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의 ‘그쪽이야말로주의’ | 민진당, 윤석열 계엄령 지지 해프닝
2025년 6월 7일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대만 집권 여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이를 지지하는 듯한 게시물이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민진당의 소셜미디어 계정은 “한국 국회가 친북 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윤 대통령이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글을 게시했다. 이에 더 하여 해당 게시글은 대만 입법원도 야당인 국민당과 민중당이 국방 예산을 삭감하고 권한을 위법적으로 확대하며 국가 안보 관련 제안을 저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 게시물은 대만 내에서 큰 반발을 일으켰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대만의 야당들은 여당이 한국의 비상계엄을 지지하는 것이냐고 의문을 던졌다. 야당인 국민당은 민진당이 계엄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심하며, 라이칭더 총통의 사과를 요구했다.
논란이 커지자 민진당은 원문을 급히 삭제하고 진화에 나섰다. 덧붙여, 계엄령을 비판하는 성명을 게시했다.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해명과 함께, 해당 글을 작성한 홍보 담당자의 권한을 정지시켰다.
대만 정치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대만 내에서 계엄법 개정 논의로 이어졌다. 제1야당인 국민당은 ‘총통이 계엄을 선포할 경우, 입법원의 보고, 심사와 표결을 각각 8시간 이내, 24시간 이내에 거치도록’ 하는 계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세기 내내 계엄령에 의한 일당독재 통치의 주체였던 국민당이 그런 독재에 맞서 싸운 구 민주화운동 세력이 만든 민진당 정권에 대항해 계엄법 개정을 시도한 것이다. 죽은 독재자 장제스가 무덤에서 나와 이를 목격한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만 계엄통치와 민진당
대만의 계엄 통치는 1949년 장제스 국민당 정권이 발령했고 1987년까지 지속됐다. 1947년 228사건(二二八事件) 이후 국민당 정권은 토착 엘리트층과 시민들에 대한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수만 명이 희생시킨 바 있다. 한국에서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전두환 계엄을 낳았듯, 228사건은 계엄령으로 이어졌다.
장제스와 그의 아들 장징궈 총통이 집권한 정부는 ‘반공’을 표방하며 “불순분자를 뿌리 뽑는다”는 명분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다.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의심만으로도 수천 명이 체포·투옥·처형됐으며, 언론·출판·학문·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검열이 이뤄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발간조차 불가능했고, 신문과 방송은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공포 정치와 백색테러가 만연했고, 결사의 자유조차 금지돼, 민주노조나 야당은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민진당은 이처럼 장기화된 일당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운동가들이 만든 정당이다. 1986년 9월 창당 후 정당 결성 금지와 신문 창간 금지, 중국 본토로부터의 독립을 선동하는 등의 행위를 처벌하는 형법 제100조를 폐지했고, 전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38년간의 계엄령을 종식시켰다. 이런 역사가 낳은 상흔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양안(중국-대만) 갈등이 심화되고 국민당 세력이 과거의 과오에 대해 뼈저리게 사죄하지 않는 한, 대만의 사회 갈등 역시 극복되기 어렵다.

그런데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황당한 해석이 어떻게 민진당 공식계정에 게시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우선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 대만 사회에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수교 상태가 아님에도 한국과 대만의 민간 교류는 꽤 활발한 편이지만, 집권여당의 간부가 이를 매우 기이하게 곡해하고 있다는 점은 뭔가 잘못돼 있음을 드러낸다. 2019년 홍콩 항쟁 이후 한국의 극우 반공주의자들은 개별적으로 홍콩이나 대만 사회에 ‘한국 민주당은 친중이고, 국민의힘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식으로 선전해왔는데, 어느 정도는 이런 논리가 유포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민주당의 상업 외교
더불어민주당의 몇몇 국회의원들이 고답적인 친미-친중 구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시장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외교노선을 중심으로 한다. 가령 이번 대선을 통해 막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대표 시절이었던 지난 2024년 3월 22일 충남 당진의 전통시장 방문 중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왜 중국을 집적거려요. 그냥 (중국에) 셰셰,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어요?”
