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사람 | 대만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이끌어온 베테랑 활동가 치자웨이

치자웨이는 대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선구자이자 베테랑 운동가다. 이 글은 치자웨이를 한 사람의 영웅으로 주목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자 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그의 활동, 대만의 동성혼 합법화 운동의 흐름을 요약하고, 대만 사회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치자웨이의 성소수자 운동

치자웨이(祁家威, Chi Chia-wei, Qí Jiāwēi, 1958~)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다. 그는 28살이던 1986년, 기자들로 가득 찬 타이베이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국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혔다. 한 사람의 목소리로는 주목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대만중앙통신사(中央通訊社, Taiwan’s Central News Agency)의 우편함을 통해 한 명씩 연락을 취하는 방식으로 기자들을 모았다. 이로써 그는 대만에서 공식 커밍아웃을 한 첫 번째 게이가 되었다.

1987년 치자웨이가 개최한 기자회견장에서 참가자들과 기자들에게 발언 중인 치자웨이

계엄령 해제 1년 전인 1986년 대만은 국민당 일당 독재체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치자웨이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문제적인 인물로 여겨져, 6개월이 넘는 옥고를 치렀다. 그에 따르면 당시 감옥에는 자신을 포함한 4명이 각각 갇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정치범으로서 이후 대만 총통이 된 천수이볜도 있었다. 다른 세 수감자의 부인이 음식을 준비해 치자웨이에게도 몫을 나누어 주었고, 덕분에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고 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치 씨는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제기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대만에서는 LGBT의 결혼할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을 ‘혼인평권(婚姻平權, Marriage equality) 운동’이라고 부른다.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같은 해 치 씨는 파트너와 함께 타이베이 지방법원에 혼인 증명서를 제출했다. 증명서는 승인되지 않았다. 1986년 대만 법무부는 “혼인관계는 단순히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인적자원을 제공하는 기능을 갖추고, 국가와 사회의 존속과 발전에 대해 (…), 동성 간의 혼인은 (…) 사회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에 반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정과 전통문화에도 어울리지 않기에 합법화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담긴 것은 물론, 개인을 단순한 국가의 구성 요소로 치부한 결과였다.

그러나 치 씨는 1998년에도 지방법원에 혼인을 인정하라는 행정소송을 걸었고, 사회에서 배제된 성소수자들을 찾아다니며 권리 운동을 이어갔다.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캐릭터 코스프레를 하거나 콘돔으로 만든 파격적인 의상을 입기도 했다. 언론은 이 생경한 모습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성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가던 사람들은 치 씨의 활동을 지켜보며 용기를 얻었다. 치 씨는 LGBT 상담 핫라인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개인 연락처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상담을 받았다. 그는 아직도 1994년 동반 자살을 기도하기 전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두 명의 어린 학생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2년 2월 에이즈 캠페인 1인 시위 중인 치자웨이

국가안전국(國家安全局, National Security Bureau)에서 전화 통화를 감시하는 등 상황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활동가로서 부침이 없었냐는 질문에 대해 “반대라니요? 저는 사람들의 반대를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삶을 아직 모르는 이들이 불운하지요”라고 답했다.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도 있었지만 활동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재치 있게 되받아쳤다. 치 씨가 자신감을 갖게 된 데는 학창 시절의 고등학교 선생님이 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묻는 그에게 선생님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조언과 함께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 보았고, 앞으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1990년대를 지나며 대만은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막는 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성소수자들의 자긍심 행진(pride parade)이 처음으로 개최됐다. 2004년에는 교육 분야에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성평등교육법(性別平等敎育法, Gender Equity Education Act)이 제정되어, 초등학생도 성소수자 인권에 관해 배우게 됐다.

그럼에도 치 씨의 혼인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대법원 심리를 받는 일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는 2000년과 2008년, 2016년 세 차례에 걸쳐 동성혼을 제약한 민법에 대한 헌법 해석을 요구했다. 2013년에는 파트너와 함께 타이베이시 호정사무소(戶政事務所)에 혼인등기를 제출했으나, 이내 거부당하였고, 이에 맞서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패소했음에도 타이베이시 당국이 나서 대법원이 민법을 재검토하도록 요구하는 진전이 있었다.

