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성, 유쾌함, 원주민성 | 「세 마을: 왕차우 이야기」 비평

자치성, 유쾌함, 원주민성 | 「세 마을: 왕차우 이야기」 비평

홍콩의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렁은 저항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한다.

2024년 10월 24일

[동아시아]홍콩홍콩, 홍콩항쟁, 서평, 문화예술, 농촌, 이주민

[번역자의 말] 이 글은 홍콩의 좌파 활동가·연구자 그룹 라우산(Lausan)이 지난 8월 28일 게재한 마이클 렁(梁志剛, Michael Leung) 소설 <세 마을: 왕차우 이야기(Three Villages: A Wang Chau Story)>에 대한 비평이다. 해당 소설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이 비평만으로도 2019년 홍콩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운동 이후 홍콩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들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한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소설과 비평문에 언급된 홍콩 농촌에서의 강제퇴거 반대 운동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고 싶다면, '홍콩 청년들의 농민 연대 | 2009년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을 먼저 읽으면 좋다.

지난 20년 동안 신유물론과 객체지향 존재론(“OOO”)의 부상은 10년 간의 수평적이고 특정한 지도자가 없는 형태의 운동과 대략적으로 비슷한 시간적 흐름을 갖는다. 이 10년 간의 운동은 모두 전문 활동가/조직가의 모습에 지친 정치적 지형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비아 윈터(Sylvia Wynter)의 작품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신유물론적 객체지향 존재론적 작품들은 서구 과학적 합리성의 가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논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 중심주의의 학문적 박탈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신유물론과 객체지향 존재론의 인간 주체성 탈중심화는 생태 시스템 내부와 생태 시스템에서의 상호의존성, 비인간 사물과 존재의 ‘주체성’ 또는 정동적 힘을 검토함으로써, 생태파괴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의 중요한 수단을 제공하는 조직 형태와 구조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종종 제거하게 된다.

마이클 렁은 그의 소설 <세 마을: 왕차우 이야기(이하 ‘세 마을’)>에서 상황주의와 반란적 아나키즘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치 이론을 끌어와 비인간적 주체성을 인정하는 ‘다원성’(보편주의 서구 전통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는 탈식민 이론의 용어)을 공유함으로써 이러한 과잉을 피하고 있다. 렁은 홍콩 신계(新界, 신가이)에서 벌어졌던 토지정의 투쟁을 바탕으로, 여러 마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는 부동산 개발업자에 대항하는 자율적인 퇴거 반대 투쟁의 서사를 엮어낸다. 이러한 구성은 2019년 시위의 실패 원인에 대해 그간 논의되지 않았던 평가를 제안한다. 2019년의 시위가 소수의 학생 운동가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2012년, 점거만을 강조했던 2014년과 같은 과거 시위, 운동 형태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저항은 식민지적 향수와 함께 근대주의적 자유주의 정치 규범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렁은 토지 정의와 생태학적 프레임 속 홍콩의 저항을 주목하면서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되는 범위와 이러한 행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의 폭을 넓혀준다. 이는 또한 2009년 광저우와 홍콩을 잇는 철도 연결에 반대하는 시골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집을 철거하는 데에 저항했던 고속철도 반대 시위 등의 급진적인 투쟁과 같은 다양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렁이 <세 마을>에서 이야기하는 사건의 토대가 된다.

렁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 실제 투쟁했던 동지의 허구적 버전인지 아니면 모두 허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신중하게 휴머니즘적으로 등장인물들을 스케치하여 정치적 조직화에 도움이 되는 허구의 변증법적 가능성을 활용하고 이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허구일지라도 유효하다. 소설은 반딧불이의 관점에서 시작하여 왕차우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큰 나무’의 목소리로 마무리되며 활동가, 동물, 식물, 인간 이외의 다양한 주체들의 시점의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조는 토지정의 투쟁을 바라볼 때 예상되는 정치적 행위자나 인간 주인공을 미화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한다. 대신 농촌 주민들과 그들이 토지와 관계맺는 방식-종종 소설에서 매력적이고 솔직한 신념에 대한 선언과 아늑한 유쾌함을 통해 표현되는-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는 현재 홍콩 시위 이후의 지형에서 2019년 시위의 반(反)‘빅 스테이지’(특정한 지도자가 없고 한 장소를 점거하기보다는 게릴라식으로 진행되는 투쟁) 경향의 연장이거나 서구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악용되었던 시위방식에서 벗어난 다양한 결정 요소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토대 위에서 토지정의 투쟁에 대한 렁의 이야기는 생계를 위해 농사짓는 고령의 농민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대학생, 청년들의 경험을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한 성찰, 홍콩 원주민성(indigeneity), 미래의 운동을 위한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는 유쾌한 직접 행동 실천 등을 경유하여 탐구한다.

