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 대학 캠퍼스 민주벽에서의 저항

대자보는 일종의 저항 양식이다. 특히, 60~80년대 중국, 80~2000년대 한국의 대학가에서 널리 유행했다. 민주벽(民主牆)은 그러한 대자보들이 부착된 하나의 정치적 공간이다. 언론자유가 제약되는 20세기 동아시아의 특수한 저항공간에서 대자보는 아래로부터의 사상해방 운동이었고, 대학 사회의 저항의 일부였다.

중국에서 민주벽 운동의 유래는 멀리는 1911년 신해혁명 시기나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 가까이는 1978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민주벽 운동에 대한 논의에서 이야기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문혁에 대한 복잡한 논의는 제외하고, 1978년에서 시작해보고자 한다.

문화대혁명 종결과 마오쩌둥 사망 후, 덩샤오핑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상해방 운동’ 과정에서 당내에서는 진리 기준 논쟁이 시작됐다. 마오쩌둥 이후에 주석이 된 화궈펑(华国锋)은 권력의 안정화를 도모했는데, “무릇 마오주석의 결정은 반드시 옹호해야 하고, 무릇 마오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며 이른바 ‘양개범시'(两个凡是)를 제시했다. 반면 오랜 숙청 기간을 끝내고 권력 상층부로 복귀한 덩샤오핑은 이와 대립하는 입장을 가졌다. 두 진영은 문혁 시기 역사에 대한 재평가 문제와 잘못된 사건의 재조사를 놓고 대립했으나, 당시 상황은 덩샤오핑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11기 3중전회는 역사 청산과 실사구시로 정리됐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문혁의 실패에 대해 망각과 침묵으로 매듭짓는 것으로 귀결됐다.

1978년 겨울 중앙공작회의와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 등에서 중국공산당 고위층 내의 대립이 전개되는 한편, 민간 영역에서도 활발한 논쟁이 펼쳐졌다. 가령 산시(山西)성 윈청(运城)지구 당위원회 비서처는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기를 높이 들고 11차 당대회 노선을 관철하라!”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시했는데,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반혁명을 굳세게 진압하자! 프롤레타리아 독재 만세!” 같은 슬로건들이 함께 적혀 있었다. 또 톈안먼광장에서 서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단(西单)의 운동장 외벽에는 200미터 정도의 길이로 대자보들이 부착되기도 했다. 첫 대자보는 11월 19일에 부착된 문혁 기간 계급투쟁을 공격한 공산당 고위층 출신 보황파 홍위병들에 대한 비판이었고, “11기 3중전회는 마오 주석의 혁명 사업을 먹어버렸다”라는 입장들도 있었다. 즉, 11기 3중전회를 ‘마오 지우기’로 평가하는 반발이 중국공산당 안팎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당시 시단의 민주벽에는 무수한 대자보들이 붙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그 내용을 잘 볼 수 있었고, 민주벽 앞의 넓은 보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대자보를 읽고 토론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다. 예술가들은 사회비평적 그림을 전시했고, 새로운 잡지들도 이곳 노상에서 팔렸다. 누군가 이 벽을 ‘민주벽’이라고 부르면서, 이는 하나의 저항양식이 되었다. 이 민주벽이 꽤 오랜 시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 개인의 정치적 개입 때문이다. 고위층 내 권력투쟁에서 민주벽이 덩샤오핑에게 상당히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8년 11월 28일 덩샤오핑은 미국에서 온 저널리스트 로버트 노박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벽은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 사회당 정치인들과의 회담에서도 “정상적인 현상이고 우리나라 정세는 안정적이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이 인터뷰 내용은 인민일보 사설과 함께 배포되어 중국공산당이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고위층 내 논쟁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덩샤오핑이 명실상부한 권력을 쥐게 된 이후로 언론자유는 차츰 제약받기 시작한다. 1979년 3월 19일 덩샤오핑은 공공에서의 모든 정치적 관점은 “사회주의 견지의 네 가지 기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법령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는데, “프롤레타리아민주 독재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견지”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강경한 입장의 자유주의자들이 체포됐고, 민주벽은 위태롭게 유지된다.

1979년 12월 6일, 민주벽이 형성된지 1년 정도 지났을 즈음, 베이징시 정부는 공식적으로 시단 민주벽의 폐쇄를 결정한다. 베이징시의 새로운 법령에 따르면 대자보는 위에탄공원(月坛公园)에만 게시할 수 있고, 대자보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신분증을 제시해 등록해야 하며, 대자보에는 당국의 승인 도장을 찍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자보를 계속 붙이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졌고, 시단 거리에 있는 민주벽은 완전히 깨끗하게 사라졌다.

1980년 1월 16일 공작회의 담화에서 덩샤오핑은 대자보와 민주벽 운동을 ‘적’으로 간주하고, 이른바 당의 주류적 입장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시민들은 정치 불안의 요소로 단정지어버렸다. 또, 헌법 45조(대자보 게시 보호할 수 있는 4대 자유 조항)를 삭제해버렸고, 얼마 후에는 위에탄공원의 민주벽도 폐쇄해버렸다. 1978년부터 1979년 말까지의 짧은 시기를 ‘베이징의 봄’이라고 부른다. 개혁개방을 이끈 위대한 정치인으로 찬양받곤 하는 덩샤오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자, 언론자유를 실질적으로나 헌법적으로나 모두 봉쇄해버렸다.

