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정치, 시장주의와 민주당 의존성 버려야 가능하다
2020년 3월 30일
명분으로 활용되는 ‘기후위기’
양이원영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이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비례후보 9번에 이름을 올렸다. 비례후보 결정 사흘 전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식으로 비례연합정당을 만들면 유권자들이 표를 줄까… 민주당 참 실망입니다”라고 쓰고, 이틀 전에는 “저는 이러나 저러나해도 녹색당 찍을 겁니다”라고 쓴 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양이원영 씨는 3월 2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후위기·탈원전을 말할 이가 21대 국회에 없을 거란 위기감에 비하면 위성정당 논란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기후위기’를 변심의 주요 명분으로 거론했다.
비례위성정당 참여에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 건 녹색당도 마찬가지였다. 녹색당은 3월 12일 선거연합정당 참여 당원 총투표를 제안하면서 “21대 총선에서 녹색당이 반드시 국회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로 “절체절명의 기후위기비상 상황에” 녹색당 국회의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런데 총투표 제안은 “녹색당은 정치전략적 목적의 명분 없는 선거연합은 참여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3월 3일 입장문을 완전히 뒤집는 결정이었다. 녹색당에게도 ‘기후위기’가 방향 전환의 명분이었다. 74% 당원의 찬성으로 선거연합판에 나섰던 녹색당은 결국 협상에 실패했다. 그러나 녹색당이 쌓아온 신뢰와 이미지는 엎질러졌고, 양이원영 씨의 행보에 길을 터준 뒤였다.
기후위기가 한국에서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 국제사회와 한국을 들썩이게 만든 기후운동의 목소리는, 기후위기를 방치한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위성정당이 양당제 정치의 적대적 공존을 악화시키지만, 기후나 에너지 전환 문제만큼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일까. 20년 동안 시민사회 명망가 여럿이 범민주당계의 배지를 달았지만, 경제·사회 구조를 별달리 바꾸지 못한 까닭은 잊은 걸까.
기후위기 악화된 30년 역사를 봐야
기후위기 담론은 다가올 미래의 파국적 모습에 대한 경고와 이를 막기 위한 대응의 시급성에 초점을 맞춘다. 1.5℃ 목표를 위해서 우리에게 10년이 남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조급해지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의 경고와 기후위기 강의를 들으면 텀블러 사용하기를 넘어서, 거대한 변화를 위한 실천에 착수해야 한다고 느낀다. 해답을 얻고 싶은 것이 너나없이 솔직한 심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간 우울증에 걸릴 거 같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암울한 감정에 휩싸이는 이유가 시간에 있을까? 기후운동, 기후정치는 시간만의 함수가 아니다. 현재의 권력 관계를 뒤바꾸고 기후정의로 나아가기 위한 세력이 미약한 게 문제다. 과제는 거대한데 우리 힘이 부족한 게 핵심이다. 이게 한두 명이 국회 안으로 들어간다고 풀릴까. 아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그동안 기후변화가 해결되기는커녕 기후위기로 악화된 까닭에 초점을 맞춰보자. 지난 3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기후변화가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가 된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였다. 직접적이고 빠른 온실가스 감축 방법은 진지하게 검토되지 못했다. 기업과 강대국의 이익을 거스르는 내용은 회의 안건조차 될 수 없었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의 승리가 선언된 시대였다. 역사의 비극은 곧 지구의 비극이었다. 유엔에서 논의되고 허용된 온실가스 감축 방안은 배출권 거래제도나 탄소 상쇄 등 시장주의 정책들이었다. 유럽연합과 기업들은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공기를 사고파는 허 구의 시장을 만드는 데 관심이 더 많았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 상황에서 기후변화를 이용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녹색성장 식 접근이 더욱 강화됐다. 에너지 전환 산업, 녹색일자리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커졌지만,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또 허비되었다.
지난날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통해 최근에는 기업 권력을 강화하는 시장주의적 기후 정책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업 활동의 자유와 수익성만 추구하는 시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각국 정부는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대로 기후변화 문제를 활용하는 데 그쳤다. 기존 방식으론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새로운 기후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에서는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기후정의운동이 성장하고 있다.
