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성장과 탄소식민주의의 모순 | '재앙의 지리학' 서평
2024년 11월 15일
지난 9월 플랫폼C 책읽기모임에서는 로리 파슨스(추선영 역)의 『재앙의 지리학: 기후붕괴를 수출하는 부유한 국가들의 실체』(오월의봄)을 함께 읽고 토론했다. 이 책은 친환경물건들을 구매하는 것 등의 개인적 실천을 넘어 좀 더 효과적인 기후정의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책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탄소배출 책임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녹색성장’의 허상을 잘 폭로하는 이 책을 읽고, 탄소식민주의에 맞선 실천에 함께할 수 있길 바란다.
『재앙의 지리학』의 원제는 "탄소 식민주의 : 부유한 국가들은 어떻게 기후 붕괴를 수출하는가?"(Carbon colonialism: How rich countries export climate breakdown)이다.
19~20세기 식민지 피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지역과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한 오늘날, '식민주의가 아직도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 로리 파슨스는 지난 500년동안 부자 국가들이 외부 국가의 자연을 추출하고 사람을 착취해 자신들의 부를 쌓고 있고, 국제적 물류 생산 네트워크인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가난한 국가들에 환경오염을 안겨주고 자국의 번영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것을 ‘탄소 식민주의’라고 명명하며, 공급망이 국경을 초월했기 때문에 국지적 감시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논증한다. 그러면서 규제의 폭을 확장해 공급망의 최전선에 있는 가난한 국가들의 농어민과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강조한다.
날씨와 상관없이 몸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 상대적으로 많이 머무를 수 있는 북반구 ‘선진국’ 출신의 나와, 기후재난으로 온 마을이 쓸려가는 남반구 국가의 사람들의 기후위기에 대한 경험은 다르다. 저자는 2000년대부터 급속하게 개발의 물결을 경험한 캄보디아의 노동자, 농민 등을 만나 그들의 말에 들어있는 진실을 발굴하기 위해 애쓴다.
착취의 세계화
고대 로마시대로부터 제국은 추출과 착취를 기반으로 존속했다. 그 방법이란 특정 집단을 착취해 자연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그들의 부를 쌓는 것이다. 이때 약자와 자연에 대한 학대는 동시에 벌어지고, 추출을 담당하는 집단은 사회의 주류에서 분리된다.
자연의 재생속도는 제국의 원자재 소비 속도와 수요를 맞추지 못한다. 따라서 제국은 추출될 자연과 착취할 노예를 끊임없이 찾는다. 오늘날 남반구 국가의 노동자는 북반구 국가에 싼 값으로 수출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위험한 노동강도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한다. 가난한 국가들은 산업 활동을 관리할 역량이 부족하므로 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인건비를 올리면 외국 투자자들이 철수할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린다. 원자재를 실질적으로 구매하고 관리하는 초국적 기업들은 환경파괴와 노동착취가 일어나든 말든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이를 막는 규제도 없다.
제국은 끝난 게 아니라 북반구와 남반구로 나뉘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저자의 주요 연구 지역인 캄보디아 사례를 보자. 2000년 이후 캄보디아 당국이 외국투자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소유권 설정은 수많은 농민들을 삶의 터전인 농지에서 쫓아냈고, 이들은 강제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다행히 토지를 보존한 농민들도 기후위기로 인해 화학비료와 살충제 등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이 비용 충당을 위해 가족 중 일부를 공장 노동자로 보내고 그가 보낸 돈으로 농사를 짓는다. 농업과 산업은 서로에게 의존하는 동시에 국제시장에 종속되어 있다.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즉 농민들을 땅으로부터 축출시키는 과정은 지금도 여전히 캄보디아를 포함한 남반구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추출과 착취에 기반한 이 국제적 재화 생산 체제, 즉 글로벌 공급망이 근본적으로 ‘선진국’이라 불리는 제국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우리가 기업의 부정의한 행태에 소비자로서 항의하려고 해도, 공급망의 복잡성은 책임자를 지운다. 오늘날 세계화된 생산 구조는 대량 구매자가 물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선택지가 거의 없는 생산자에게 준수를 강요하는 방식이다. 멀리 떨어진 생산공장을 감독하는 방법 중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려는 소비자가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다. 저자는 친환경 제품을 구입하기보다 그런 제품에 대한 감독을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가 단위 탄소 배출 계산의 문제
윤리적 소비를 통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선진국 ’의 자기중심성에서 기인한다. 이는 책임을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하면서 주요 책임자들의 의무는 약화하는 그린워싱이다.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탄소 배출 감축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의 탄소 배출량은 계속 늘고 있다. 환경에 피해를 많이 주는 공정을 남반구 국가들에게 외주화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의 직접적인 탄소 배출량에 외부에서 생산된 제품을 수입한 배출량까지 합치면 지구 탄소 배출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유럽연합은 1990년대 이후 20% 감축했다고 주장하지만 외주화된 배출량이나 은폐된 배출량을 합하면 사실 11%가 증가했다. 이렇게 부유한 국가에서 가난한 국가로 탄소 배출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탄소식민주의'다.
