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남성, 냉소를 넘어 우리를 억압하는 진짜 모순에 맞서자

청년 남성, 냉소를 넘어 우리를 억압하는 진짜 모순에 맞서자

청년 남성들도 다수 남성이 공통된 경험을 갖고 있는 징병제나 억압적인 군대 문화의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혹은 우리를 착취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 현실을 폭로하고, 이것의 개선을 위해 싸울 수 있다.

2025년 1월 24일

[읽을거리]에세이사회운동, 청년, 윤석열퇴진, 민주주의

2024년 12월 3일 위헌적인 계엄 선포 이후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윤석열 퇴진'과 '탄핵'을 외쳤다. 하지만 이번 광장에서는 20~30대 남성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왜 이런 격차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20~30대 여성들은 많은데 반해, 남성들은 왜 보이지 않는지 의문을 던졌다.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를 토대로 12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대로에서의 탄핵 집회에서 연령대별, 성별 집회 참가 인원을 보면, 10대부터 30대까지 남성은 전체 참가자의 11.1%만을 차지했다. 반면, 같은 연령대의 여성은 전체 참가자의 31.8%로 나타났다. 특히 20대 남성과 여성의 경우, 각각 3.3%, 17.8%로 5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12월 7일 성별·연령별 여의도 생활인구 데이터
12월 7일 성별·연령별 여의도 생활인구 데이터

젊은 남성이 광장에 나오지 않는 이유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을까? 위헌적인 계엄 사태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성들의 윤석열 지지율이 여성들보다 5배 이상 높기 때문일까?

평범한 남성들 역시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를 마주하는 경우는 여성보다 훨씬 적다. 따라서 남성 집단 내에서는 여성 집단과 달리 성별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적고, 성별 자체가 불의에 맞서 저항하는 매개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남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이 완전히 부재하고 할 수는 없다. 청년 남성들이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 징병제 현실에서의 병역 의무다. 아무리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군대라는 공간은 또래 남성들이 1년6개월에서 1년9개월에 걸쳐 한 공간에 모여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를 감당해야 하고, 남중·남고에서의 거친 문화를 보다 노골적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남자다움(man box)' 또한 여성과는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또는 스스로에게 가하는 억압의 일종이다. 이외에도, 남성 스스로 "남성이기에 받는 핍박"이라고 여기는 문제들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든 그렇지 않든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들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안정 노동 현실에서 스스로를 착취해야 하고, 끊임없이 경쟁 질서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어야 한다. 이는 우리를 고단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독하게 만들고 소외시키는 착취이다.

문제는 상기한 감정을 느끼는 청년 남성들이 자신이 느낀 피해감과 고통, 고독을 이야기기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온라인 공간만이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돼버렸다. 하지만 이미 '여성혐오'가 만연하고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남성으로서 느낀 피해를 얘기할수록 그 해결 방안을 고민하고 논의하기보다 그러한 피해를 만들어냈다고 간주되는 페미니스트, 더 나아가 한국 여성 일반, 그리고 그들과 동조하는 '좌파' 정치권을 향한 반감과 비난만 높아진다.

이런 온라인 담론 지형은 '피해자로서의 남성 일반'을 부추긴다. 그 결과, 남초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나거한(나라 전체가 거대한 한녀)'이라는 용어가 유행할 정도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젊은 남성을 핍박하고 있다'는 식의 망상이 '디폴트(기초설정값)'가 됐다.

여초 커뮤니티의 담론 역시 온라인 공간이 지닌 한계로부터 제약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차별과 폭력은 훨씬 크고, 동시에 여성들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의 역사가 있었다. 바로 페미니즘이고, 페미니즘의 중요한 성취는 그것이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년 여성들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담론을 넘어, 페미니즘이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강남역 8번출구 살해 사건으로부터, #metoo 운동의 물결로부터, 여성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는 폭력과 임금 차별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향한 더 많은 질문이 뻗어나왔다.

문학·방송·언론·정치·사법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여성혐오와 차별에 맞선 정의롭고 정당한 저항은 한때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운운한 민주당 정권 하에서 정권의 주요 정치인들의 정치적·육체적 생명을 스스로 끊은 원인으로 '페미년들'이 지목되기 이전까지는, 나름 공적 저항을 덜 받으며 날개를 펼쳐나갔다. 물론 '이전 정권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쟁취해낸 변화는 민주당 정권이 아닌 그들 자신 덕분이다.

투쟁을 통해 기른 실천의 역량과 결과로서 마주한 변화가 주는 효용감은 청년 여성들로 하여금 광장에 나설 충분한 이유가 됐다. 실천력과 효용감을 아직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기에 마주하는 혐오와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검증된 방안'인 광장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냉소 넘어 자신을 위해

청년 남성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억압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년 남성들도 다수 남성이 공통된 경험을 갖고 있는 징병제나 억압적인 군대 문화의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혹은 우리를 착취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 현실을 폭로하고, 이것의 개선을 위해 싸울 수 있다. 문제는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가 지닌 냉소적 정서가 그러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알빠노(내가 알 바냐)',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자살하면 그만이야' 등의 유행어에서 볼 수 있듯 냉소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냉소에 사로잡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일들에는 하등의 관심을 갖지 말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전적으로 타인의 탓이라고 조롱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이러한 냉소의 범주는 자기 자신도 포함하기 때문에 냉소하는 청년 남성 자신에게도 '밝은 미래'란 불가능하다. 이런 현실에서 청년 남성 집단은 변화를 꿈꾸기 어렵다. 그저 지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에 충실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손해보지 않는 '합리적'인 생활양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경기침체와 노동권 추락이 동시적으로 이뤄지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냉소는 다른 집단을 적대하거나 탈정치의 늪에 빠지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마음 속 한켠에서 이러한 생활양식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의문을 품기 마련이지만, 오래도록 견고하게 쌓인 사고틀을 변화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사회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나 터져 나오는 광장은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들, 살면서 들어보지 못할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공간이다. 꼭 '사회대개혁을 이룩하자'라던가 '민주주의를 지키자' 같은 거창한 이유를 내세우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일상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한 경쟁을 거부하기 위해 광장에 나설 수 있다. 나를 위해 사회가 이렇게 저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이기심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따금 이타적이고 자주 이기적인 내가 타인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만나 충돌하고 대화하고 고민하는 곳이 바로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한 광장과 거리다.

광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어쩌면 우리는 즉시 무언가를 위해 바로 행동에 나서기 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느리게 돌아보고, 그 사회 속 내가 처한 구조적인 위치를 직시해보려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삶의 리듬과 시야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면, 우리에겐 다른 리듬이 필요하다. 냉소가 아닌 질문이, 적대가 아닌 환대가, 무조건적인 ‘좋아요’나 ‘개추’가 아닌 의구심과 사색이 필요하다. 의심하며 되묻는 발걸음을 통해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냉소를 넘어, 우리의 일상을 억압하는 진짜 모순에 맞서 싸우자! 우리 삶을 바꾸자!

글 : 박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