“어떻게든”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
진짜 변화를 만들려면 기존의 정치·경제 기득권과 체제를 혁파하고 대안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득 권력이 순순히 물러서는 경우는 역사에 없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 인류와 지구를 착취해온 정치·경제 구조가 똬리 틀고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이를 떠받치던 권력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IMF가 불평등에 주목하고 재정확장 정책을 권고하고, 톤당 75달러의 높은 탄소세를 권유한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 요소인 동시에 기회로 다루어진다. 배출권 거래제이든 탄소세이든 시장을 바로 잡을 가격 신호를 만들고, 이를 통해 시장을 ‘현실화’, ‘정상화’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무한한 성장, 경제적 권력이라는 진짜 문제는 여전히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위성정당 사태에 보인 정치권력의 뻔뻔함과 강고함을 보라.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기 위한 수년 동안의 사회운동 과정, 정치적 갈등과 협상의 시간들을 완전히 흐트러뜨리고 3개월 동안 진행된 일들이다. 경제권력도 다르지 않다. 전경련은 코로나19 사태를 기회로 삼아 주52시간 노동 예외, 대형마트 휴일영업 허용, 최소 2년간 규제 유예를 요구하고 나섰다. 기후운동이 맞서야 하는 후안무치한 권력이 바로 이들이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질수록, 사회변화의 규모와 심도가 크고 깊을수록 이들은 우리보다 더 큰 힘을 이용해 맞설 것이다. 물론 교섭과 타협의 순간은 불가피하게 온다. 그러나 협상의 기본 체력은 우리 힘에 달려있다. 기후운동이 성장하고, 이를 지지하는 기후정치 세력이 강해질 때 그 힘에 근거해서 양보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기후정치는 시간표가 정해져있고, 이를 맞추기 위해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문제의 원인인 기존 시스템을 이용해서 기후국회를 만들 수 있다는 궤변은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다.
위성정당 참여 논란은 하나의 증상
위성정당이 진보정치의 자중지란을 만든 이유는 뭘까. 환경운동, 기후정치가 대혼란을 겪는 까닭은 뭘까. 개인의 돌출 행동이나, 다급함에서 비롯된 집단적 착시에서 원인을 찾는 건 잘못된 진단이다. 우리가 수년 동안 시장주의 논리에 물들고 민주당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해온 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 필자는 많은 환경단체가 전기요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전기요금 인상이 전력 사용을 줄이고 효율화할 수 있는 열쇠라는 주장이었다. 낮은 전기요금이 에너지 사용의 전기화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해법을 전기요금 인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낮은 전기요금은 정부가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유지시키고, 에너지 민영화의 부정적 결과를 감추고,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현실이다. 이를 위해 석탄과 원자력이 선택되었다. 이런 문제는 그대로 두고 연료원만 바꾸어서 전기요금을 인상하자는 게 가능하고, 바람직할까. 가격 ‘정상화’가 경제 주체의 왜곡된 행위 동기를 교정하고, 시장 경쟁으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신자유주의의 도그마다. 그런 논리에 따라 공공 재화와 서비스가 민영화되고 상품화되었다. 사회운동이라면 문제의 원인부터 접근해야 한다. 대기업에 특혜를 주는 정책을 바꾸고, 에너지 민영화를 중단하고 재생에너지에 공적으로 투자하고, 불평등과 빈곤을 바로잡는 게 필요하다. 그 과정 속에서 에너지원을 바꾸고 전기요금을 재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과관계를 뒤집어 놓고는 부지불식간에 시장주의적 접근법을 택한 것은 아닐까.
또한 기후위기 비상행동 활동 속에서 만난 어떤 단체는 재생에너지 시설의 규제 완화라는 산업계의 요구를 대변했다. 서울시나 지자체의 위탁업무를 중심으로 사업을 꾸리는 반민반관 성격의 단체가 10여 년 동안 전국 곳곳에 자리 잡았다. 대부분 민주당 지자체장이 집권한 곳들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재단이 지원하는 프로젝트 수주가 많아지면서, 펀딩 유치가 중견활동가의 필수 능력이 되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다. 전적으로 외국 재단의 돈에 의존하는 에너지 단체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최근 급성장한 몇몇 국제환경단체는 국내에서 막대한 자금을 모금하고, 해외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격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간다. 그런데 어떤 사업은 파트너가 대기업이나 유럽, 미국의 경제단체다.
한국의 기후운동과 기후정치는 이런 환경운동 저변의 조류 변화 속에서 형성 중이다. 기후운동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기존 주체의 변화를 기대하지만, 아직 운동의 구조와 정치·경제적 기반은 바뀌지 않았다. 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환경운동가나 녹색당이 휩쓸린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문제가 증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혼선을 겪은 한국의 그린뉴딜
한국에서 그린뉴딜이 논의되던 과정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엿보였다. 초창기에 한국에서 그린뉴딜을 주도적으로 제기한 사람들은 민주당, 정의당, 녹색당을 아우르는 ‘그린뉴딜 그룹’을 만들고 싶어 했다. 2019년 영미에서 부상한 급진적 그린뉴딜과 10년 전 녹색성장식 그린뉴딜의 커다란 차이가 구별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일까, 최근 세 당이 발표한 그린뉴딜 정책은 차이점이 있지만 어떤 각도에서 평가하면 공통점이 두드러진다.
