우리 딸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장 내 괴롭힘 문제 역시 개인간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2025년 10월 20일

[읽을거리]노동노동조건, 방송,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 직장내 괴롭힘

10월 15일, MBC 1층 골든마우스 홀에서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관련 유가족과 MBC의 합의문 조인식이 있었다. 합의문에는 MBC 사장의 공식적인 사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명예 사원증 수여, 상설 추모 공간 마련, 정규직 기상기후전문가 제도 도입, 유가족에 대한 보상 등의 내용이 담겼다. MBC 안형준 사장은 “헤아리기 힘든 슬픔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오신 고인의 어머님을 비롯한 유족께 진심으로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오요안나 기상캐스터가 돌아가신지 1년이 넘어서야 사장의 공식적인 사과가 나온 것이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직장갑질119'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9월 8일부터 MBC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고 오요안나 캐스터의 어머니 장연미 님은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단식 27일, 농성 38일간의 투쟁 끝에 MBC는 프리랜서라 외면하던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사망에 대해 책임을 인정했다.

수많은 방송사가 대다수의 노동자에게 프리랜서 계약을 강요하며 노동법의 권리를 박탈하고 차별하고 있다. 5년을 일해도, 10년을 일해도 프로그램 개편한다며 하루아침에 내쳐지고, 제대로 된 휴가도 없으며, 퇴직금은 꿈도 못 꾼다. 오요안나 기상캐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수년간 괴롭힘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MBC는 프리랜서인 그녀에게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이번 투쟁을 통해 방송 미디어 현장 ‘무늬만 프리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했다. MBC가 시작이다. KBS, SBS 그리고 여러 방송 미디어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일하는 ‘프리랜서’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을 이어 나갈 것이다.

아래는 10월 15일 MBC와의 조인식에서 고 오요안나의 어머니 장연미님이 하신 발언 내용이다.

조인식에서 수여된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명예사원증
조인식에서 수여된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명예사원증

안녕하십니까? 저는 고 오요안나의 엄마 장연미입니다. 먼저 많은 분들의 응원과 염려, 도움 덕분에 단식 27일만에 끝날 것 같지 않았던 MBC와의 교섭이 합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 드립니다.
제가 저기 광장, 딸의 분향소에서 곡기를 끊고 27일간 단식 농성을 이어갔던 일이 벌써 꿈같고, 이제 합의문에 서명하기 위해 MBC에 와 있다는 것도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지난 몇 달간의 싸움을 생각하면 정말 많은 말들이 떠오르지만, 이 투쟁을 시작했을 때의 제 마음, 그리고 이제 농성을 마치고 회사와 조인식을 하는 지금의 마음, 이 두 가지를 전해드리는 것으로 제 발언을 대신하겠습니다.
우리 요안나가 정말 다니고 싶었던 방송국, 그것도 MBC에 입사해서 하루하루 정말 열심히 방송일을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던 날, 저는 삶의 이유를 잃어버렸습니다.
한동안 하늘이 무너지고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MBC에 대한 분노만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딸이 남긴 흔적들을 통해 그 아이가 어떤 이유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 안나처럼 고통받는 무늬만 프리랜서, 방송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여기 MBC 앞에서 안나의 영혼을 위해 천도제를 지내주고, 진심으로 추모의 마음을 모아주던 날, 저는 결론이 어떻게 되든 이 사람들과 좀더 싸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MBC의 자체 조사 결과,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이후 여전히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회사 앞에 단식 농성장을 차리겠다고 마음먹은 날이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단지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곡기를 끊었습니다.
이후 1인 시위 피켓과 현수막에 적힌 요구들, 기상캐스터 정규직화, 회사의 재발방지 대책 마련과 사과 등은 모두 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한 당연한 요구였다고 생각합니다.
분향소에 들러주신 시민들이 고인의 죽음과 연관된 기상캐스터 정규직화 요구에 의아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싸움을 하면서 우리 안나처럼 정말 힘들게 일하면서도 프리랜서 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고통받고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젊은이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딸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장 내 괴롭힘 문제 역시 개인간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상캐스터 정규직화 요구는 우리 딸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자 제2의 오요안나를 막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가 협상 과정에서 발표한 ‘기상기후전문가 제도 도입과 기상캐스터 프리랜서 폐지’ 안이 앞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꼭 지켜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새 제도 도입으로 기존 기상 캐스터들이 갑자기 일자리를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행히 이번 교섭을 통해 불이익을 막을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회사가 약속한 ‘재발 방지 대책과 제도 개선 약속’은 그 무게가 매우 무겁고 방송사 전체에 미칠 영향이 정말 큽니다. 우리 딸의 억울한 죽음 이후 힘든 투쟁을 거치면서 얻어낸 이 결론이 또다시 알멩이 없는 선언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MBC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오늘의 약속을 하나씩 이행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도 하늘에 있는 요안나와 함께 앞으로 MBC의 제도 개선 노력을 계속 지켜보려 합니다.
이 싸움을 거치면서 단식날짜가 늘어날수록 하루하루 너무 힘겹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제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저 혼자라면 절대 시작할 수도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평생 ‘노동’이라는 두 글자는 입에 올려본 적도 없는 제가 농성장 오는 분들에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동지’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습니다.
함께 해주시고 연대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와주신 모든 분들 앞으로도 방송 비정규직 문제 계속 관심 갖고 지켜봐주세요. 저도 얼른 건강 회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 진재연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