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 동학농민혁명에 목숨 바친 민중들의 희망과 저항을 찾아

역사기행 | 동학농민혁명에 목숨 바친 민중들의 희망과 저항을 찾아

동학농민혁명은 근대성과 저항, 나아가 탈근대성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2024년 5월 21일

[활동]역사기행역사기행, 조선시대, 제국주의, 역사

올해(2024년)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플랫폼C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1894년 1월 고부봉기부터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성환, 공주, 전주와 완주 등 역사의 현장을 넘나들며 5월 10~12일, 2박 3일 동안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올해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플랫폼C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1894년 1월 고부봉기부터 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성환,공주, 전주와 완주 등 역사의 현장을 넘나들며 5월 10~12일, 2박 3일 동안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해설자로는 스스로 '동학에 미친 자'로 칭하는 박맹수 원광대학교 명예교수가 함께 했다. 박맹수 선생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년을 동학 연구에 매진한 연구자다. 그의 해설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사상으로서, 조직으로서, 운동으로서, 혁명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청일전쟁 시발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기행의 시작은 경복궁 영추문이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영추문에 폭약을 설치해 터뜨리고 도끼와 톱을 이용해 문을 부쉈다. 이에 맞서 싸운 조선군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일청전사 초안> (일본 참모본부에서 공식적으로 간행한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의 초고, 공식 간행된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 남아있다)은 당시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며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가 조선군의 격렬한 항쟁으로 오후까지 이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청전사 초안>을 통해 청일전쟁의 첫 전투인 풍도 전투가 일어나기 이틀 전에 자행된 일제의 경복궁 점령이 철저한 사전 준비 하에 일어난 것임이 드러났다. 일본 후쿠시마현 지역 도서관에 잠들어있던 <일청전사 초안>을 찾아낸 나카츠카 교수는 일제가 경복궁을 점령한 까닭은 고종을 포로로 삼아 조선 정부를 일본에 복속시켜, 청일전쟁의 '개전 명분'을 손에 넣고 전쟁 진행 과정에서 최대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경복궁 점령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행한 최초의 무력행사이자 시발점으로 봐야 한다. 이처럼 뼈아픈 역사임에도 이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국의 교과서에서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 점령했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한 줄로 서술될 뿐이다.

을미사변의 현장인 옥호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호루는 본래 경복궁 내 고종의 사적인 거처인 건청궁 내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에 딸린 누각이다. 일본 낭인들은 명성황후을 시해한 후 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안치한 뒤 곧바로 건청궁 동쪽 옆의 녹산에서 그의 시신을 불태웠다. 옥호루를 떠나 버스로 향하며 소풍을 나온 듯한 학생들과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경복궁의 풍경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환한 미소를 내비치는 그들을 보며 이곳이 단순히 아름다운 궁궐이 아니라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임을 알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복궁 옥호루를 보며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경복궁 옥호루를 보며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당신도 대한민국 0.001%가 될 수 있는 월봉산

경복궁을 뒤로 한 채 향한 곳은 충남 천안의 성환읍에 있는 월봉산이었다. 한적한 야산에 기행단이 찾아간 이유는 월봉산이 1894년 7월 29일 이곳에서 일어난 성환 전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첫 육상전투인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은 월봉산에 주둔한 청군을 물리치고 월봉산을 장악했다. 해발 83m의 낮은 산이었음에도 정상에 올라서니 성환읍 일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얕은 야산이지만 주변 일대를 모두 볼 수 있는 만큼 군사학적 지식이 전무한 사람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청군이 월봉산을 진지로 삼은 이유, 일본군이 공격을 강행한 이유다. 안성천을 우회해 월봉산 동북 방향에 도착한 일본군은 월봉산의 청군 진지에 포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의 포탄이 청군 진지에 쏟아져 청군의 동요가 일어나자 포화가 자욱한 틈으로 일본군이 좌우 양방으로 진격했다. 포위된 청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월봉산에서 퇴각했다. 전투가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일본군은 월봉산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해설자인 박맹수 선생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 요인에 대해 "전쟁을 하려고 마음먹고 준비해 온 나라의 군대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군대가 맞붙으면 그 결과는 뻔하다"며 일제가 청일전쟁을 긴밀히 준비해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더불어 일본군의 경우 청군과 달리 서남전쟁 등으로 이미 일본 내 민중을 살육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성환 전투 때문에 월봉산에 온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0.001%도 될까 말까"라고 말했다. 내심 그 말의 뜻에는 우리 땅에서 벌어진 전쟁인 청일전쟁의 현장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도 담겨 있는 듯 했다.

