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기후정의운동과 연대하려면, 각국의 기후정의운동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1997년 식민지로서의 홍콩에서는 영국이 서명한 국제 환경 조약의 요구 사항들을 이행해야 하긴 했지만 자연을 파괴하며 개발이 진행되었다. 홍콩 반환 전 있었던 홍콩의 기후운동 사례들을 통해 홍콩의 기후운동이 어떻 게 진행되어 왔는지 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칭이섬 위험산업 이전 요구
칭이섬(青衣島)은 홍콩섬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섬이다. 도심에서 공항이 있는 란타우섬(爛頭島)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거치는 곳이기도 해서, 홍콩에 비행기로 도착한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섬을 지난다. 원래 어촌 마을이었던 칭이섬은 1960년대에 이르러 위험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980년에는 인구가 7만명 미만이었지만 1995년에는 이주한 사람들로 인해 20만명 이상까지 증가했다.
당시 1982년에 식민 정부에서 작성한 기밀 문서 ‘칭이섬의 잠재적 위험(Tsing Yi hazardous potential)’에 따르면 위험 산업과 주거지로의 모순적인 토지 이용에 대한 위험성은 명백했다. 이런 잠재적으로 위험하고 모순되는 토지 이용에 주민들은 반발했다. 주거 단지인 ‘메이페어 가든(Mayfair Garden)’과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 인화성 석유 제품 및 액화 석유를 보관하는 창고인 Mobil 석유 저장소가 있었다. 1983년 칭이 우려그룹(青衣關注組, Tsing Yi Concern Group)에 이 석유 저장소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기밀 보고서가 유출되었다. 이는 칭이섬 바깥으로 위험 산업의 이전을 요구하는 시위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84년 11월 멕시코 시티에서 발생한 화학 사고와 1984년 12월 유니온 카바이드의 인도 보팔 공장에서 발생한 독가스 누출 사고는 사람들의 우려를 더욱 강화했다. 결국 이 시위는 10년 이상 지속된다.
칭이 우려그룹은 당국과 맞서기 위해 시위 등 급진적인 지역 사회 조직 전략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시위에서 지역 사회 노동자들은 언론의 친시위적인 보도와 함께 시위 단체의 내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홍콩의 2000년 이전 환경운동을 연구한 라이쿽온(黎國安, LAI, Kwok On)에 따르면 칭이섬의 위험산업 이전 요구에는 4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는 이 요구는 또한 시민의 참여가 배제된 식민지 토지 이용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식민지 계획은 주민보다는 기업의 이익에 유리했기 때문에 우려 그룹은 거리에서 청원하거나 뉴스 매체를 통해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해결했다.
두 번째로 홍콩 지역사회 기반 환경 시위의 원형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칭이 우려그룹은 자체 행동 방침을 결정했으며 기존 환경NGO의 지원을 받지도 않았고 승인을 받지도 않았다. 그들은 도시 계획 위원회와 함께 환경 정치에 참여하면서 지역 사회에 스스로 참여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성 환경 단체와 연결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기존 환경NGO들은 그들이 강력한 조직적 무기를 갖고 정부의 토지 이용 계획에 맞서 싸운 점은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이기적인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운동이라며 비판했다.
셋 번째 특징은 기존의 환경NGO들이 지역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으며 글로벌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는 점이다. 환경NGO들은 지역 주민 등 풀뿌리와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 로 칭이섬 운동은 활동가들이 지역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운동을 제도화해왔던 그동안의 고전적인 사례와 유사하다. 칭이섬에서 위험 산업 이전을 요구하면서 일부 칭이 우려그룹 지도자들이 1985, 1988, 1991년 지역위원회 선거에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역 위원회의 제한된 협의 권한으로 인해 식민 정부의 기업주의적 배치에 따라 칭이의 토지 용도가 거의 변경되지 못했다.
