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정상’이라는 편협한 기준 대신, 서로의 복잡함을 마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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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서평

2024년 2월 9일

[활동]책읽기모임서평, 책읽기모임, 퀴어, 성소수자, 장애인

2023년 12월 마지막 책읽기모임에서는 『망명과 자긍심』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이 책은 저자인 일라이 클레어의 독특한 위치성을 바탕으로, 연대를 통한 다중 쟁점 정치, 교차성 정치를 말한다.

『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현실문화)은 1999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책으로, 뇌병변 장애인이자 트랜스젠더 퀴어, 그리고 시골 백인 노동계급 출신의 저자 일라이 클레어가 자신의 삶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억압의 복잡성을 고찰하고, 모두를 단일한 쟁점 속에 뭉개는 것이 아닌 다양한 쟁점의 사유와 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관점이 ‘백인 중심적 시각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등장한 유색인 페미니즘의 이론과 분석틀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며, 퀴어-장애-시골 노동자가 각각 관련 없는 단어들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낸다. 저자가 책을 썼던 당시는 시골의 벌목노동자와 환경운동가의 대립, 분리주의 페미니스트 등 서로의 억압이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이에 “우리 삶과 이 세상의 복잡다단함을 반영하는 정치를 구축하는 일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며 단일 쟁점 정치와 전략을 버리고 다중 쟁점 정치를 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의 부제는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이다. 책을 처음 봤던 때는 약 2년 전인 2021년으로, 그때의 나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나를 설명할 언어가 부족했고, 퀴어와 장애의 연관성도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2년 뒤인 2023년 겨울, 책읽기모임에서 이 책을 선정하고 읽으면서 이것이 점점 내 얘기라는 걸, 나아가서 모두의 이야기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고, 책의 감상을 나누고 싶어졌다. 일라이 클레어가 말하는 ‘복잡함’의 넓고 깊은 ‘집’으로 들어가보자.

리바 레러(Riva Lehrer)가 그린 일라이 클레어의 초상화
리바 레러(Riva Lehrer)가 그린 일라이 클레어의 초상화

산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 산은 모두에게 가파르고 위험하니까

책의 도입부는 산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산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 사회에 비유된다. 모든 사람들이 산을 오르려고 애쓰지만 꼭대기의 특권층은 용역 깡패를 보내고 위장 폭탄을 설치해 사회 주변부의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게으르고 나약하고 추하기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소리 지른다. 우리는 오르기를 그만두고 우리가 있는 낮은 곳에 새 집을 짓는다.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로서 존재해도 괜찮게 느껴지는 곳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저자 역시 산을 오르는 걸 희망했다. 취미로서도 비유적으로도 그는 등산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욕망 속엔 쓰라린 기억이 있다. 산을 오르고 싶은 욕망, ‘정상인’이 되고픈 욕망, ‘슈퍼장애인’이 되어 장애를 ‘극복’하고픈 욕망, 그러나 산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취미로서의 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유로서의 산, 둘 다 오르지 못하는 실망감은 그의 몸에서 온다. 뇌병변 장애인으로서 그의 몸이 가진 ‘타고난’ 불편함과, 비장애중심적 사회에서 받은 차별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비장애중심적 사회에서 뇌병변 장애인으로 살면서 겪은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한계와 신체적 한계로 실패한 것들 모두 저자의 몸에 중심이 놓인다. 이것은 그를 더 좌절하게 만든다.

그는 산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집을 ‘피부 아래’, 몸에서 찾는다. 몸과 정신을 분리해 ‘이성’을 중시해온 남성중심적 철학과 다르게, 저자는 생명의 원천인 몸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정의한다. 퀴어, 불구, 프릭, 레드넥이라는 여러 개의 몸은 그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몸은 서로를 따라다니는 동시에 외부로부터 도둑맞기도 한다. 도둑맞는다는 것은 몸에 대한 주권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성적 학대로부터 도둑맞은 몸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시골의 나무 숲 속에서 돌을 데우던 몸. 사회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정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톰보이의 몸. 지진아, 원숭이, 모자란 애라고 불리며 비장애중심적 사회에서 도둑맞은 뇌병변 장애인의 몸. 그가 나고 자란 시골 노동계급 공동체의 문화가 뼛속 깊이 새겨진 몸. 우리의 정체성과 자아를 형성하는 ‘집으로서의 몸’은 결코 단일하지 않고, 몸 속에는 우리가 자라온 장소와 공동체, 문화가 새겨져 있다. 또한 우리의 몸은 ‘정상성’이라는 권력에게 도둑맞고, 거짓과 독을 주입받고, 억지로 떼어내질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고 애도함으로써 되찾을 수 있기도 하다. 산꼭대기의 사람들에게 도둑맞은 몸을 우리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도둑들과, 거짓말과 싸우고 협상하면서 재구성해왔을까. ‘망명’과 ‘자긍심’은 우리의 몸을 상실하고 보존하고 되찾아왔던 역사를 말하는 단어다. 저자가 자신의 집으로부터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부 장소 | 시골 노동계급의 삶