국가(state)와 대표성

오늘날 도시와 농촌의 사람들은 모두 쇠렌 마우(Søren Mau)의 말처럼 “인프라, 데이터, 기계, 금융 흐름, 지구적 공급망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시스템에 의해 매개되는” 그들의 사회적인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홍콩은 정부의 마케팅에서 오랫동안 드러냈듯이 수십 년 동안 세계 자본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침투해있는 ‘세계 도시’로 자리매김해왔다. 세계 최대 두 경제를 연결하는 전 식민지 무역 중심지이자 금융 서비스 허브인 홍콩에서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현지인들은 일상적으로 ‘글로벌’함을 느낀다. 왕차우의 경우, 토지정의 투쟁의 주요 갈등은 모든 홍콩인들과 토지의 관계를 관리하겠다며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여한 억압적인 기업 자본주의 정부와 스스로 토지를 관리하고자 하는 평범한 농촌 주민 사이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렁이 미묘한 형태의 상극인 정치적, 사회적 매개들을 살펴본다는 점이다. 그러한 형태 중 하나는 시혜적 동정적인 선출직 공무원, 강제퇴거를 주도하는 공격적인 토지부(Lands Department) 직원, 그리고 비교적 타협적인 정부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되어 과도하게 켜켜이 쌓인 관료적인 공무원 조직들 내 서로 다른 층들이다. 이들 중 누구도 토지를 어떻게 이용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해 마을 주민들의 신념이나 관행을 진심으로 듣고 함께 논의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주민들을 회유하거나 억압해야 할 대상 혹은 ‘들어줘야만 하는’ 대상으로 취급한다. 한 에피소드는 자신을 ‘두리안’이라고 칭하는 한 사회복지사가 마을 주민들의 저항을 돕기 위해 최근 왕차우로 이주한 두 인물과 맞서게 되는 내용이다. 박사 과정 학생인 태미와 예술가이자 카페에서 일하는 킨이 그 두 인물이다. 두리안은 자신이 마을 주민들과 더 오래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주민들을 더 잘 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두리안이 주민들로 하여금 보상을 받고 땅을 떠나도록 설득하기 위해 주민들과 친한 척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교묘한 정치적 매개는 킨이 마을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이타적으로 노력하는 자신의 역할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우리와 그(*두리안)처럼 농민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의도나 다른 직업이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일인지 ‘정의로운’ 일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두리안은 내게 이런 의문을 가지게 했다.”(62) 마을 주민들을 쫓아내려하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 속에서 태미는 누군가의 (가변적인)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정체성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기를 킨에게 제안한다. 이에 킨은 ‘내부’나 ‘외부(연대를 제공하는 입장)’라는 경직된 범주에 고정되기보다는 자신의 위치를 변화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들 중 하나가 되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자기 확신에 찬 ‘연대’의 쉬운 역할을 비판하는 킨과 태미의 자기반성을 통해, 렁은 도시 중산층 배경에서 갑자기 나타나 ‘도움(즉, 현장답사-필드워크)’을 주고 떠나는 선의의 ‘대학(원)생 활동가’의 외부적 위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세 마을>이 주는 시사점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그들을 대표하는 것이 겉으로 보았을 때 ‘도움을 받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언어를 가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자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학생 주도의 운동으로 오랫동안 정의되어 온 홍콩의 정치 지형에서 <세 마을>이 주는 시사점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그들을 대표하는 것이 겉으로 보았을 때 ‘도움을 받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언어를 가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자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렁은 이 책이 왕차우 토지정의 투쟁에서 ‘탈식민주의적 관점과 접근법’을 제공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를 국가(state)에 대한 비판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의도하지 않은) 침묵이 사회적, 정치적 표현의 일부가 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검토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홍콩의 다른 급진적 자치 정치 공간들의 정신과 공명한다.

