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지로서 국민연금을 상상하자
2025년 9월 18일
이 글에서 모든 직접 인용의 출처는 2025년 8월 플랫폼C 주최로 열린 <국민연금, 대국민 사기극인가? 노후 안전망인가?> 월례포럼의 강연 내용이다.
아버지가 평생직장으로 삼던 금융 회사에서 퇴직하기 몇 달 전부터,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심심찮게 노후와 자립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정확히는 생존을 위한 재테크, 재테크를 통한 생존을 말하는 자리라고 말해야겠다. 장년 세대의 부모에게는 재테크를 통한 노후 생존이, 청년 세대인 자식들에게는 재테크를 통한 경제적 자립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가 느릿느릿 모여 식탁에 앉으면 어머니가 차린 음식을 들며 우리들의 취직 준비 현황, 주식, 예·적금, 부동산, 퇴직금, 연금의 3단 구조와 같은 것들을 화두로 끌고 나왔다.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인 것 같은 내용을 귀로 흘리며 잠자코 끊임없이 젓가락으로 식탁 위를 가로지르고 나면 내 밥그릇은 금방 비었다. 나는 그릇을 비우면 부리나케 대화를 끊고 설거지 당번을 정한 후 부엌에서 퇴장했다. 대부분은 내가 자리를 비운 후에도 커다란 목소리들이 한창 오가 내 방으로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내게 저녁 식사가 빠르게 음식물을 씹고 삼키는 저작 운동과 젓가락을 민첩하게 놀리는 소근육 운동의 조합으로 축소된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되는 재테크와 생존의 분리 불가능성이 천박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 속에서, 주식 시장과 투자의 지식이 없는 나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아직 모르는 까막눈 막내로 취급받으며 잔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게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불로소득 자본주의에 올라타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신조를 끈끈하게 공유하는 아버지와 오빠 둘 사이에서 꽤 격렬한 논쟁이 오가는 일이 있었다. 국민연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퇴직이 예정된 시기 이후 연금을 수령받기까지 공백기가 길고 그 금액도 적다며, 제2의 길을 재테크와 재취업으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또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째 오빠가 대뜸 우리는 연금을 받지도 못한다면서 서로의 불행을 겨루기 시작했다. 이에 둘째 오빠도 가세했다. 아빠는 받기라도 하지, ‘청년 세대’는 받을지 못 받을지도 알 수 없어 국민연금이 우리만 손해 보는 제도라는 것이다.
이 논쟁이 오갔던 때는 마침 내가 한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장시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국민연금을 납부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얼마 전, 첫 납부를 알리는 서류와 함께 국민연금 제도에 대한 홍보물이 우편으로 날아온 터였다. 나는 빠르게 읽고 버렸던 홍보물의 글씨를 머릿속에 불러오려고 애쓰며 국민연금은 물가상승률까지 반영해서 지급을 보장한다고 어설픈 ‘팩트 체크’를 시도했지만, 두 오빠는 어디에선가 똑같은 ‘찌라시’를 받아서 읽기라도 한 듯 서로 너무나도 닮은 어휘와 표현들로 자신의 입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불로소득 자본주의 앞에서는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이던 그들이 이렇게 국민연금 앞에서 갈라지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그날도 밥그릇을 빠르게 비우고 먼저 일어섰다. 오빠들은 국민연금을 내 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내가 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이후 불편한 주제를 피해 가려는 듯, 식탁에서 국민연금이 다시 언급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는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날의 저녁 식사는 자신이 부양해야 할 부모가 노후를 지탱하기 위해 국가로부터 받을 연금에 대해 자식이 밥그릇 싸움을 건 자리였다. ‘당신이 받는 국민연금은 우리에게 손해다’라는 말이 뱉어지는 순간 아버지와 오빠들은 장 년과 청년으로 완전히 분리된 세대가 되었고, ‘부양받는 자’와 ‘부양하는 자’로 갈라졌다. 오빠들이 아버지에게 제로섬 게임의 구도를 적용한 것이 내게는 약간 충격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가족에게는 이렇지 않지 않나? 어쩌면 “가족을 폐지하라”(소피 루이스)고 굳게 믿던 나도 무의식적으로 가족주의적인 믿음을 품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날 내가 받은 충격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 것은 플랫폼C의 2025년 8월 <국민연금, 대국민 사기극인가? 노후 안전망인가?> 월례포럼에서였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정책위원이자 민주노총 정책국장 홍석환은 국민연금이 세대 내 연대를 강화하고 노후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공적 안전망이 될 수 있음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지난 3월 20일 국회에서 통과된 3차 연금 개혁안과 이에 대한 최근의 이슈를 파헤치고, 국민연금의 한계와 방향성을 논했다.