이후 혹자는 선거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이 칭이섬에 있었던 운동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칭이 우려그룹이 지역 선거 정치에 개입하면서 내부 긴장과 갈등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갈등이 TYCG에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칭이 우려그룹은 콰이청 및 칭이 지역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칭이 액션그룹(TYAG: Tsing Yi Action Group)이 칭이 우려그룹에서 분리되기도 했다. 칭이 우려그룹은 1989년에는 천안문 광장 시위를 지원하는 ‘중국애국민주운동지지홍콩연맹’의 가맹 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그룹 구성원이 소속된 민주파 정당을 탈퇴하고 친공산당 계역의 ‘Kwai Tsing Community Force’에 합류한 이후 2000년대에는 점점 친중 성향이 되어갔다. 칭이우려그룹 소속의 마지막 구의원이었던 ‘Tsing Yi Estate’의 Simon Chan이 2019년 지역구 선거에서 패배했다.
2013년에 한 차례 칭이섬 유독성 폐기물 소각로의 이동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이는 환경을 위해서도,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아닌, 소각로의 이용빈도가 높지 않아 규모를 축소하기 위함이었다. 이 공장은 1993년에 위탁되었으며 연간 100,000톤의 화학 또는 독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 제공한 수치에 따르면 2012년 기준 그 용량의 10%만이 사용되었다. 현재까지도 칭이섬에는 이 유독성 폐기물 소각로를 포함한 각종 위험산업이 존재하며 주거지도 동시에 존재한다. 1980년대 있었던 칭이섬 주민들의 위험 산업 이전 요구는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기후정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주민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칭이섬에는 아직 위험 산업 공장이 있으며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 주변에 사는 지역 주민들이 있다. 칭이섬에는 이제 이들의 목소리를 기후정의로 묶어내는 기후정의운동이 필요하다.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
다야만은 선전(중국 광동성에 위치한 홍콩의 접경 도시)과 매우 가까운 후이저우 남쪽에 위치해 있다.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大亞灣核電站)는 중국 정부와 CLP(China Light & Power Co. Ltd.;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다.)가 홍콩에서 합작으로 추진했던 사업으로, 광둥성 남부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CLP의 영국 사업가이자 소유주인 로렌스 카두리(Lawrence Kadoorie)는 중국 본토와의 경제적 연결을 강화하고 홍콩의 영국 행정을 보존하기 위한 ‘대전략’의 일환으로 이 발전소를 구상했다.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 또한 이 계획에 열정적이었고 영국 산업부의 지원에 전념했다. 중국의 덩샤오핑 또한 이 계획에 열광했다.
1980년대 논의가 시작된 이 발전소는 1994년 가동을 시작했다. 1980년대 원자력의 위험성 때문에 홍콩의 일부 반원전 운동가들이 나서기도 했다.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은 홍콩과 중국의 상이한 거버넌스 방식에서 나타나는 많은 모순을 반영했다. 이 운동은 홍콩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즉 1986년 홍콩 특별행정구 기본법의 초안 작성 과정에서 문제가 되면서 발전되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핵발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으며 비판적 태도를 강화했다. 보수주의자와 기업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다야만 캠프’와 그들의 반대자, 즉 환경NGO, 사회운동가 및 환경에 민감한 중산층 자유주의자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다야만의 원자력 발전소 찬성론자들은 중국 중심의 보수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애국적, 경제적, 기술적 정당성을 강조하여 환경 시위에 대응했다. 원자력 사고에 대한 우려보다 더 큰 문제는 다야만 캠프와 식민지 행정부 모두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처할 비상 계획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반대 감정이 장기화되고 강화되었다.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은 100만명(당시 홍콩 인구의 5분의1) 이상의 서명을 받아냈다. 이는 발전소 건설에 대한 대중적 분노의 정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107개 지역 사회단체로 구성된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 보류를 위한 공동위원회(Joint Conference for Shelving the Daya Bay Nuclear Plant, 이하 공동위원회)’의 동원력을 반영한다. 공동위원회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대부분의 지역사회 단체와 새로 선출된 정치인(1985년 지구위원회 선거, 1986년 도시 및 지역의회 선거)이 합쳐져 구성되었다. 식민지 정권과 중국 정부에 대한 공동위원회의 정치적 도전은 매우 명백했다.