이에 대해 국민의힘의 당시 국민의힘의 선대위 공보관계자는 “(이재명이) 중국 사대주의 외교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세계 정세에 친미 혹은 친중만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에서 보면 민주당의 시장주의적인 태도는 ‘친중’으로 매도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안 문제에 대한 민주당의 입장은 ‘친중’이기보다는 ‘국익 외교’ 또는 ‘상업외교’ 논리에 가깝다. 한편 이 논란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한동훈은 “세계 질서 속에서의 어떤 역할과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냐”고 비판했는데, 이런 비판은 앞선 비판 논리보다는 덜 둔탁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안문제(중국-대만의 관계와 통일/독립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대한 국민의힘이나 한동훈의 입장이 ‘정의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수출 주도형 성장 모델에 기반한 재벌중심 체제에서는 이것이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된다.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약 63억 달러였던 무역규모는 2022년에는 약 3,000억 달러 돌파했고,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는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이었다. 재벌들은 이런 무역구조를 활용해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 노동집약적인 공장을 세웠고,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고부가가치 중간재를 수출함으로써 제조업 공급사슬망을 재편했다. 이를 통해 현대자동차·삼성전자·LG전자 등은 생산비를 절감하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진출했으며, 중국을 축으로 하는 아시아-미국-유럽 수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데 이와 같은 재벌 대기업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에 종속되면, 현지의 하청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되고, 노동권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값싼 노동력을 통해 재벌 일가나 주주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수출주도 성장의 과실은 주로 재벌들에 집중되며, 중소기업·비정규직·청년층은 대외무역의 혜택에서 배제된다. 이는 노동시장 유연화(= 비정규직 확산)와 맞닿아 있으며,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한·중 수교부터 미중 무역분쟁의 촉발까지 대중국 무역은 한국과 중국 자본가들의 부는 키웠지만, 중국에선 농민공과 같은 밑바닥 노동자계급을 착취했고, 한국에서는 양극화와 노동 빈곤을 심화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힘의 이재명 비판은 시장 논리에 대한 반공주의적 비판에 의거하는데,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시장을 축소시키는 방식의 국가 외교 노선을 선호할리는 없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운동 시기에 국내 재벌 자본가들이 김문수 후보보다는 이재명 후보를 만나는 것을 훨씬 선호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친중과 친미만 존재하는 세계?
친중 혹은 실용적 시장주의냐 친미 시장주의냐의 이원대립 구도에 사로잡힌 고답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전자와 후자의 구도를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쉽게 치환해버린다. 누군가 이들에게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인권 탄압이나 홍콩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중국 대륙 내 노동운동 진압 등을 비판하면 이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 조금도 수용하지 않고 “그러는 너희는?” 또는 “서구 선진국들의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로 심각해”라며 상대방의 위선을 지적하거나 이중 잣대를 폭로한다. 서구 선 진국들의 ‘민주주의 타령’이 역겹고 기만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중국 사회의 모순들을 감출 수 있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이반 프란체스키니(Ivan Franceschini)와 니콜라스 루베르(Nicholas Loubere)는 이처럼 서구 담론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시도를 ‘그쪽이야말로주의(whataboutism)’라 명명한 바 있다.
국제 정세에 대한 구좌파의 무능은 이러한 ‘그쪽이야말로주의’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20세기 현실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안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모순을 제대로 설명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중국이나 러시아 국가의 통치엘리트들이 드러내고 있는 반인권적이고 반민중적인 타락을 옹호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한국이나 대만 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대만의 경우에는 좌우파 버전의 ‘그쪽이야말로주의’가 있을 것이다. 가령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다수파가 ‘민진당’을 창당했다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이념을 근거로 활동하던 이들 중 일부는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87년 대만노동당을 창당했는데, 이들은 2000년대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통일 주장을 강화했다. 오늘날 대만 사회에서 노동당의 위상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중국공산당에 대한 그들의 전략적 수사나 담론적 태도는 ‘그쪽이야말로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중국공산당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나 인권 탄압, 노동자운동 탄압 등 문제들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이들은 중국에 대한 비판에 대해, “대만도 문제가 많다”, “서구는 더 위선적이다”이라고 대응한다. 오늘날의 중국을 사회주의 초급단계(社会主义初级阶段)에 위치해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개혁개방 이후 첨예하게 불거진 중국 사회 내 다양한 계급모순을 너무 손쉽게 간과한다. 사회운동 좌파의 입장에서 중국 사회는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혹은 관료적 자본주의(bureaucratic capitalism) 쪽으로 훨씬 깊게 연루되어 있다.