민주당의 그린뉴딜 정책은 정의당이나 녹색당의 것과 달리 석탄발전의 종식 연도나 탄소배출 제로 시점을 명시하지 않았다고 비판 받았다. 그러나 2030년 탈석탄과 2050년 온실가스 배출제로를 목표로 발표한 정의당이나 녹색당이라고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를 현실화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이를 추진할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는 도정에 방점을 두는지도 의문이다. 정의로운 전환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잔여적인 정책으로 취급되곤 한다.
반면 그린뉴딜의 주요 재원으로 탄소세를 거론한다는 점은 세 당이 공히 같다. 온실가스 배출량에 따라 부과되는 탄소세를 통해서 경제의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탄소세 옹호자들의 논지다. 탄소세는 가격 정상화를 통한 시장 교정이라는 주류 경제학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나 탄소세 부과가 경제 전체의 탈탄소화로 이어지리라는 기대는 많은 가정 속에서나 가능하다. 경제 권력은 그 과정에 다양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지 않도록 디테일을 조정한다. 탄소세는 기업이나 일반 시민에게 부과된다. 하지만 기업 부담하는 탄소세의 대부분은 최종 상품이나 에너지의 가격으로 시민들에게 전가된다. 또한 기업들은 탄소세 신설을 이유로 기존에 부담하던 법인세 등의 탕감을 요구한다.
그런데 정의당이나 녹색당마저 이런 역진적 성격과 주류 경제학적 전제들 때문에 세계의 기후정의운동으로부터 탄소세가 비판받는다는 점을 무시했다. 외려 탄소세 도입 의지가 약하다고 민주당을 질책하는 장면을 보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노동자와 시민에게 전가되는 재원 마련 방식, 시장 정상화를 통한 온실가스 배출 교정이라는 시장주의적 기후 정책의 핵심 교리를 무의식적으로 공유하지 않았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가장 유력한 길
혼란한 현 상황을 기후운동과 기후정치의 전략을 점검하고 한발 딛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면 좋겠다. 무엇보다 시장주의적 기후정책, 재생에너지 산업계의 목소리, 민영화·자유화가 전제된 유럽 에너지 시장에 꽂혔던 시선을 점검해보는 게 어떨까. 정치권과 거버넌스 기구, 언론을 지렛대 삼아 영향력을 키우던 관행에서 벗어나, 우리가 딛고 설 기반을 강화하는 데 더 노력하면 어떨까.
나아가 시민사회가 균질적인 덩어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 이념, 정치세력이 뒤엉킨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인정하자. 적어도 “좋은 게 좋은 거다”, “우리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법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자. 정말 기후위기에 걸맞은 기후운동을 형성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대안으로 내세워야 하는지 논쟁도 비판도 꺼리지 않으면서 다양한 토론을 해보자.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선언의 선명성’과 ‘목표 달성 기간’ 중심의 접근법을 넘어서 기후운동의 핵심 과제를 재정립하면 좋겠다. 거대 정당들은 실행 의지나 구체 계획이 없으면서도 선거 때면 유불리에 따라 약속을 남발한다. 기후위기 비상사태 선언, 국회의 특별위원회 구성, 그린뉴딜 정책 같은 ‘말 껍데기’는 손쉽게 포섭될 위험이 크다. 디테일을 만든다고 우려가 불식되는 건 아니다. 사회적 압력이 조금 더 커지면 민주당이나 위성정 당에 참여한 인사들은 여기에 모두 동의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레타 툰베리의 말처럼 “진짜 위험은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뭔가 ‘하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안 하거나, 더 나쁜 일을 한다. 정치적 행위와 담론에는 특허권이 없고, 또한 조변석개하기 십상이다. 위성정당 사태에서 그들이 보여준 뻔뻔함과 궤변을 생각해보라.
그린뉴딜을 포함하여 진보정당과 기후운동의 대안 정책들, 담론을 새로 짜고 가다듬어 보자. 수치와 목표가 의미가 있으려면, 실행방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세력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세계적인 기후정의운동의 흐름을 파악하고 우리가 거기에 주목하는 까닭을 다시 점검하자. 코로나19로 인한 사회·경제 위기에 맞서면서 불평등·노동권·기후위기 등 기존 문제를 함께 다룰 방법을 고민하자. 정책을 전문가 몇 명이 뚝딱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책 과정 자체를 민주화하고 운동의 세력화 과정으로 만들자.
우리에겐 민주당과 위성정당을 정당화하는 궤변에 놀아날 여유가 없다. 기후위기 시대는 기존의 정치·경제 권력과 대결할 것을 요구한다. 대중운동과 대안세력 만들기라는 가장 유력한 길을 함께 가자.
글 : 구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