이 대중적 지지는 중국에서 권위주의적 과학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신뢰 부족’에서도 기인했다. 이 운동은 홍콩에 영향을 미치는 통치 문제를 두고 홍콩 시민세력과 중국 사이의 첫 만남이었다. 이 운동은 광범위한 사회 활동가와 지역 사회 조직 사이에 강력한 동맹을 구축했다. 이 운동은 CLP의 언론과 홍보 캠페인, 그리고 영국 식민 정부와 중국 공산당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명시적인 지지에 더욱 강력하게 반발했다. 중국이 주요 계약에 서명한 이후에는 운동을 조직하기가 전에 비해 어려워졌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은 홍콩인들 사이의 연대감과 공동 위원회의 핵심 지도력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식민 정부와 중국에 대한 그들의 저항적인 행동은 1970년대 홍콩 사회 운동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이 운동은 전문교원연맹, 기독교산업위원회, 사회복지총연맹, 학생연맹 등 일부 노련한 사회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주도됐다. 그러나 FOE(Friend of Earth)나 CA(The Conservancy Association)와 같은 기존 환경NGO들은 충분한 기반 회원, 리더십, 지역사회 조직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운동에 대한 실제 영향력은 강하지 않았다. 1986년 이후 다른 정치적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특히 1988년 직접선거를 위한 정치적 투쟁은 베테랑 사회운동 단체들의 지도력과 조직적 자원을 흐트러뜨렸다.
라이쿽온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다야만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는 네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영국 식민 정부와 중국의 국가 권력에 의해 추진된 이 핵발전소는 비즈니스 부문에서 운동에 반대하는 단단한 헤게모니를 구축했다. 이들은 반대운동 진영의 모든 사회적, 생태학적 주장을 무시했다. 둘째로 홍콩 환경운동의 취약하고 일시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셋째로 대부분의 운동 조직자, 지도자 및 연대자들이 실용적인 접근 방식으로 투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인식하고 운동을 신속하게 중단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지도자와 그 구성원이 공동위원회에서 탈퇴하고 1988년 입법회 직접 선거를 위한 1987년 투쟁과 같은 다른 전장으로 이동하면서 운동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즉 예상되는 결과를 포함한 기회 구조가 환경 시위의 과정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경NGO의 적절한 지역사회 조직 기술과 적절한 리더십이 부족하여 환경 투쟁을 대결 방식으로 연장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는 홍콩 환경 운동의 근본적인 제약을 반영했다.
다야만에는 결국 1호기가 1993년 8월 31일부터, 2호기가 1994년 2월 2일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CLP가 25%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홍콩의 전력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 발전소 생산량 의 약 80%를 구매한다. 2010년 6월 연료 튜브 중 하나에서 누출이 발생했다고 한 방송사가 보도했지만 관계자들은 이를 부인했고 유출 규모가 작아 보고해야 하는 국제 기준에 미달한다고 밝혔다. 2019년에도 한 차례 누출사고가 있었으며 이를 뒤늦게 발표하여 논란이 일었다.
우리는 탈석탄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안전이 담보되어 있지 않은 핵발전을 그 대안으로 둘 수는 없다. 홍콩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두고 있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이를 위해 중국 본토에서 더 많은 원자력 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2020년에 천연 가스는 홍콩 전력 발전에서 거의 절반의 비율을 차지했으며, 석탄에서 24%, 다야만 핵발전소에서 25%, 재생가능한 자원에서 나머지를 충당했다. 현재 선전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역의 지역주민들이 다야만 원자력 발전소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다. 홍콩은 2019년 민주화 운동을 지나면서 중국에서 그들을 분리하고 홍콩 내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젊은 층의 흐름이 있었다. 자본의 횡포와 기후위기는 중국과 홍콩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우리를 덮쳐온다. 국경을 나누지 않고 기후정의의 관점으로 중국 민중과 노동자들과 만나는 운동이 필요하다.
샤로퉁 골프코스
홍콩의 시골 지역 샤로퉁(Sha Lo Tung)은 홍콩의 북동쪽 신계 지역 고층 주거지역과 쇼핑몰들로 가득한 타이포의 번화가로부터 4km도 채 되지 않지만, 몇 없는 길들은 좁고, 숲이 우거진 산비탈을 비스듬히 올라가면 작은 계곡이 흐르는 마을이다. 1970년대 이전 홍콩 시골의 전형적인 마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샤로퉁에는 이제 몇 없는 사람들만 남아있으며 대부분의 집들은 지붕이 무너지고, 벽돌담이 무너져있다.
