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남성성·여성성 모두 자원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
2024년 9월 18일
전작 『페미니즘의 도전』(2005) 출간 후 약 20년이 흐른 지금, 저자 정희진은 “다시, 페미니즘을 묻는다”(머리말).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괄목할 만큼 확산하여 이제는 많은 여성 삶의 ‘기본값’이 되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과연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폭력에 유효하게 개입하고 있는지 질적 성과를 점검해 볼 시기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겪는 패러다임 변동을 이야기하며 서두를 연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가부장제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개개인에 가해지는 구조적 착취는 강화되었고, “개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자원을 총동원” 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실천 역시 이제 ‘자원화’를 피하기 어려워졌다. 이 때 계급, 세대, 지역 등 여러 범주의 중첩 속 구조적 성차별이 ‘젠더 갈등’이라는 표현으로 가려짐으로써 여러 소모적인 논쟁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공통으로 포착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정희진 작가는 한국 특유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과 한국적인 남성성(식민지 남성성)이라는 역사적 부산물에 주목한다. 8월 플랫폼C 페미니즘 공부모임에서는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로컬페미니즘을 파헤쳐 보았다.
‘미소지니’와 ‘성적 수치심’ - 언어의 한계와 근원
정희진 작가는 페미니즘 언어에서 흔히 범하는 남성 가해자 중심적 사고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혐', '성적 수치심', '피해자 중심주의' 등 페미니스트들이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고 2차 가해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도 사실은 너무 좁은 의미만을 다룰 수 있거나 가해자 중심적 표현과 사고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소지니'를 '여성 혐오'로 번역하는 경우 놓치게 되는 부분들이 생긴다.
"내가 미소지니를 번역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유는 혐오라는 단어가 주는 피로감, 남성 혐오라는 황당한 대칭어의 생산, 그리고 이 문제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전반을 지배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미소지니는 단순히 여성을 '미워하는' 현상을 넘어, 상대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대로 대상화하는 문제다. 때문에 여성으로 환유되는 다른 약자들에 대한 억압적 권력을 통틀어 볼 수 있도록 '여성'/'혐오'보다 포괄적이고 정확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부모임 토론에서도 번역에 관한 논점이 제기되었다. ‘미소지니’와 ‘여성 혐오’, 또 ‘간성’과 ‘인터섹스’ 같은 언어들 사이의 정치학과 뉘앙스의 격차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고, 결국 영어와 한글 사이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작동 기제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된 적절한 사용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정리됐다. 페미니즘, 장애학, 그리고 퀴어 연구를 함께 공부하면서 늘 번역과 현실 언어의 문제는 까다로운 숙제로 남는다는 의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적 수치심'에 대한 저자의 지적도 흥미롭다. 어느 순간부터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으면 성희롱'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하지만 저자는 성희롱은 인권과 폭력에 관한 범죄이지, 성적 수치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본질을 지적한다. 성범죄는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꼈는지를 따지기보다,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이 발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어야 한다. 왜 성적 수치심이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되는 걸까?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의 성적 수치심 개념은, 여성은 성적으로 수치심을 당한다는 혹은 당해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남성 문화가 여성을 보는 시선, 이것이 그들의 성적 수치심이다. “여자는 몸 간수가 중요한데, 몸에 기스가 났으니 참 창피하겠다”는 식이고 이것이 그들의 자기 인식이다. 개인에 따라 수치심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남성 문화가 투사한 ‘성적’ 수치심이어야 하는가?”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이 여성의 정조며, 순결이며, 처녀성이며 하는 것들에 대한 판타지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남성 문화가 상정해 둔 ‘여성성’을 가해자가 범하거나 손상할 수 있다는 자만도 포함돼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토론에서는 실상 성범죄 피해자들은 대부분 수치심보다는 "빡침" 같은 분노를 느낀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공유되었다.
이분법적 성별 논쟁
2장에서는 남성 중심으로 재편된 권력 구조 아래 왜곡되는 젠더, 3장에서는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논한다. 여성을 선물하거나 공유함으로써 형성된 경제문화의 기원, 성기중심주의 성별 논쟁, 그리고 주필리아(동물성애, zoophilia)까지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터 개인의 정체성까지 차근차근 해체해보려는 시도들 로 구성돼 있다. 한국 사회의 경직된 섹슈얼리티에 도전한다는 것은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 뿐 아니라, 성교만을 섹스로 간주하는 지엽적 인식, 페도필리아(소아성애, pedophilia)나 주필리아로 정체화한 주체들을 ‘예비 범죄자’로 규정하거나 극단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 등의 뒤에 가려진 두려움과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하고 유동적인 성 정체성 분석을 위해 인터섹스의 가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터섹스의 가시화는 ① 그 상태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 ② 남녀는 모두 뒤섞인 사회적 몸(social body)이라는 것, ③ 몸의 차이는 연속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즉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들을 인구수로 합치면 전 인구의 과반을 훨씬 넘는다)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 타파‘ 또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레토릭이 아닌,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권력과 담론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목소리가 현실을 바꾼다?