사회운동 좌파는 민주당식의 국익외교 전략과 국민의힘식의 노골적 친미 노선 모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익외교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라의 계급구조, 즉 자본과 대기업의 이익을 반영한다. 국익 외교가 성공하면 국가경제가 특정 기간 성장할 수 있지만, 그 성장의 이익이 노동자계급(즉, 서민층)에게 돌아오는가는 다른 문제다. 자산 격차, 소득 양극화만 심화될 뿐이다.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신화는 실증적으로 완전히 깨졌다.

현상 유지에서 탈중국화로
양안문제에 대한 민진당의 태도가 ‘현상 유지(Status Quo)’에서 ‘탈중국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2016년 차이잉원 취임 이후, 중국공산당이 가하기 시작한 대만에 대한 외교적/군사적 압박이 이를 촉진했다. 중국은 ‘92공식’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 면서, 대만을 국제기구로부터 배제하거나 수교 국가를 줄였고, 군사연습을 통해 대만섬을 포위하는 등 군사적 압박도 서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현장 유지’는 ‘일방적인 양보’로 내몰렸고, 특히 명시적으로 ‘독립’을 표방하는 정치그룹들이 세력화하면서 민진당 역시 이런 경향을 강화하게 됐다. 설상가상 미중 분쟁은 이를 심화했고,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안팎에서 벌어진 다양한 문제들이 대만 청년들로하여금 “나는 화인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강화시키고, 정체성 논의를 심화시켰다.
이런 경향은 국외에서 전개되는 모든 사건들을 ‘친중/반중’이라는 틀에 가두었다. 양극단으로 갈라진 대만 사회가 한국 정치 상황을 관찰할 때조차 이 구도가 그대로 적용된다. 민주당은 ‘친중 좌파’이고, 국민의힘은 ‘친미 자유민주주의’라는 식의 관점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다. 태극기부대가 ‘중공’에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 투사로 오인식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흐름이 지난 12월 대만 민진당의 공보담당자가 윤석열의 내란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게시한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문제는 ‘그쪽이야말로주의’에 기반한 입장도, 그것의 거울상도 결코 해당 국가의 민주주의나 인권을 신장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자는 ‘이념화된’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이념 없는’ 극단화를 추동한다. 이는 오늘날 극렬 민주당 지지자들과 극렬 국민의힘 지지자들 사이에 형성된 한국 사회의 무수한 갈등들을 닮아 있다. 숱한 지식인들조차 보편적 가치나 이념 대신, 순전히 종파적인 대립이 만드는 폭풍우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며 여론을 호도하고, 이런 경향을 심화시킨다. 이런 게임의 승자는 어디까지나 숏폼 컨텐츠 친화적인 선동가들이겠지만,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사회를 병들게 만들 뿐이다.
이러한 감정 정치는 ‘우리’를 더 도덕적이라고 믿고, 외부에 대한 혐오를 심화하며, 본질주의에만 집착하고, 복합적이고 다층적 주장들에 대해선 귀를 닫는다. 카리스마적 리더의 주장보다는 형식을 예찬하고 추종하고, 비판적 사유 대신 피해망상을 키운다. 집단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면 외부나 내부의 이견자들을 책망한다.

불평등과 빈곤의 세계에 맞서
사회운동 좌파는 이와 같은 탈이념화된 종족주의(tribalism) 경향을 비판하고, 인권과 평등, 노동권의 증진과 같은 초민족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 모순을 응시해야 한다. 차이와 보편, 정체성과 연대를 동시에 추구하는 비판적 균형을 갖추고,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불평등과 빈곤에 맞서 돌봄의 관계맺음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가령 윤석열의 내란 사태와 시진핑의 노동운동 탄압, 트럼프의 반이주민 정책은 공히 비판되어야 하며, 함께 맞서 싸울 수 있는 전선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대만 국민당은 중국에 무비판적이어서, 민진당은 미국에 무비판적이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사회운동 좌파의 국제 정치는 민중 중심의 국제교류, 생태주의와 평화를 견지하는 외교 모델을 전면화하고, 모델화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중심에 두는 외교가 아니라, 민중의 복지 증진과 노동권 보호를 전제로 한 무역 규범, 기후정의와 인권 기준을 지키는 경제 협정, 남반구(Global South) 국가들과의 연대/협력을 지향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사회운동은 극우/보수로 양분된 지배 정치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 세력 형성의 과제를 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글 : 김모두 (플랫폼c 동아시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