경복궁과 월봉산은 청일전쟁과 관련된 장소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 기행에서 왜 이 두 곳을 방문한 것일까.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동학농민군이 2차봉기를 한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가 반봉건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2차 봉기는 반외세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청일전쟁은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시기 조선 땅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이해에 청일전쟁의 이해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 이상 실패로만 볼 수 없는, 우금티 전투

다음 장소인 충남 공주의 우금티 전적지에는 특별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 일대의 전투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정선원 박사가 해설자의 연락을 받고 우금티 전투를 설명하고자 찾아왔다. 정 선생은 공주 일대에 동학농민군이 '2주일간 3만 명이 전투를 벌였다'는 해설자의 학설을 '22일간 10만 명이 벌였다'고 뒤엎은 인물이다.

그는 일본군과 조선의 기록, 지역민의 구술 등을 종합해 새로운 학설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보낸 후비보병 19대대가 원래 계획에는 공주에 단 하루만 있을 예정이었지만 농민군의 거센 저항에 막혀 공주에서만 22일, 전체적으로는 계획에서 두 달가량 연기돼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본대 합류가 늦어졌다는 점 또한 밝혀냈다. 400m에 달하는 사거리를 가진 신식 스나이더 소총을 지닌 일본군이 구식 화승총을 가진 농민군에게 발이 묶인 것이다. 우금티 전투를 실패한 전투, 좌절된 전투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활로를 연 셈이다.

우금티 전투를 설명하는 정선원 선생
우금티 전투를 설명하는 정선원 선생

우금티 전적지에 조성된 동학혁명군위령탑에서 130년 전 죽어간 이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을 잠시 가졌다. 후손들의 방문에 그들의 넋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위령탑 후면에 기록된 감사문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이름 석 자가 파손된 흔적이 있었다. 80년대에 공주지역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항의의 의미로 파손한 것이라 한다.정 선생의 안내 아래 위령탑 위쪽으로 자그마한 언덕을 넘어 풀숲이 우거진 곳으로 향하니 산세와 지형이 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130년 전 참혹한 현장을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정 선생이 준비한 지도와 함께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접하니 "무르팍으로 내밀어도 나갈 수 있었는데, 주먹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었는데…"라는 동학농민군의 절절한 외침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우금티를 떠나 향한 곳은 송장배미. 공주 웅진동에는 예로부터 용못이라고 불리는 못이 있다. 강물은 말라도 용못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연못으로 이 용못에 붙어 있는 논이 바로 송장배미다. 이곳에서 우금티 전투와 같은 날, 공주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하여 봉황산 밑에 있는 웅진동에 집결한 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에 송장배미 산자락 전투가 벌어졌다. "육박혈전을 벌이며 피나는 싸움을 10여 차례"한 결과 "피는 내를 이루었으며 시체는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연못에 시체를 넣었다는 구전을 통해 당시의 참혹함을 알 수 있다.