개벌은 개발을 목적으로 지역 삼림의 나무를 일시에 모두 베어내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개벌된 2차림, 즉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인간이 다시 인공적으로 숲을 심은 시스키유 국유림에서 자랐다. 나무를 베어 목재로 만들고 나무 농장과 연어 양식장을 만들던 마을, 목재 산업과 양식업에 의존하던 사회에서 자란 그는 이에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시에 오면서 다른 배움을 통해 개벌의 ‘추한 면’에 대해 깨닫게 되고, 나무와 연어와 생태계 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처럼 자연을 낭만화하는 방식이 아닌, 생산자이자 소비자이자 지구에서 공존하는 생명체로서 자연과의 관계를 성찰한다. 저자가 어려움을 느끼는 지점은, 벌목으로 먹고 살던 시골 2차림이라는 장소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해온 백인들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는 정치관 사이의 분열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집’이 나무와 연어와 올빼미들에겐 전쟁터였다는 사실, 둘 사이의 간극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벌목노동자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려져야 하는가? 저자의 또 다른 정체성인 ‘레드넥’에 대해 말해보자.‘레드넥’은 노동자들이 낮 내내 일하고 목이 햇볕에 타서 시뻘개진 목을 말하는 단어로, 교육받지 못하고 불합리한 의견을 고집하는 시골 하층계급 백인 남성을 비하하는 말로 쓰인다. 도시의 환경운동가들은 이들을 기업의 말을 잘 듣는 수동적 주체로 묘사하거나, 기업과 함께 자연파괴에 공모한 자연의 적으로 형상화하곤 한다. 하지만 벌목노동자들이 ‘점박이 올빼미’에 분노하는 배경에는 노동자들의 일자리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는 환경운동가들, 그리고 농임어업의 대기업이 주는 쥐꼬리만한 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시골 환경이 있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해온 백인들의 역사는, 거대 목재기업이라는 자본과 그들의 이윤 축적을 보장해주는 국가(산림청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저자는 도시의 편협한 시각을 비판하며, 자본주의를 사람과 지구보다 이익을 더 앞세우지 않는 체제로 대체해야 하고, 목재 기업에게 착취 받는 시골 벌목노동자들과의 연대가 없으면 이는 불가능하다고 설득한다.

저자는 학대와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도시에서 페미니즘과 다이크 부치 공동체를 접해 퀴어로서의 ‘집’이자 몸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는 퀴어 공동체 속에서도 여전히 ‘퀴어’하다고 느낀다. 퀴어 정체성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와 일정 정도의 배타성이 가능한 중산층 공동체에 좀 더 익숙하지만, 저자는 익명성이 결여된 시골 노동계급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맞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는 학대와 혐오로부터의 안전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누릴 수 없는 인프라를 얻기 위해 도시로 왔다. 퀴어로 존재하기 위해, 학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급을 탈피하기 위해 ‘망명‘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시골 노동계급 문화의 가치를 포기해야 했다. 망명은 상실의 의미뿐만 아니라 뒤에 남기고 온 애정 어린 소속감과 연결감의 의미도 품는다. 그는 이웃과의 친밀성, 자급자족에 대한 신뢰, 시골의 삶을 대하는 ’느린‘ 태도를 그리워한다. 저자는 “’지방이란 뿌리‘와 ’도시에서 퀴어로 살기‘ 둘 중 하나를 강요받는, 하나의 배제를 또 다른 배제로 교환해야 하는 상황이 싫다”며, 각자의 퀴어다움을 모두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길 바란다고 토로한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망명‘이 아닌 집을 되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2부 몸 | 자기혐오와 자긍심 사이에서