1979년 신계지 원주민들로부터 마을 토지를 신속하게 모은 후 샤로퉁 개발회사(SLTDC)는 팟신렝(Pat Sin Leng) 컨트리 파크 옆에 9홀 골프 코스, 컨트리 클럽, 주거 개발 건설 제안서를 행정부에 제출했다. SLTDC는 마을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각 집에 대한 보증금 15만 홍콩 달러와 토지에 대한 돈을 지불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구입했다, 개발이 완료되면 각 마을 사람들은 거주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집을 얻는 대가로 보증금을 교환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 정부는 ‘지역 사회를 위한 공공휴양시설’ 명목으로 이 개발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1990년 10월 환경보호부(EPD)는 개발자의 환경 검토 보고서가 부적절하고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이 개발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다. 개발자는 EPD에서 지정한 조건에 따라 포괄적인 환경영향평가를 수행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FOE, CA, GP(Green Piece), WWF(World Wide Fund for Nature), Green Lantau Association and Lamma Island Conservation Society 등 6개 환경 단체는 골프가 엘리트 스포츠이며 대중의 접근이 제한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개발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민간 개발을 위해 지정된 국가 공원 부지를 사용하려는 행정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더많은 환경 단체들이 이 시위에 동참했다. 그들은 개발에 반대하는 약 22,000명의 서명을 얻는 일주일 간의 캠페인을 진행했다.
환경NGO들은 1994년 Chris Patten 주지사에게 개발에 반대 목소리를 내달라고 청원했으며 샤로퉁이 최근 새로 발견된 두 종의 잠자리가 있는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골프장은 계획에서 제외되었으며 고등법원 또한 개발업자가 사로퉁에 160채의 주택을 짓는 것을 중단하도록 강제했다. 2012년에 샤로퉁 개발 회사가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전에는 그들을 반대하던 환경 단체 그린 파워와 협력하여 60,000칸 규모의 지하유골안치소를 계획에 포함시켰다. 10개의 환경 단체들이 이 계획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이 또한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2017년 1월 정책 연설에서 당시 최고 경영자였던 렁춘잉은 개발업자에게 재생 매립지를 제공한다는 잠재적인 진전 방안을 발표했다. 협상이 진행되어 2022년 4월 토지 교환에 대한 최종 조건이 합의되었다. 정부가 가능한 한 빨리 보존 작업을 시작하기를 열망함에 따라, 야생 동물의 핵심 지역을 재활하고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린 파워와의 관리 계약이 시작되었다.
이 샤로퉁 골프코스 반대 캠페인은 법적 조치를 위한 환경NGO들 간의 네트워킹과 서명 캠페인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법원과 중국상용항공기공사(COMAC)으로 넘어가면서 대중을 조직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홍콩의 환경NGO들, 특히 지구의벗(FOE)와 세계자연기금(WWF) 등은 대중을 동원하기보다는 행정적, 법적 한도 안에서만 환경 분쟁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였 다.
사실 샤로퉁 골프장 개발은 지역 토지 이용 분쟁이었다. 그러나 환경 단체가 들어오면서 환경 문제로 변모한 것이다. 그들이 초점을 맞춘 문제는 프로젝트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정부의 토지관리 방식이었다. 샤로퉁에 골프코스가 들어온 것은 결과적으로 막았지만, 이는 사회운동이라기보다는 환경NGO들이 정부와 타협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 지역주민들과 기후정의를 기치로 활동하는 사회운동 단체는 아직 부재하다.
남상와이 개발사업
1995년 람사르 협약에 따라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로 지정된 마이포 습지와 이너 딥 베이 지역에서 캄틴 강 바로 건너편에 남상와이가 있다. 남상와이 자체는 1,540헥타르의 인정 지역 바로 밖에 있지만, 개발 사업이 습지 서식지에 미치는 악영향을 막기 위해 도시계획위원회에 의해 습지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딥베이 생태계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남상 와이는 홍콩에서 가장 큰 연속 갈대밭 중 하나의 본거지다. 갈대와 피쉬폰드는 야생동물에게 중요한 서식지로 멸종위기에 처한 검은얼굴 저어새와 같은 철새들이 쉬고, 먹이를 주고, 둥지를 짓고 번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1991년부터 식민 정부는 불법 토지 이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 계획 조례를 신계지로 확대했다. 이 정책의 확대는 신계의 지주인 원주민들과 기득권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가진 땅을 사업자들에게 임대하여 이익을 얻어왔다. 남상와이 부동산 개발 사업은 새로운 계획 조례의 개발 통제 대상이 되었다. 프로젝트 현장은 마이포 습지 보호구역(Mai Po Marshes Conservation Zone) 내에 있었다. 환경NGO들은 이에 대해 행정부 뿐만 아니라 신계 지역 주민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이 개발이 자연 서식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시계획위원회(TPB)는 헨더슨 부동산개발(Henderson Property Company)의 개발 신청을 세 차례 거부했다.