그러나 유동적인 성 정체성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출산과 육아가 서로 하나로 뒤엉킨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전자는 끝없이 펼쳐진 스펙트럼의 양상으로, 후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영역으로 구분해 서술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많은 문장에서 '평범한 한국 남성' 대 '페미니즘을 내면화한 진보적 한국 여성'의 대립을 전제하는 식이다. 토론 테이블에서도 “육아는 남성의 성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몇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저자의 여러 전작들에서도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이 메세지는 먼저 남성과 여성 젠더 구분을 해체하겠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해당 문장은 이미 “남성의 성 역할”이라는 모순적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육아, 돌봄 영역의 행위자들이 대다수 여성에 치우친 현상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비판하고자 하는 이분법에 의존하는 서술 방식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특정 행위자들을 여성/남성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하는 대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돌봄 실천 및 실험들을 포괄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또, 과연 남성 대중의 압력이 육아의 사회적 책임을 이룰 방법인가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성별을 불문하고 육아와 가사가 공공이 아닌 개인의 몫으로 전가됨으로써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한 고찰과, 공동체 육아 및 복지 서비스에서 탈젠더화를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고민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게다가 남성 대중이 육아와 가사로 인한 피로를 호소하는 날이 온다면 그 자체가 이미 상당 부분의 가사 분업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
- “나의 몸은 나의 것”?
- “나의 몸은 나.”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4장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이다. 설마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표현도 잘못됐다는 말인가?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 성매매부터 임신 중절까지 모든 과정을 걸쳐 작동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표현은 성적 주체성 측면에서도, 현대 자유주의 논리에도 꽤나 잘 부합하는 듯 보인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 모든 인간은 상품인 시대”이니까. 저자 역시 자신이 성 상품화라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긴 관행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가 해체하려는 것은 "내 몸은 나의 것" (그러니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 이라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자신을 '상품화의 주체'라는 자주적 위치로 승격시키는 듯하지만 실상은 수많은 에이전시들의 착취 구조 속 '상품'으로 만들 뿐인 결과를 가리는 눈속임이다. 개인을 구조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그 구조에 결박시키는 논리가 된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논리가 '나(이성적 주체)'와 '나의 몸 (종속된 객체)'을 이분법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성 대 육체, 우월한 정신 대 수동적으로 종속된 도구인 몸 -- 이 같은 이분화는 남성의 신체를 공적 영역 (노동과 정치의 기능)에, 여성의 몸을 사적 영역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의 기능)에 구분해 온 성차별적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성 개인들의 저항을 의미 있게 뒷받침할 수 없으며, 젠더를 불문하고 몸을 정신의 하위로 보는 순간 몸과 정신의 상호 작용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
저자는 몸을 식민화, 객체화, 그리고 여성적으로 공간화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무의식 속에 뿌리깊이 자리하는 ‘몸’과 ‘나’의 거리두기는 "나의 몸은 나의 것"을 "나의 몸은 나"로 대체하는 것으로 시작해볼 수 있다.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작업은 아직 낯설 수 있다. 우리의 세계관을 오랫동안 구성해 온 “초월적, 총체적, 보편적” 관점의 이성적(理性的) 사유를 뒤집어야 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젠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서구 근대 백인을 전제하는 인간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종주의적, 식민적 의식에 저항하는 사유와 맞닿아 있다. 자신이 몸으로서 “스스로 생동하고 반응하고 정신과 상호 작용하며 그 자체로 생산적으로 기능”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책은 여성 해방운동에 새로운 도전의 단초를 제공하는 동시에 여러 크고 작은 모순도 담고 있다. 참가자들은 이 책이 갖는 날카로운 시선에 감탄하면서도 신랄한 표현들이 등장할 때 유머인지 고도의 전략인지 가리기 어렵고, 일부 표현에서 “남성 혐오적”이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는 솔직한 평을 공유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 고민되는 지점이다. 아직 한국 페미니스트, 너무 소심한가? 아니면 정희진 작가의 일침이 수많은 혐오 발언이 생성되는 속도를 못 따라가는데 그들의 '눈치'를 보는게 너무 점잖은 건가? 논란의 구절이 나올 때마다 기꺼이 감상을 공유해주신 소수의 남성 참가자들 덕에 논쟁이 더욱 활기를 띠기도 했다. 또한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화제가 된 알제리 칼리프 선수, BJ 과즙세연 등 최근 화제가 된 현실 사례들과 역동적으로 엮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 다시 20년이 지난 후, 정희진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때쯤 이 책을 다시 펼쳐보고 "아, 우리나라가 이렇게 후졌을 때도 있었지"하며 웃어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 : 양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