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모양은 그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약속과 실천으로 만들어진다
2023년 10월 11일
10월 17일은 빈곤철폐의 날
매년 10월 17일은 UN이 정한 빈곤퇴치의 날이다. 세계적으로는 빈곤과 기아 종식을 위한 날로 알려져 있지만 빈곤사회연대는 2004년부터 이날을 ‘빈곤 철폐의 날’로 명명하고 행동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가 빈곤 ‘퇴치’가 아니라, ‘철폐’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구호활동이나 자선이 아니라, 빈곤과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구조를 바꿀 때 빈곤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때 이런 선언이 실천되어야 하는 장소는 가난한 이들이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모든 곳일 것이다. 그래서 1017 빈곤철폐의 날에는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 홈리스, 쪽방 주민과 사회복지노동자, 세입자 등 다양한 목소리가 한데 모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21년, 한국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는 팡파레가 울렸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전 세계에 팔리는 상품이 된 이른바 K-컬쳐는 경제성장의 증거물로 보인다. 한편 40%에 육박하는 노인빈곤율, 끊임없이 반복되는 빈곤층의 자살은 ‘성장의 이면’으로 다뤄진다. 이 그림자는 개인들에게는 공포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난이 심화되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매일 고군분투한다. 투잡, 쓰리잡을 넘어 N잡러로, 부동산과 주식, 비트코인뿐 아니라 상품권을 거래해 차액을 남기는 ‘상테크’에 이르기까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일상을 촘촘히 채운 고군분투에는 끝이 없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살지 않아서 가난해지고 있는 걸까? 가난한 사람들은 충분히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벌 받는 걸까?
2023년 한국에 깊이 밴 빈곤이라는 절망
한국의 전체 빈곤율은 15.3%로 OECD 가입 28개국 가운데 10위다. OECD의 빈곤율 통계에서는 노인 빈곤율과 아동‧청소년 빈곤율을 함께 표기하는데,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약 40%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에 비해 아동청소년가구 빈곤율은 9.8%로 전체 빈곤율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모든 나라의 빈곤율이 이런 모양을 갖고 있진 않다. 노인 빈곤율이 전체 빈곤율이나 아동‧청소년 빈곤율에 비해 낮은 나라도 있고, 세 가지의 빈곤율이 비슷한 수준을 보이는 곳도 있다. 노인 빈곤율이 높다는 것은 ‘일할 수 없을 때 가난에 빠진 확률이 높은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높은 이유는 은퇴 후 임금을 대체할 사회보장제도가 허약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아동‧청소년 빈곤율은 아동‧청소년 가구에 대한 복지제도가 잘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할까? 안타깝게도 전문가들은 빈곤층의 결혼이나 출산이 줄어든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국의 빈곤율 통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절망이 숨어 있다.
빈곤, 성장의 이면 아닌 ‘어떤 성장’의 결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지제도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가난에 빠지더라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가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라는 점은 명백하나, 단지 빈곤층 복지제도 몇 가지를 잘 만드는 것으로 ‘빈곤 없는 사회’가 달성되지는 않는다. 일례로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지만) 한국의 사회복지예산 지출은 꾸준히 증가해왔으며, 이는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한 빈곤율을 꾸준히 떨어뜨려왔다. 그러나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빈곤율은 꾸준히 증가 하는 중이다.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이 커질수록 복지 정책의 효과는 상쇄된다. 복지 확대가 중요하지만 복지의 확대만으로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빈곤과 불평등이 발생하는 경로다. 우리는 왜 가난해지는가? 적절한 소득을 얻을 수 없을 때, 의료나 교육, 교통, 주거와 같은 필수적인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돈이 필요할 때 가난이 가까워진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소득 대비 주거비를 지출한다는 사실이나, 민영화와 같은 조치가 개인들에게 더 많은 비용을 부과하고 빈곤화를 가속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빈곤은 단지 성장의 이면이 아닌, 특정한 성장의 결과다.
빈곤에 맞선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
현대 사회에서 가난이란 단지 물질적 결핍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물질적 결핍은 안정적인 관계나 소속을 획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게으르거나 나태하다는 편견으로, 스스로를 대표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라는 낙인으로, 공론장에서 목소리를 잃는 시민권의 박탈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갖는 총체성의 크기만큼 빈곤은 총체적으로 개인을 위협한다.
이 위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누구 하나 애쓰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다. 몇 달 전 빈곤사회연대로는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빈곤층을 마침내 ‘경제적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이 편지는 성실하게도 자필로 쓰여진 다단계 마케팅 홍보물이었다. 경제적 자유는커녕 곤욕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말에 현혹될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상황에 쳐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해졌다.
가짜 냄새가 폴폴 나는 이런 편지와 달리 매우 합법적이고 입증된 경로도 있다. 수많은 세입자를 공포로 내몬 전세 사기 피해의 이면에는 ‘갭 투자’가 있었다. 집값이 오르고 저금리가 지속되는 동안 1~2천만원 등 적은 돈으로 수억의 집을 매수하고 세입자의 전세금을 레버리지(자본금을 지렛대로 삼아 더 많은 외부 자금을 차입하는 것을 말한다)로 다음 투자를 감행하는 행위는 ‘안 하면 바보’인 것처럼 취급됐다. 금리가 오르고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가장 큰 피해를 떠안게 된 것은 은행도, 건물주도 아닌 세입자들이었다.
슬픈 것은 전세 사기, 깡통전세 피해자 중 20~30대 청년이나 신혼부부가 많은데, 이들의 주택이 경매장에 거래될 때 경매에 나서는 이들도 20~30대가 많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되거나 차라리 선공에 나선다. 물론 그 선공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타인의 상실 위에 부를 쌓을 때마다 연대의 가능성이 소실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전 재산을 잃고 빚을 떠안은 이들의 자리를 새로운 투자처로만 여기게 만드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전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전쟁으로 상승할 주식이 무엇인지 검색하게끔 만드는 것이 빈곤의 진짜 모습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