우리는 살기 위해 도둑맞은 집으로부터 복잡한 심정으로 망명하기도, 도둑들이 새긴‘몸’에 대한 수치심과 맞서기 위해 자긍심을 끌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상황과 단어에 대해서 자긍심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저자는 퀴어와 불구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자긍심을 갖지만, 프릭(freak, 우리말로 병신이라는 단어로 의역할 수 있을 것 같다)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프릭을 저자가 자긍심의 언어로 전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어에 얽힌 장애인의 역사, 그리고 자기혐오와 연관이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유행했던 ‘프릭쇼’는 ‘정상인’과 장애인 간 ‘차이’를 극대화해 ‘시골뜨기’인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는 안도감을 줌으로써 수익을 얻었다. 자신의 타자성을 이용해 관리자와 함께 수익을 최대한 벌어들이는 소수의 ‘잘 나가는’ 프릭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프릭쇼에서 비인간 취급을 당하며 착취당했다. 요컨대 프릭쇼는 인종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가 얽혀 유색인과 장애인에 대한 ‘문명화’와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일조했다. 프릭쇼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들으면서 쇠퇴하고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이 부상하지만, 이것은 장애를 치료해야 할 ‘문제’로서 병리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장애인들에 대한 ‘프릭’화, 즉 차별의 시선과 범주화는 여전했는데, 병원에서 장애는 의료적 연구 대상으로서 ‘관찰’되었다. 이러한 프릭의 역사와 ‘지진아’로서 모욕받던 경험에서 오는 자기혐오는 저자가 ‘프릭’을 자긍심의 언어로 전유하기 망설이게 만든다. 소수자가 자신의 차별적 경험을 딛고 저항으로 나아가려면 자긍심도 필요하지만, 슬픔과 분노가 섞인 과거를 맥락화하고 애도하기도 해야 한다. 증언과 자긍심은 개개인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 협력하거나, 따로 작동하기도 한다. 수치심과 고립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공동체와 자긍심을 창출하는가? 우리는 ‘퀴어’라는 단어 속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퀴어’는 정상에서 벗어난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고, 여러 성소수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때문이다.

코믹 광대 듀오 플렘과 브로크에 관한 프릭쇼 포스터, 1890년
코믹 광대 듀오 플렘과 브로크에 관한 프릭쇼 포스터, 1890년

장애인이 자기혐오하는 현실에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기여한다. 비장애중심적 사회가 재현하는 장애인의 이미지는 ‘극복’하고 치료되어야 하는 대상이거나, 능력이 부재하고 자기결정권이 없는 ‘아이’로 그려진다. 이는 장애를 ‘두렵고 혐오스러운 인간 상태’로, ‘영원한 수동성의 상태’에 가두며,장애인은 의료적으로 대상화되고 이 과정에서 무성화된다. 저자는 논쟁적이었던 장애 공동체 잡지 『뉴 모빌리티』 표지를 통해 장애인의 재현과 자기 결정권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표지엔 이성애자 여성 장애인 모델이 ‘섹시한’ 의상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있다. 저자는 남성의 성적 대상화 시각을 답습했다는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표지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장애인 활동가 모두를 비판하며 표지에 대해서 양가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표지는 장애인을 성적 주체로 대상화함으로써 장애인이 ‘무성화’된 존재로 취급받는 걸 폭로했지만 동시에 이성애자 남성의 일방적 시각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 대상화와 스스로 섹슈얼리티를 정의하고 표현하는 성적 주체가 되는 경계의 복잡함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억압과 해방 역시단편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장애인의 재현은 수많은 대안 이미지 생산을 통해 강요된 의료적 대상화와 무성화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기 결정권은 성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정의할 권리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피부 아래 수많은 정체성들에 대해

산과 도시, 시스키유 국유림, 프릭쇼의 역사까지 훑고 돌아 다시 저자의 ‘몸’ 속으로 왔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에서 산이 아닌 내 피부 아래에 ‘집’이 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몸’의 감각은 자연에서 주운 돌을 데우는 체온이었고, 그는 몸을 버리고 나무와 강과 연어와 함께 은둔자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소년도 소녀도 아니’라는 마음속 깊은 곳의 속삭임을 저자는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피부 아래, 마음속 깊은 곳의 ‘집’에 다다를 수 있을까? 어떻게 피부 아래의 체온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저자를 어릴 때부터 학대하면서 ‘소녀’됨이 뭔지 몸에 각인시켰고, 아동학대를 당한 경험으로 저자는 가부장제와 성별 규범을, 자신이 ‘퀴어’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그는 아동학대가 사회의 권력 구조를 가르쳐주는 사회적 통제 수단 중 하나라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학대의 경험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낀’ 자신의 성별을 상기한다. 우리는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계급차별적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내부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몸’을 구축해간다. 다른 말로 우리는 ‘거짓말과 도둑들과 협상해왔다.’ 저자는 퀴어 공동체를 접하면서 퀴어로서의 자신을 인지하고, 불구들을 만나며 뇌병변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페미니즘의 분석 틀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몸을 되찾았다. 퀴어, 불구, 가난한 이들. 정상에서 벗어난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거짓말을 부순다.

그러나 되찾은 몸은 부서지기 전의 몸과는 다르다. 되찾은 몸에 대해 항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항할 수 있는 언어와 동지를 얻었지만 여전히 자기혐오가 내재된 양면성은 몸에 얽힌 역사와 교차하는 정체성들의 복잡함을, 명확함 대신 모호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 모순이, 서로를 나타내는 수많은 이름들이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있다.