송장배미에 이어 동학농민군이 머물렀던 봉정동 주둔지에 갔다. 봉정동은 주민이 농민군이 사용했던 북을 보관했을 정도로 농민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현장이다. 해당 북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해설자를 따라 마을 어귀를 지나 아무런 표식도 없는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니 근처 지형이 훤히 내다보였다. 넓은 들판에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외치는 동학농민군이 빽빽이 모여있었을 광경이 자연스레 상상됐다. 이날 130년 전 전투가 벌어졌던 곳들을 돌아보며 "모름지기 연구란 현장과 함께 해야 한다"는 해설자의 얘기가 단번에 이해가 갔다.

"2%가 아니라 50%입니다" 40년 동학쟁이도 깨달음 얻게 한 한마디

둘째 날 아침, 기행단은 곧바로 1차봉기가 시작된 전북 정읍으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동학혁명모의탑과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는 대뫼마을. 동학혁명모의탑은 이곳 대뫼마을에서 1968년 사발통문이 발견된 후 이러한 사발통문의 발견과 혁명의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사발통문 거사계획에 참여했던 후손들이 1960년대에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건립한 탑이다.

그런데 탑을 유심히 보면 탑 아래의 기단이 조금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다. 과거 정읍시장이 자신의 치적 세우기에 몰두해 후손들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기단을 세우고 맨 위의 기단에는 무궁화와 태극기로 장식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해설자의 말을 빌리면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기념탑마저도 국가의 상징을 넣고야 말겠다는 "국가주의의 극치"다.

모의탑에서 도보로 조금만 걸어가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관이 주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뜻있는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주탑에는 민주화운동 당시 산화한 이한열 열사를 연상케 하는 판화가 새겨져 있고 1~2미터 크기의 32개 보조탑들에는 '밥이 하늘이다'를 상징하는 밥그릇, 무명농민군의 얼굴, 농민들이 무기로 썼던 농기구 등이 새겨져 있다.

다만 90년대 작품이다 보니 처음에는 조형물에 남성들의 모습만 담겨 있었다. 이에 관한 일화로 한일동학기행에서의 얘기를 꺼냈다. 그가 위령탑을 두고 '다 좋은데 2%가 부족하다, 조형물에 여성이 부재하다'고 설명하자 기행단 중 한 사람이 '2% 부족이 아니다. 50%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했고 그때 큰 배움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젊은 여성과 여성 노인의 조형물을 추가로 설치해 그 부족함을 만회하고 있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이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생전 거주했던 전봉준 고택을 방문했다. 해설자는 전봉준은 서당 훈장 출신의 유랑 지식인으로 봐야 한다며 전봉준공초(법정의 심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보면 국제정세 인식이 만국공법(당시의 국제법)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전봉준공초를 살펴보면 전봉준은 "왜 다시 봉기(2차 봉기)했느냐"라는 질문에 "일본이 일반인들에게 일언반구 알리는 일도 없이, 또 격서(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끌고 쳐들어와 왕궁을 점령하고, 임금을 포로로 삼는 국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했다"고 답했다.

또 전봉준은 "그러면 다른 외국에 대해서도 일본과 똑같이 모두 몰아내려 했느냐"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다른 외국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유독 일본만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기 때문에 일본군만 몰아내려 했다"고 답했다. 유랑 지식인으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정보를 들으며 국제정세를 파악한 것이다.

전봉준 고택에 앉아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전봉준 고택에 앉아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새로운 바람길을 열고 다가오는 시대 준비해야

기행 둘째 날인 5월 11일은 지난 2019년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다. 5월 11일로 정한 까닭은 이날이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쳤기 때문이다. 130년 전 농민군의 승기를 느끼고자 기행단도 황토현 전승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토현 전승지에는 1963년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하늘 높이 우뚝 서있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시절 직접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한 기념탑의 비문은 김상기 당시 서울대 명예교수가 썼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졸업논문 또한 <동학과 동학란>이라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했던 김상기의 비문을 두고 박맹수 선생은 "놀라운 명문"이라고 평했다.