예를 들어, 이주민 연대 위원회, Autonomous 8a와 같은 조직들은 이주 가사 노동자를 대변하려 하거나 정치적 프로그램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블랙 윈도우(*역주: 아나키즘과 반자본주의를 추구하며 주인없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홍콩 삼수이포의 채식 식당) 역시 ‘연대’와 ‘행동주의’ 등으로 특정 대중 투쟁의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범주화하여 공고히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투쟁을 통해 구축된 사회운동의 기반이 해당 투쟁의 요구를 달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렁의 서사는 사회운동의 기반을 실천으로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화합의 가능성을 통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을 통해 ‘외부’의 위치를 계속해서 무효화하려고 하며, 홍콩 운동의 이 흐름에 기여한다. 토지를 관리해왔던 주민들을 통해 사회운동이 토양처럼 수년과 세대에 걸쳐 축적되는 점증적인 것임을 배울 수 있다.

<세 마을> 속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사회적 위치와 ‘내부자/외부자’ 상태를 둘러싼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을 주민들이 주최하는 잭푸르트 축제를 앞두고 킨은 과거 협력 연구자였던 잉을 초대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어떤 이유에선지 초대하지 않았다.”고 막연하게 언급한다. 이어서 그는 “잠깐 모이는 자리에서 복잡한 상황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103)고 덧붙인다. 킨은 앞서 언급했듯이 두리안의 계략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외부자’ 지위에 대해 불편해했지만, 나중에서는 토지 개발업자와의 싸움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그들과 맞서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을 배제해버림으로써 ‘내부자’로서의 영향을 떨쳤다. 킨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그의 끊임없이 변하하는 자기인식은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유동성이 얼마나 복잡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나타낸다.

‘원주민’의 모순

렁은 토지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토지에 대한 책임 문제를 탐구하면서, ‘원주민’이라는 범주가 다른 많은 유럽, 미국의 정착민 식민주의 맥락에서처럼 토지를 이용, 관리하는 사람의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모순을 다루고 있다. 많은 ‘원주민’ 담론의 핵심에 있는 이 난문제는 홍콩뿐만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펼쳐진다. 미국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제노사이드적 식민 전쟁이 그것이며, 그 중에서도 석유 파이프라인을 통한 수로의 파괴가 심각하다.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점령은 자신들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는 땅에 토착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올리브 숲과 같은 토착 식물 생명에 대해 잔인한 생태학적 범죄를 저지른다. 또한 중국의 ‘생태 문명’이라는 사회주의 개발 프로그램은 토지 경계를 설정하고 카자흐 생활 방식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하며 그린워싱을 일삼고 있다. 특히 이 모든 정착민 사회는 자유, 반제국주의 또는 반식민주의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지배권을 주장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자신들이 빼앗은 땅에 대한 합법적인 점유를 주장하기 위해 집단학살적인 자기 토착화 조치를 취해왔다. 렁은 홍콩의 지역적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을 적용시켜 분석함으로써 홍콩을 단일 차원의 자본주의 전초 기지로 보려는 글로벌 좌파 사이 홍콩 시위자들의 위치를 확립하고 지역 정치의 종종 고립적이고 예외주의적인 자기 프레임을 거부하는 중요한 사례를 제시한다.