홍석환 정책위원의 빠르고 명확한 문장들을 듣다 보니, 나의 두 오빠가 사용한 단어와 표현의 출처는 이준석에게 있었음을 깨달았다. 개혁신당 이준석은 대선기간 동안 자신을 “청년 세대”를 위한 진짜 청년 정치인으로 자리 매김하여 표심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장년 대 청년’ 구도의 세대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가져온 소재가 국민연금이었다. 그는 국민연금이 신규 투자자를 속여 투자금을 갈취하는 구조인 “폰지사기”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고령화 사회 속에서 청년 세대가 낸 돈은 기성세대에게 지급하고 나면 원금이 고갈될 것이고, 청년층만 억울하게 장년층을 부양하고 자신들은 연금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이 발언 속에서 현행 국민연금은 원금조차 회수할 수 없는 불건전 투자상품이 되었다. 이어 이준석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는데, 바로 ‘자신이 낸 만큼은 확실하게 받는’ 제도로 국민연금을 변화시키겠다는 공약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 국민연금 제도의 ‘성공’은 사람들이 자신의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나중에 다시 꺼내 가는 금고 역할로 축소된다. 그 안에서 연금을 내는 시민들은 강제로 돈을 국가에 떼이는 ‘피해자’가 되거나, 그러니 적어도 손해를 보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투자자’가 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은행이 판매하는 금융 상품이 아니고,국민연금을 내는 사람들은 소비자도, 투자자도 아니다. 국민연금은 “세대 간 연대와 세대 내 연대”라는 원칙으로 운영되는 제도다. “국민연금법 제1조”에는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령, 장애 또는 사망에 대한 연금 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국민이 노년에 접어들어 정년퇴직 혹은 건강으로 인해 더 이상 노동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노후 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즉, 국민연금은 애당초 금융 상품이 아니라, 사회보험 제도로서 고안되었다. 국민연금의 “가입은 법적 의무”이고, “급여 수급은 법적 권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국민연금이 지니는 특수성이 생긴다. 국민연금은 첫째, 사기업의 보험 상품과 다르게, 가입 이후 중도 해지나 중간 인출이 불가하다. 둘째, 은행의 예·적금과 달리, 물가 상승률을 반영해 실질 가치를 보전한다. 셋째, 지급 기간의 한도가 없다. 죽는 날까지 평생 지급한다. 사망 시, 친족에게 유족 연금이 지급되며 끝난다. 넷째, 국민연금은 압류되지 않는다. 어떤 채무가 있어도, 연금은 자산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즉 노후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기에 매달 수급액 185만 원까지는 압류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마지막으로, 국민연금은 소득 재분배 기능을 수행하게끔 디자인되어 있다. 국민연금 지급액은 단순히 개인이 ‘낸 만큼’이 아니라, 국민연금에 가입한 전체 가입자들의 평균 소득과 납부액을 반영해 계산하는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 이 원칙은 납부액 차이가 컸던 저소득자와 고소득자 간의 지급액 차이는 좁히도록 설계돼 있다. 이를 통해 같은 세대 내 연대와 상호 부양이 가능해진다. 또, 국민연금을 통해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의 소득이 현재 연금을 받는 이들에게로 이전되며 세대 간 연대가 실현된다. 이는 거꾸로, 청년 개개인이 자신의 부모를 부양하기 위한 경제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은퇴한 부모가 국가로부터 매달 연금을 받고 있다면, 내가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금액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국민연금을 통해, 사적 부양은 사회적 부양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집합적 부양 체계”로서 위의 5가지 원칙 위에 세워진 국민연금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본디 대한민국에서 국민연금은 1973년에 ‘국민복지연금법’이 제정되어 당해 도입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커져 실현이 늦어졌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민연금은 ‘국민연금법’으로의 개정과 함께 비로소 1988년에 실행되었다. 역사가 채 40년도 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1963년에 태어나 25세의 나이인 1988년에 취업해 국민연금을 납부해온 개인이 있다면, 그는 2025년 현재 아마도 은퇴 후 급여 수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내년에서야 첫 수급을 받을 수 있다. 이렇듯 아직 납부에서 수급까지 모두 경험한 세대가 아직 충분히 등장하지 않았을 정도로 짧은 역사 속에서, 국민연금은 아직 그 결과를 내보이기도 전에 숨 가쁘게 여러 번 개정되었다.