그는 비문이 명문인 까닭으로 "전봉준 선생은 동학의 조직망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안아 들여 우리 역사상에 처음 보는 대규모의 민중전선을 이룩하고"라는 내용과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민족전선으로 항전하여 우리의 민족정기를 현양시켜 뒷날 3·1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는 내용을 꼽았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성격을 '민중전선이자 민족전선'으로 명료하게 풀어낸 것이다. 해설자는 민족전선보다 민중전선이 비문의 앞에 위치한 것이 또한 특기할 만하다며 "1960년대 초반에 이런 비문을 쓴 탁견이 놀랍다"고 호평했다.

기념탑에서 다 함께 '새야 새야'를 부른 기행단은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불멸-바람길' 조형물로 이동했다. 기존에 있던 친일 조각가가 만든 조형물 대신 만들어진 해당 조형물은 맨 앞의 전봉준을 필두로 사람 인(人) 모양으로 동학농민군이 뻗어나가는 모습이다. 조형물에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동은 물론, 장애인 농민군까지 그려 성인 남성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타파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기행단도 농민군 조각상들 사이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으며 130년 전 당대의 해방을 위해 싸운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 지금 우리 시대의 새로운 불멸의 바람길을 열고자 다짐했다.

황토현 전적지에서 동학혁명기념관까지는 도보로 이동했다. 이동 도중 동학농민혁명 당시 봉기했던 전국 90개 지역을 상징하는 기념조형물인 '울림의 기둥'을 볼 수 있었다. 기행단은 각자 서로 출신 지역이 적혀 있는 기둥을 찾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기념관은 전시관과 추모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추모관에 모셔진 위패 중 하나는 기행단 참가자의 외고조부였다. 그 인물은 바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1898년에 해월 최시형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한 정암 이종훈 선생이었다. 뜻밖의 사실에 기행단 모두 놀라워하면서 '동학의 DNA가 있다', '꿘수저'라며 부러워했다.

기념관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버스에 오르니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기행단은 먼저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가 만석보를 파괴한 후 세워진 만석보혁파선정비로 향했다. 만석보를 부순 일까지 '선정'으로 칭송해 비석을 세울 일인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적어도 동학농민혁명 이후 정부가 민중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로는 충분했다. 이어 파보비 근처 만석보터로 향했다. 만석보로 상징되는 기득권의 탐욕에 고부의 농민들이 참지 않고 봉기를 일으켜 그것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으로 나아갔듯 우리네들 또한 점점 다가오는 혁명의 시기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둔산의 매서운 눈바람 속 70여 일 최후 항쟁

둘째 날 밤은 전북 전주에서 머물렀다. 자기 직전만 해도 비바람이 쏟아졌지만 다음 날 해가 뜨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전북 완주군의 삼례봉기 역사광장으로 향했다. 쇠스랑을 든 동학농민군의 팔이 웅장하게 뻗어있는 조형물이 기행단을 맞이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공식적으로 나선 것이 바로 1892년 11월 삼례집회 때부터다. 또한 1894년 9월 농민군의 2차 봉기 또한 삼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라도 서해안, 전라우도, 경상우도의 세 길이 맞닿은 삼례는 조선왕조의 교통 요충지로 전주 감영을 점령하기 위한 탁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농민군은 이곳에서 준비를 마치고 서울로 향한 것이다.

광장에는 폐정 개혁 12조가 적힌 비석도 있다. 폐정 개혁 12조는 오지영의 <동학사>에만 있는 사료로 특히 12조의 마지막 조항인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한다"는 대목을 두고 학계 일부에서는 이것이 사회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오지영이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해설자는 그러한 주장에 당시 동학이 민중의 어려움을 극복할 구제의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배항섭의 학설을 소개하고 당대를 살았던 유생 박기현의 일기 등 사료를 종합하면 "표현은 달랐을지언정 토지 개혁에 대한 구상과 열망은 농민군 안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광장을 떠나 도착한 곳은 대둔산. 우금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1895년 2월 중순까지 70여 일간 최후 항쟁을 벌인 곳이다. 관군과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1895년 2월 17일에 본격적인 진압에 나서 농민군을 모두 사살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소년은 농민군 25~26명이 최후까지 저항했으며, 이들은 대개 접주 이상이었고 28~29세쯤 되는 임산부가 총탄에 맞아 죽었으며,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어 암석에 부딪쳐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야말로 참혹한 토벌이었다.