“도둑맞은 몸, 되찾은 몸, 자신과 세상을 아는 몸, 돌과 그 돌을 데우는 체온. 내 몸은 결코 단일한 적이 없었다. 장애는 젠더를 향해 으르렁댄다. 계급은 인종을 둘러싼다. 섹슈얼리티는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이게 피부 아래 다다르는 방법이다.”

굴레가 집이 되려면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마음이 아렸다. 트랜스젠더퀴어 부치로서 저자의 경험과 개인적으로 느끼는 능력의 한계에 대해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여서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책을 읽고 또 하나의 나를 설명할 언어를 찾은 것 같아서 기뻤다. 나는 책에 대한 평가보단, 저자의 언어를 빌려 나의 몸을 말하고 싶다.

저자는 몸을 ‘집’으로 비유하지만, 나는 ‘몸’을 지금까지 굴레로서 생각해왔다. 굴렁쇠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내가 달고 있는 ‘여성’의 상징인 가슴은 굴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부치들은 다 말린 어깨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모든 부치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일단 나는 말린 어깨다. 가슴을 숨기려 어깨를 최대한 말고 가슴을 안으로 넣는다. 등을 굽히면 남자아이, 등을 펴면 여자다. 등이 굽으면서 거북목도 얻게 되었다. 왜소한 몸집에 굽은 등, 소심한 성격은 괴롭히기 좋은 놈의 표본이다. 어릴 적 또래 남자 ‘일진’ 중학생들에게 장애인이란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장애인이라는 말 속엔 비인간화와 무성화가 포함되어 있다.

커밍아웃한 사람들에게 대외적으로는 나를 부치라고 말하는데, 좀 더 진지하게 들어가면 ‘레즈비언’보다는 남성성이 섞인 무언가-라고 느낀다. 나 역시 페미니즘과 여러 해방 이론을 통해 나를 설명할 언어를 습득하고, 나를 나로서 바라봐주는 주변인들, 그리고 내 몸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남으로써 과거에 입은 상처가 아물었다. 그리고 레즈비언들이 부치를 많이 아껴주는(?) 덕분에, 부치 자긍심으로 지금까지 위축되었던 어깨가 어느 정도 올라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몸은 분열적이고, 성별불쾌감이 존재하며, 자아와 신체의 불화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몸은 항상 그랬듯이 여러 의미에서 나에게 족쇄였다. 저자가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산을 오르고 싶었다면, 나는 자아와 몸을 잊기 위해 바다라는 ‘벽장’으로 도피해수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다는 나에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광활한 곳이기보단, 내가 공상으로 침잠하고 고립되는 장소였다. 내 인지부조화에서 도피하기 위해 나는 무의식과 상상의 바다로 도망친다. 그러나 나는 수영할 줄 모른다. 끝없이 가라앉아 상상의 바다 밑바닥과 현실이라는 수면의 괴리에서, 호흡하러 위로 올라가야 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몸을 가진 한, 계속해서 바다에서 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삶을 빠져나갈 수 없는 고통스러운 굴레가 아닌 집으로서 생각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저자는 “몸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 장소와 공동체와 문화가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둑맞고 억지로 떼어내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 몸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집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의 삶이 가부장적, 비장애중심적, 자본주의적, 인종주의적 사회에서 각자 억압에 대해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다중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일라이 클레어의 ‘다중 쟁점 정치’는 억압의 축을 나누는 것이 아닌, 오히려 ‘범주’의 구분이 모순투성이고 서로 물 가르듯 뗄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내 부치로서의 경험은 내가 ‘장애인’으로 여겨졌던 경험과 뗄 수 없다.

『망명과 자긍심』에 대한 책읽기모임을 했을 때,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책의 내용에 공감하고 각자의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지방에서 성소수자로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방민에 대한 도시의 혐오 정서, 지방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로 혜택받는 자본과 대도시,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 그리고 지방민과 성소수자로서의 ‘망명’에 대해. 서로가 각자의 억압에 대한 경험을 얘기하고 공감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차이’의 연대가 형성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로 찌그러뜨리는 동일성의 논리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차이들’과 공존할 때 해방에 가까워진다. 산에서 내려오고, 바다에서 나와 서로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우리가 발 딛을 수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도둑맞은 몸을 애도하자. 노동자와, 농민과, 수많은 젠더와, 불구와, 다양한 몸들의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자. 수많은 몸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집으로 가는 길이 시작될 것이다.

『망명과 자긍심』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플랫폼c 책읽기모임의 모습.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10여 명이 함께 했다.
『망명과 자긍심』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플랫폼c 책읽기모임의 모습.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10여 명이 함께 했다.

글 : 현빈

교열 : 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