왕차우와 차궈링 등 홍콩의 ‘비원주민’ 마을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춰 연구하는 등장인물 태미는 홍콩 토착민 담론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가부장적 정책과 농지와 마을 생활의 파괴가 만연한 신계지는 식민지 잔재이며 1997년 반환 이후 20년 동안 홍콩 정부의 무능함을 보여준다.”(19) 신계지에서 “원주민”이라는 용어는 1898년 식민지 정부에 귀속되기 이전에 신계지에 거주하던 남성 가장을 지칭하기 위해 영국 식민지 주민들이 정의한 가부장적 법적 범주이다. 재산 소유권에 대한 가부장적, 식민주의적, 서구적, 지역적 법적 개념의 혼합은 원주민을 식민지 위계질서에 순화시키고 흡수하는 동시에 탄카족(*란타우 섬의 갯벌 위에 대대로 집을 짓고 살던 어부들을 흔히 칭하는 말) 보트 거주 원주민과 모든 여성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토지에 대한 영국의 법적, 철학적 개념이 신계 지역으로 확장됨으로써 원주민 남성들은 생계를 위해 농사짓는 사람들보다, 영국 식민정부로부터 ‘비원주민’으로 분류된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토지에 대한 모든 법적 소유권과 가부장적 지배권을 보유한 원주민 엘리트 층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기업의 이윤 추구와 부동산 가치 상승에 대한 수요로 인한 홍콩의 인위적인 토지에 대한 ‘희소성’ 때문에 원주민의 남성 후손들은 다른 유럽 정착민 식민지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 원주민 계급은 경찰, 삼합회, 부동산 개발업자와 깊은 결탁을 통해 마을 주민들을 내쫓고 토지를 자본화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다시 말해, 이는 중국이 주장하는 홍콩의 ‘탈식민화’가 직면할 의지가 없거나 마주할 수 없는 식민지성의 연속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부패한 원주민 계급은 중국이 주장하는 홍콩의 ‘탈식민화’가 직면할 의지가 없거나 마주할 수 없는 식민지성의 연속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단순히 ‘원주민’이라는 명명의 문제가 아니다. 홍콩 상황에서 ‘원주민’과 토지를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의 단절은 누가 원주민인지 주장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많은 갈등의 핵심에 있는 시간적 질문을 강조한다. “누가 먼저 이곳에 있었나?” 혹은 임의의 특정 시점 이후 누가 더 오래 이곳에 있었을까? 홍콩의 원주민 계급은 단순히 그 땅에 (신계지의 경우 토지를 임대하기 전) ‘가장 오래’ 거주했다는 사실만은 원주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렁이 소개하는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와 사례는 생태학적 관점으로의 실천과 과정, 특히 운동을 통해 환경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는 경직된 ‘연대자’ 범주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렁은 ‘실천’이 고착화되어버린 사회적 범주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킨과 태미와 같은 인물이 원주민성을 주장할 수 있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토지 투쟁에 연대할 때에 그들의 영향력은 그들과 함께 일할 때의 실천과 존재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행동과 자치

왕차우를 포함한 홍콩의 토지 투쟁은 모두 영국 식민정부와 그 후계자인 중국(이 또한 식민주의라는 주장도 있음)으로 이어지는 ‘식민성 의식’(20)에 대한 투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은 가부장적인 토착 엘리트 남성 계급을 만들었지만 후계자인 홍콩 정부는 현재 폭력적인 토지 강제 철거를 주도하고 홍콩인의 민주적 대중 참여 형태인 참정권을 명백하게 차단하는 통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홍콩 정부가 선거권부터 대중 시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전통적인 변화의 수단을 제한하거나 불법화하면서, 저항에는 허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소설의 주요 조장은 더욱 중요해졌다. 따라서 소설이 실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자 렁의 통찰은 2020년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억압 환경에서는 법적, 조직적 차원을 넘어 이러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렁은 주민 주도의 집회, 바리케이드, 축제, 스쿼팅(점유) 등 다양한 ‘비조직적’(즉, 정치 조직이 주도하지 않는) 실천을 통해 자치적인 직접 행동에 대한 아나키스트 개념을 탐구한다. 킨은 “정부가 종종 그렇게 하고 그에 따라 강제 퇴거를 집행하는 것처럼 스쿼트 건물을 고립된 채로 볼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상황과 맥락을 지닌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가진 관계망으로 봐야한다.”(31)고 지적한다. 킨은 유럽의 저항으로서의 스쿼팅의 사례들을 통해 홍콩의 ‘스쿼팅 타임라인’을 작성하게 되었고, 홍콩의 ‘스쿼팅’ 역사가 영국의 식민지배와 일본 제국주의의 점령 뿐만 아니라 난민의 역사와도 깊게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속적인 제국주의의 침탈은 토지와 관련된 재산 소유, 경계, 생활 및 노동에 대한 관념을 변화시켰다. 패러다임의 주요 변화로는 1898년(‘원주민’ 계급이 탄생한 해), 영국이 99년 간 신계 지역을 조차하고 식민지 정권이 모든 영토를 영국 왕실의 토지로 주장한 것이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주민들을 세입자로 만드는 식민지 토지 수탈”(35)이었다. 다음날 킨과 태미는 신공항 건설로 인한 건물 철거를 막기 위해 활동가 그룹을 초청하여 농가를 점거한 프랑스 농부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활동가들은 “영토를 지켜내려면 그곳에 살아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집회를 열었다. 이는 홍콩계 미국인 예술가 사이먼 렁의 프로젝트 ‘홍콩을 향한 스쿼팅’과 공명한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신체적으로 쪼그리고 앉는 행위를 특정 장소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하고, 저항과 지식 생산의 중요한 형태로서 신체적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탐구한다.