그러나 회사는 검토를 위해 항소위원회(1992/93년 도시 계획 조례 개정에 따라 설립됨)에 후속 항소를 제기했다. 이는 또한 신계지의 추후 부동산 개발을 위해 선례를 남기기 위함이었다. 항소위원회는 재산권을 이유로 개발 신청을 승인해야 한다고 결론내렸고 식민 정부는 환경NGO의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사법적 검토를 시도했다. 이는 환경NGO의 로비 활동이 식민 정부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대중 조직없이 사법 체계와 식민 행정에 집중되어있었다. 남상와이 사건에서는 식민지 토지 행정에서 환경NGO의 자문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상와이는 개발자들의 개발 제안으로 인해 여전히 개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많은 신청들이 실패했지만, 쑨훙카이 프로퍼티는 2020년 습지 지역 근처의 남상와이에 소유하고 있는 땅에 호텔, 아울렛 몰, 그리고 6개의 아파트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승인을 받았다. 또 습지 완충지대 내에 3층짜리 개별 타운하우스 57동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현재, 정부는 남상와이의 20%를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80%는 개인 소유다. 개인 소유 토지의 대부분은 헨더슨 토지 개발과 푸 가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사인 ‘남상와이 개발 유한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땅을 다시 사들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샤로통 골프코스나 남상와이처럼 환경NGO들이 주도한 운동에서는 풀뿌리 시위 단체와의 괴리를 볼 수 있다. 이들은 지역 사회 문제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는 환경 운동에 대해 합의된 접근 방식을 선택한 중산층 리더십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국외 거주자들과 중산층 전문가들이 단체를 이끌어가며 풀뿌리 급진주의의 정도를 감소시킨다. 따라서 이들이 이끄는 환경 운동은 사회운동과 분리되어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대중 조직이라기 보다는 식민지 행정부에 대한 로비활동과 환경 문제를 법정에 회부하는 것이었다. 다야만 반대 시위를 제외하면 그들은 식민 정권의 정당성에 도전하기 위한 대규모 동원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환경 운동에 대한 그들의 인지적 실천은 정치에는 다소 무관심했지만 법적 절차에는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식민 행정부와 더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었다.
더욱이, 환경NGO의 정치적 무관심은 주택 관련 시위와 앞서 언급한 칭이섬 위험산업 이전 요구와 같은 지역 사회 환경 투쟁 등 다른 사회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영되었다. 그들의 비정치적 입장은 서방의 정치적 급진주의 와는 확연히 달랐고, 홍콩의 호전적인 공동체 저항과도 거리가 멀었다. 1990년 이후 이들 대부분은 기업 부문과 식민 정부의 제도적 기회 구조에 편입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성 환경NGO가 중심이 된 그간의 홍콩 환경 운동은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연대하지 못했으며 환경 의식은 주로 홍콩의 일부 사회 집단에만 국한되어왔다. 홍콩의 마지막 기후 시위가 된 2019년의 시위도 홍콩인들보다는 홍콩에 살고 있는 외국인, 특히 서양인들의 주도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대중이 주도했던 2019년 민주화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음에도 괴리가 존재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사례들 중에도 1980년대 대중 매체에서 보도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다야만 핵발전소 반대운동 뿐이었다. 홍콩의 기후정의 운동은 새롭게 다시 추진되어야 한다. 라마섬(南丫島)의 화력 발전소 노동자들은 현재 화력 발전소를 줄이려는 정부의 의지에 의해 일자리의 불안을 겪고 있으며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높은 홍콩 도심의 빈곤층은 더위와 폭우 등에 기후위기를 피부로 겪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아래로부터의 기후정의를 추진하는 새로운 기후정의 운동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