보험료는 3%, 소득 대체율은 70%로 국민연금이 시작된 지 10년 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는 IMF를 이유로 1차 개혁을 실시한다. 이때 소득대체율은 70%에서 60%로 낮추었고, 수급 개시 연령은 60세에서 65세로 미루었다. 5년마다 1세씩 수급 연령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2025년 현재 개시 연령은 63세이며, 2028년에 64세, 2033년에 65세로 고정된다. 정년퇴직 나이와 연금 수급 나이의 틈이 더 벌어진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상황은 더 악화되어, 2007년에 소득대체율은 60%에서 40%로 매해 일정 %P씩 줄어들게끔 ‘개혁’되었다. 현재(2025년) 소득대체율은 41.5%다. 이 2차 개혁의 전후로 시행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국민연금 기금 고갈에 대한 위기론과 재정 안정성에 대한 의심이 불거져 나왔고, 이는 지난 문재인, 윤석열 정부와 이준석의 공약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까지도 신화처럼 지속되고 있다. 기금이 고갈되면 안 된다는 논리로 국민연금은 제대로 지급되기도 전부터 그 지급액이 깎여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유구한 신화는 국민연금의 의의에 대한 무시와 ‘기금 안전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개악의 동력일 뿐이다. 국민연금은 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끝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연금 제도를 한참 먼저 실시해 현재 기금이 고갈된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기금이 고갈됐음에도 다른 보조금과 방편을 사용해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국민연금 제도를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함이라고 포장된 보험료 9%, 소득대체율 40%의 수치는 거꾸로, 소득 보장이라는 국민연금의 목적을 실패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2012년 출범한 ‘국민연금바로세우기 국민행동’의 소득대체율 50% 상향 요구를 비롯한 연금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으나, 2025년 3차 개혁은 소득대체율 43% 상향(2026년부터 바로 적용)과 보험료 13% 점진 상향(8년간 매해 0.5%P씩)으로 그쳤다. (그밖에 출산 크레딧, 군 복무 크레딧 확대 등 부가적인 개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향세를 나름 반전시킨 3차 개혁도 여전히 암울해 보인다. 국민연금공단이 2023년 조사한 1인당 최소 노후 생활비는 약 136만 1천 원이다. 최소의 기준을 벗어난 적정 노후 생활비는 192만 원이다. 그러나, 국민연금공단이 2025년 2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수급자의 65%는 60만 원 미만을 받고 있다. 60~100만 원 이하를 받는 이들은 19%다. 수급자의 84% 이상이 국민연금만으로 최소 노후 생활비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들은 저축해둔 자본이나 기댈 친족이 없다면 꼼짝없이 생계를 위해 노년에도 노동을 지속해야 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아파트 수위와 같은 프레카리아트 노동이건, 제대로 노동으로 통계 되지도 않는 폐지 줍기건 간에 말이다. 이렇듯 40년 동안 빠르게 ‘개혁’되어 온 국민연금의 결과는 대한민국의 노인빈곤율이 40%인 현실과 연결된다.