결실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선 이전 동성혼 지지 입장을 표명했던 차이잉원 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법안 심의를 중지시켰다. 반대자들의 압박에 민법 수정이 아니라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치 씨와 변호인단은 특별법 제정은 동성애자를 이성애자와 분리하여 고립시키는 방책이라며, 민법 수정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2016년 한 프랑스인 교수가 투병을 하다가 숨진 대만인 파트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며 목숨을 끊었고, 시민들의 동성혼 합법화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당시 차이잉원이 임명한 대법관 중에는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이 많았고, 대법관 15명 중 12명이 혼인을 남녀 당사자의 것이라 규정한 민법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결혼한 이성 커플의 경우에도 “자녀를 낳지 못하거나 아직 낳지 않은 것을 이유로 혼인을 무효로 돌릴 수는 없듯, 자녀를 낳는 것이 혼인의 본질적 요소가 아님은 명백”하기에 “자녀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동성인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명백하게 합리적 근거가 결여된 차별”이라는 판결이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권 운동을 이어간 치자웨이에게 2016년 대만의 단체인 퀴어모사(Queermosa: 대만의 옛 이름인 포모사Formosa와 퀴어Queer를 합한 이름)는 존경의 의미를 담아 첫 번째 ‘퀴어 선구자상(Queer Pioneer Award)’을 수여했고, 2020년 타임지는 그를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꼽았다.

남아 있는 과제

대만은 성소수자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로 꼽히지만 남은 과제도 있다. 동성혼 합법화는 이루어졌으나 2019년을 기준으로 동성 부부의 입양은 불가능하다. 동성혼법의 공식 명칭도 ‘사법원 해석 748호의 해석과 실시에 관한 법률’이어서, “동성혼이라는 말을 피하고 숫자로 부른 일종의 정치적 타협”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문명적인 대만과 비문명적인 중국이라는 프레임 구도를 짜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중국인에 대한 편견 조장보다 탄압받는 중국 내외부의 활동가들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대만의 한 성소수자 활동가는 “중국과의 관계 문제로 나라가 한참 시끄러웠을 때,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이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동성혼 카드를 꺼냈다”며, “운동의 성과로서 동성혼이 법제화된 것이 아니라 정당의 정치적 전략으로서 선택됐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성소수자에게 법적 권리를 허용하는 이성애 규범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는 지적, 혼인제도가 동성애자를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도의 수명을 존속하여 혼인을 둘러싼 규범이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차별을 겪는 이들의 당장의 삶을 지탱할 안전망을 구축하고 커뮤니티를 만들어 낸 것은 치자웨이를 비롯한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들의 평생에 걸친 투쟁으로 이룬 성취였다. 대만 대법원은 2016년 헌법이유서에서 “성적 지향이 동성을 향하는 이들은 인구 구성 요인으로 볼 때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격리된 소수파다. 마찬가지로 선입관으로 인해 오랜 세월 정치적 소수자로 치부되며 법적 열위에 놓인 지위를 일반적인 민주(정치적) 과정을 통해 만회하는 것은 어렵다고 사료된다”라며 불평등한 상황을 지적했다. 즉, 사회적 합의를 통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기존의 주장은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을 미루는 기만이라는 것이다. 많은 부침이 있던 대만은 치자웨이와 같은 인권운동가와 시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동성혼 합법화를 통해 성소수자 인권의 기준을 높였다. 인권운동가들의 40일이 넘는 단식에도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회피한 오늘의 한국 사회가 대비되어 보인다. 🎈

2019년 5월 대만 의회는 《司法院釋字第748號解釋施行法》을 통과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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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ai Ing-wen, “The 100 Most Influential People of 2020: Chi Chia-wei”, TIME. 22 September 2020 09:34 PM EDT
葉瑜娟, “From A 1 Person March To 250,000 Strong: Chi Chia-Wei’s LGBT-Rights Marathon.” transl. Jane Tien, 報導者(The Reporter). 15 December 2016
김지예, 「대만 동성커플 3000여쌍 결혼… 세상 밖 나왔지만 편견과 싸움 남아」, 『서울신문』. 2019년 8월 23일
류정엽, 「간단하게 알아보는 대만 동성결혼 합법화 역사」, 『대만은 지금(現在臺灣)』. 2019년 2월 22일
박소영, 「‘격동의 30년’ 대만이 아시아 최초의 동성혼 합법화 국가가 되기까지」, 『한국일보』. 2017년 6월 2일
백스프, 「대만의 성 소수자 활동가는 왜 동성혼 추진을 비판했을까」, 『ㅍㅍㅅㅅ』. 2017년 6월 5일
서동진, 「인권, 시민권 그리고 섹슈얼리티」, 『경제와 사회』 2005년 가을호(통권 제 67호)
성동규, 「‘대만 동성애 상징’ 치자웨이는 지금… 혐오・차별과의 전쟁 여전」, 『아주경제』. 2017년 12월 26일
후쿠나가 겐야(福永玄弥), 「대만에서 동성혼이 성립될 전망이다」, 이승훈 역, 『미트르』. 2017년 6월 1일
「대만,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승인, 헌재 ‘인정 않는 건 위헌’」, 이승훈 역, 『미트르』. 2017년 5월 27일

글 : 윤형신
교열 : 권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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