배출량이 과소평가되거나 은폐되는 대표 산업은 의류업과 벽돌 생산 영역이다. 의류업의 탄소 배출량에는 옷이 세계로 유통될 때 나오는 탄소가 빠져있다. 면직물 원단이 동남아에 가면서 탄소를 배출하고, 동남아에서 완성품을 만들어서 최종 목적지인 ‘선진국’으로 보내면 또 어마어마한 탄소 배출이 발생한다. 벽돌의 건조환경은 에너지와 관련된 전 지구적 탄소 배출량의 39%를 차지하지만, 벽돌 산업은 대형 탄소 배출원으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남아시아 벽돌벨트의 주요 수출국으로는 영국, 미국, 유럽 국가들, 한국 등 대부분 북반구 국가들인데, 수출국과 수입국 간 거리가 멀수록 탄소 배출량이 많지만 역시 유통은 탄소 배출로 집계되지 않는다. 두 사례에서 보듯이, 일국적 차원에서 탄소 배출을 계산하면 생산과 운송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총체적으로 계산할 수 없어 필연적으로 과소평가하게 된다. 즉, 생산과 유통은 세계화되어 있는데 규제는 각 국가 차원에서 적용하면 소용없다는 뜻이다.
발언권은 누구에게?
우리에게 닥친 위험에 잘 대처하려고 해도 왜 이렇게 잘 안 되는 걸까? 기후위기의 복합성도 원인이지만 더 큰 이유는 발언권의 불평등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날씨를 그대로 감당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데우거나 식힐 돈조차 없는 사람들이고, 이들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는다.
어느 벽돌노동자 노부부가 있다. 농장 노동자들이 공장에 취직하려고 다 떠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지역 농자재상에게 씨앗과 비료를 사서 재배했다. 그러나 토양이 점점 영양분이 없어져 수확량은 적어지고 빚만 남았다. 그들은 토지를 팔아 대부분의 부채를 갚고 벽돌 가마 사장에게서 빌린 약간의 돈을 갚으려 했지만 벽돌 가마의 노동자 임금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고 몸도 아파서 빚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도심에서 떨어진 호수의 수상가옥 어민은 수위 저하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한 개간 사업이 화재를 빈번히 발생시켜 더워지게 만들고, 남획이 성행하고, 무엇보다 중국과 여러 동남아 국가들이 댐으로 메콩강 상류의 물을 가둬놔서 흐르는 물이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호수 지역의 기온 상승과 예측불가 강수량은 지역의 경제개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들이 이런 상태가 된 것에는 부채, 세계화, 개발이 깊은 연관을 가진다. 기후위기는 소규모 자영농과 어민들을 빈곤에 빠지게 만들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이 논의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담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추출과 착취의 기반 위에서 기후 지식이라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지상주의적 논리는 소유권 바깥을 모두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고, 환경주의자들 역시 시장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저소득층은 지식 생산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북반구나 서구권의 학자들만 학계에서 부각될 뿐 남반구 학자들은 인용 횟수가 현저히 적다. 부유한 국가들이 지식 생산에 대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가치를 설정할 권력도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농민, 노동자, 남반구 등 주변화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실을 도구가 필요하다.
탄소식민주의 부수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는 하나의 합의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권력이 맞물린 투쟁의 장이다. 영국과 방글라데시가 발표할 견해는 절대 같을 수 없다. 부자 나라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녹색성장’을 지지한다. 그들은 경제성장이 지속가능성과 양립할 수 있다고 정당화하고, 그 근거로 GDP 성장과 자원 추출의 동조 관계가 경제가 성장할수록 멀 어진다는 탈동조화(decoupling)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비판적 학자들에 따르면,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자원 사용이 성장에 맞춰서 되살아났기 때문에 탈동조화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자원 추출의 대략적인 한계는 매년 약 500억톤이지만 2020년에 인간은 이미 매년 700억톤을 소비하고 있다. 세계적 경제 성장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자원 추출의 속도도 빨라지고 자연의 재생속도는 이를 따라갈 수 없다. ‘녹색성장’은 불가능하다.
경제성장과 지속가능성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의견이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 등 여러 환경운동가들은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바꾸자’,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라는 효과적인 구호들로 경제와 정치 관료들을 비판한다. 남반구의 급진적 환경운동가들은 자연도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원주민의 입장에서 제국에게 추출과 착취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우리에겐 이들의 말이 필요하다. 수치로 인간 사회의 복잡함을 재단하고, 위기를 전가하는 선진국들의 지식인과 관료들의 말은 필요 없다. 쫓겨나고 학대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야한다.
저자는 대안으로 3가지의 우선과제를 제시한다. 첫째는 국내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탄소 배출량 대신 소비를 중심으로 탄소 배출 조치를 짜는 것, 둘째는 엄격한 규제를 세계화된 공급망에 반드시 적용해야한다는 것, 셋째는 세계의 공장들이 재해의 지형을 만드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업의 선의에만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압박해서 탄소식민주의의 종식을 요구하자. 그럴 때 제국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탄소배출 책임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녹색성장’의 허상을 잘 폭로하는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제국에 맞서는 실천에 함께할 수 있길 바란다.
글 : 김현빈
교열 : 박상은, 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