박맹수 선생이 속한 원광대에서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조사한 결과 동학농민군의 주거지로 보이는 집 자리 네 곳, 동굴 2곳, 60평 규모의 방어진지가 발견되었고, 유적지의 중앙에 자리한 집 자리에는 구들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돌이 깔려 있었다. 대둔산 아래에서 유적지에 오를 수 있는 진입로는 세 곳 정도였다. 유적지 암벽에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서 불을 땐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스나이더 소총 53㎜ 탄피가 발굴되었다. 유적지에서 충남도계를 넘어 10분 거리에 장군절터가 있는데, 이곳에 동학농민군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남아있었다. 해설자는 "최후항쟁지인 이곳에만 오면 매번 목이 메인다"면서도 "슬픔도 자산이고 재산이다. 이를 승화하고 발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둔산 최후항쟁지를 조명하기 위해 겨울날 70여 일간 당대의 동학농민군처럼 대둔산에서 머무를 계획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외세의 탄압에 끝까지 맞선 이들의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말하는 혁명의 로망

2박 3일 답사의 마지막은 충남 논산의 연산 전투지였다. 전투지 초입에 있는 연산아문은 연산현의 관아를 출입하던 문루로 130년 전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우금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호서동학군을 주축으로 호남동학군과 합세해 연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후비19대대 소속의 일본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군 상등병 한 명이 사망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처럼 우금티 전투는 결코 최후의 전투가 아니었다. 대둔산에서도, 연산에서도 동학농민군은 전투를 이어나갔다.

연산아문
연산아문

해설자는 당시 연산의 현감 이병제가 일부러 태업을 하며 일본군을 의도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사실이나 유생 이유상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사실 등을 언급하며 "갑오년의 동학농민군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혁명의 로망'을 말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이 보여주는 로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1%의 희미한 가능성에서라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압도적인 무력 열세 속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끝까지 투쟁한 이유는 그들의 투쟁이 곧 1%의 가능성이나마 배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타계한 홍세화 선생은 마지막 칼럼에서 "끝내 냉소와 좌절을 멀리하라"고 했다. 내게는 동학농민혁명과 홍세화 선생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다.

한편 이번 기행에서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대학 강단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기행 참가자들의 각양각색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많은 훌륭한 질문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동학농민군은 육군이에요, 해군이에요, 공군이에요"라는 어린이 참가자의 질문이었다. 단지 엉뚱하고 재치있기에 이 질문을 꼽은 것이 아니다. 해설자는 해당 질문을 듣고 "동학농민군 중 따지자면 해군을 지도한 분도 있었다"며 "진도의 박중진이라는 분"이라고 답했다.

이 박중진이라는 인물이 바로 1995년 홋카이도대학의 한 창고에서 '조선동학수괴'라는 이름으로 '1906년 9월 20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채집'이라는 설명과 함께 100년 만에 발견된 유골의 당사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해설자는 해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홋카이도대학에 유학을 갔고 그 과정에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를 만나 의기투합해 2006년부터 한일동학기행을 꾸려 20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그렇기에 의도하지 않은 어린이의 질문을 통해 나온 박중진이라는 이름에서 무언가 우연을 넘어선 형용할 수 없는 놀라움을 느꼈다. 동학농민혁명은 분명 근대성과 저항, 더 나아가 탈근대성까지 포괄해 한국적 맥락 속에서 그 시원으로 분석할 수 있는 사건임에도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무지했다. 이번 기행을 통해 그 무지함을 벗어날 첫걸음을 떼었다고 생각한다.

글 : 박성우 (플랫폼c 충청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