사실 국민연금의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소득대체율과 수급 개시 연령이 단 한 번도 변경되지 않았다고 해도, 국민연금은 노년 세대의 빈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국민연금의 납부 기준이 언제나 ‘무엇이 인정되는 생산 노동인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공단이 2025년 2월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훨씬 더 적은 연금을 받는다. 그 이유는 여성에게 강제된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이 결코 생산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을 수급받는 노년 세대의 여성은 가정주부의 역할을 더 강하게 강요받았다. 이들은 직업을 갖고 있었음에도 결혼 및 출산과 동시에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직업을 이어가더라도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근무해 왔다. 그로 인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국민연금에 납부한 액수 자체가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시간이 흘러 지급 받는 액수의 차이에서 다시, 더 현저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또, 현재의 국민연금은 일정한 조건을 넘길 경우(비정규직도 정해진 고용기간, 근로시간, 소득액 등 기준을 충족시키면 가입 대상자가 된다), 노동자가 자동 가입하여 기업과 임금의 9%를 절반씩 내게 되어 있다. 고용주가 임금의 4.5%를, 노동자가 임금의 4.5%를 함께 납부하는 것이다. 이는 기업이 부담하는 납부액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도 문제지만, 전통적인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로 파악되지 않는 노동자들을 제도의 사각지대에 남겨둔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위에서 말한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 플랫폼 노동자, 예술가나 프리랜서와 같이 특수고용 형태에 놓인 이들은 국민연금에 자동 가입되지 않고, 지역 가입자로서 따로 가입할 경우 소득의 9%를 전부 홀로 부담해야 한다. 이들은 납부가 어려운 만큼, 추후 보장되는 지급액도 적어진다는 점에서 불리하다. 소득 재분배를 지향하는 국민연금 제도 안에서도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국민연금의 한계는 개인연금이나 퇴직연금으로도 메꿔지지 않는다. 개인연금은 수익률이 낮을뿐더러, 중도 해지율이 매우 높아 사실상 노후 대비를 보장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개인연금은 여유 자금이 있어야 가입하기에 노후 대비가 더욱 절실한 저소득계층일수록 넘볼 수 없다. 한편, 퇴직연금 은 가입률이 낮으며, (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대부분의 노동자가 부동산 구매를 위해 퇴직금 중간 정산을 받기에 마찬가지로 노후 대비에 실효성이 낮다. 결국 답은, 비단 개인의 노후 안위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상호 부양을 의의로 삼는 국민연금을 ‘제대로’ 개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혁의 방법은 다양해야 한다. 우선 국민연금의 기금은 가입자들의 임금에서뿐만 아니라 기업과 정부에게서도 다각적으로 더 많이 확보될 수 있다. 또,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않거나 못하는 이들이 국민연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고 노동의 범주를 확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소득 가입자들에게는 국가가 보험료를 지원하는 식으로 취약계층의 노후에서 국민연금이 실효성이 있게끔 만들 수 있다. 더 나아가, 국민연금 기금은 현재 수익을 내기 위해 그 99.9%가 금융 투자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는 현재 그 0.1%를 차지하고 있는 공적인 복지 영역으로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역 병원, 공공주택,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대상으로 하는 돌봄 시설을 설립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금융투자뿐만 아니라 사회 책임 투자를 활발히 한다면, 그 또한 국민연금이 공적인 사회보험 제도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국민연금이 서로 경쟁하듯 가져가는 파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유지(commons)로서 이해될 때, 이러한 변화를 민주적으로 밟을 수 있을 것이다.
50대의 장년 세대 부모와 20대의 청년 세대 자식들로 이루어진 우리 다섯 가족 중에서, 두 명은 국민연금이 대국민 사 기극이라고 믿고 있고, 다른 두 명은 노후 안전망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연금은 두 믿음을 모두 비껴 간다. 현 상태의 국민연금 제도는 물론 대국민 사기극은 아니지만, 충분한 노후 안전망도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세대 간 착취’라는 이준석의 시각도, ‘이자 붙여 돌려받는 투자 상품’이라는 자본주의적 인식도 반박하는 공유지로 출발했으며,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 점에서 이번 월례포럼을 듣고 난 후 내가 두 오빠의 발언에 충격 받았던 이유는 전통적인 가족주의가 아니라, 상호 부조와 연대에 대한 믿음이 공격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사회적인 보험 제도가 개인의 수익률로 이해되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준석을 필두로 한 국민연금에 대한 그러한 몰이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것은 상호부조와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개인뿐인 신자유주의의 세계관이 얼마나 우세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히 큰 위기다. 하지만 다음번 식사 자리에서 국민연금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면, 이제 나는 밥과 말을 삼켜 넘기고 퇴장하기를 택하는 대신 국민연금의 오해와 진실에 대한 긴 강의를 기꺼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 김선진 (돌곶이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