렁의 시적인 서술은 비인간 행위자의 관점에서 쓰였을 때 빛을 발한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특히 인간 행위자의 대사에서는 인용을 자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주의가 분산된다. 주석과 참고 문헌 목록이 포함된 전체 버전의 논문같은 소설은 실제로 흐름의 완급에 더 많은 일관성을 부여한다. 또한 렁이 직접적으로 인용(논문 형식의 인용문은 아나키스트, 원주민, 탈식민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하지는 않았지만 필자는 렁의 소설에서 최근 부상하는 ‘탈성장’ 생태사회주의자들 사이 마르크스의 대사적 파열(Metabolic Rift) 이론에 대한 활발한 논쟁의 영향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다. -여기서 탈성장은 자본주의의 ‘성장’이라는 개념(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산-유통-소비 전체 순환을 가리키지만, 그 면밀한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이 지구적인 기후 재난을 피하기 위해 수정되거나 중단되어야 한다는 주장(참고: 사이토 코헤이, 안드레아스 말름, 제이슨 W. 무어, 존 벨라미 포스터, 쇠렌 마우, 그리고 리 필립스와 맷 후버의 글들)이다.- 특히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인간적 관점과 주체성을 통합하는 소설의 구조는 도나 해러웨이, 안나 칭 등 신유물론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로부터 왔고, 그 중 일부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탈성장/생태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이나 관련된 비평은 왕차우의 토지정의 투쟁에 대한 렁의 분석에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탈성장/생태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이나 관련된 비평은 왕차우의 토지정의 투쟁에 대한 렁의 분석에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는 앞서 언급한 잭푸르트 축제, 자발적인 스쿼팅, 마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공연의 세 가지 자치의 풍경 속 유쾌함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을의 청년과 노인들이 공사 중인 인근 ‘빅 하우스’에서 즉흥적으로 스쿼팅을 하는 모습은 이론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이자 대학생 딩이 ‘쾌락저항(快樂抗爭)’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쾌한 스쿼팅이 끝난 후 마을 주민과 청년들은 조명을 설치하고 잠자리를 펼친 뒤 함께 식사를 즐긴다. 이들은 비폭력적이고 ‘유쾌한’ 마을 순찰을 시자하여 토지부, 경비원, 경찰을 감시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집주인의 여동생인 영 씨가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여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민들은 이것이 개발업자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영구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영 씨가 서로를 이해하는 그 순간은 자체로 이정표를 제시한다. 이는 주요 요구를 달성하는 것만이 가장 큰 가치를 지니는 캠페인 차원에서 운영되는 정치 조직들과는 다른 것이 있다. 2019년 시위 이후 승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소한 이해의 순간은 단기적인 재조직, 사회 회복, 의식 제고에 매우 중요하다.

홍콩의 자결권을 위한 대중 투쟁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제도적 정당 기반의 변화 추구, 정치 조직에 대한 믿음, 대규모 거리 점거와 국제 로비,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행진과 집회라는 고전적 방식과 함께 유동적인 게릴라식 거리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 등 광범위한 단계를 거치며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지금은 많은 노련한 활동가, 새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 스스로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독서 모임, 마음과 몸의 회복, 기타 ‘비정치적’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운동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지하로 들어가고 있는 시기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출간된 렁의 책은 미래의 해방을 위해 어떤 종류의 유쾌한 생활 속 저항이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 소설을 판매한 모든 수익금은 팔레스타인 뮤추얼 어드바이스 기금으로 전달된다.
이 소설을 판매한 모든 수익금은 팔레스타인 뮤추얼 어드바이스 기금으로 전달된다.

추가 정보

마이클 렁은 예술가이자 디자이너, 시간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상 생활 속 유쾌한 만남에서 영향을 받고 다양한 자치 공간에서 영감을 받아 글, 진(zine), 소설의 형식으로 공유된다. 마이클은 홍콩 시립대학교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홍콩 왕차우에서 마을 주민들의 집을 빼앗고 생물 다양성을 크게 잃게 만드는 사건까지 이어진 식민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에 얽힌 관계들에 대해 연구했다.

마이클 렁이 속한 궈빈에서는 리소 프린터로 인쇄한 후 제본한 출판물 <세 마을: 왕차우 이야기>의 영문판을 구매하려면 이메일 zodwig0324@gmail.com 또는 이곳으로 메시지를 주면 2만7천원(160홍콩 달러)에 구매할 수 있다.

글 : JN (Lausan)

번역 : 이경희 (플랫폼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