하지만 민주벽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현대 중국의 정치적 격변이 이뤄지는 한복판에 등장하곤 했다. 가령 1986년 상하이에서, 1989년 봄 베이징에서 그러했고, 가까이는 2018년 베이징대학에서도 대자보는 등장했다. 최근 대학가에서도 이런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오늘날 민주벽이 어떠한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중국 청년 세대의 불만을 엿볼 수 있다.

난징대학 몰래카메라 규탄 민주벽

2021년 11월 5일 오후4시. 난징대학(南京大学) 학생 쉬칭(徐晴)은 커피숍 안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위챗 메시지를 받았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그것은 난징대학 셴린캠퍼스 게시판에 부착된 연서명 촉구 대자보였다. 

“우리를 몰래 훔쳐보지 마라! 변태들을 엄정하게 처리하라! 우리는 학교 측의 답변을 요구한다!” 연서명에는 몇 개의 붉은 지문들이 찍혀 있었고, 바로 아래쪽에는 붉은 인장이 붙어있었다.

쉬칭은 곧바로 게시판으로 달려가 지장을 찍었다. 여학생 기숙사 2동 아래에 붙어있는 이 게시판은 평소에 동아리들의 포스터를 붙이는 용도로 이용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쉬칭은 게시판에서 몇 미터 떨어져 서서 게시판을 지켜봤다. 10분 정도 지나자, 자보에 지문을 찍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대부분 여성이었으며, 일부 남성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 흰 종이가 빠르게 꽉 채워질 것 같았다. 그는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가서 백지 뭉치와 인주를 샀다.  

난징대 학생 쉬칭은 줄곧 학교 당국이 이 안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주시해왔다. 10월 26일, 어떤 여학생이 학내 여자화장실에서 몰래 훔쳐보는 남자를 마주쳤다고 폭로했고, 경찰에 신고한 후 아무런 통지가 없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났으나, 학교 당국은 여전히 몰래카메라 가해 남성에 대한 후속 징벌 결과를 발표하고 있지 않았다.

자보가 붙은 그날, 게시판 앞으로 보안원 1명이 꽤 빠르게 나타났다. 보안원은 아무 말도 없이 연서명 자보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이 보안원에게 무슨 근거로 종이를 떼는 것이냐고 따져물었다. 그러자 그 보안원은 보위처 부처장이 곧 올 것이라면서 “부처장이 오길 기다렸다가 그와 이야기해보라”고 답했다.

항의는 멈추지 않았다. 이날 저녁 보다 많은 새로운 구호들이 게시판 위에 붙었다. “우리는 이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방관은 범죄다”,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우리는 연대할 것이다”

누군가는 몇 송이의 생화를 가져다두었고, 또 누군가는 생리대를 붙여놓기도 했다. 그 생리대 위에는 세 개의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好看吗” (보니까 좋냐?)

둘째날 아침, 게시판 위의 모든 구호들과 동아리 자보들은 다시 완전히 뜯어졌다. 그저 그 생리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캠퍼스에서 일어난 사건은 더 나아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학생은 웨이보(중국의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에 당일 아침 게시판을 촬영한 사진과 함께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왜 모든 흔적을 지우려 하면서도 생리대 한 장 건드리지 않으려는 거지?”

하지만 웨이보에 게시된 글들은 빠르게 삭제 조치되었다. 

자유가 틈바구니로 변해 캠퍼스 민주의 벽이 퇴락한 지 여러 해 된 중국 고교 내 녹슨 거대한 게시판은 어젯밤 반짝였던 민주벽의 종말을 고했다. 녹슬고 얼룩덜룩한 거대한 게시판의 갈라진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던 자유는, 지난 밤 찰나에 ‘민주벽’이름으로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하룻밤만에 종결을 선고했다.

2021년 11월 5일 오후, 학교의 공개적인 답변과 몰래 훔쳐보는 가해 남성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연서명 자보에 학생들의 지문 자국이 가득 찍혀 있다.
2018년 자스커지 사건이 대학가에 미친 영향

난징대학 쉬칭은 항의 행동의 배후에 오랜 기간 누적되어 왔던 억압 정서가 있다고 본다. 전환점은 2018년의 마르크스주의 학회 사건이다.

지난 수년간 중국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정부당국의 탄압이 이뤄져왔고, 대학 캠퍼스의 자유공간은 축소됐다. 반면 좌익 사조에 대해서는 한동안 숨통을 틔워줬다. 2018년 여러 대학의 좌파 대학생들이 자스커지 노동자들의 공회 설립과 노동권 보장을 위해 여러 차례 연대 행동을 펼쳤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노동자와 학생들이 체포되어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같은 해 9월 베이징대학 마르크스주의학회(马克思主义学会)와 난징대학 마르크스주의독서연구사(马克思主义阅读研究社)의 신학기 등록이 연기되었다. 두 학회는 설립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어, 흔히 “마회”라고 불리고 있었다. 중국 정부 당국의 《대학생 동아리 건설 관리 방법 高校学生社团建设管理办法》에 따르면, 대학 동아리는 매년 등록 접수를 통해 ‘연차 심사 年审’를 받아 심사를 통과해야 새 학년에 다시 등록 동아리로 활동할 수 있다.

자스커지 노동자 투쟁 사건(佳士工人维权事件) : 2018년 5월 열악한 노동조건, 임금 삭감, 연장근무시간 초과 등 문제로 인하여 선전자스커지유한공사의 일부 노동자들은 공회 건설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 7월, 다수의 노동자들이 연이어 구타를 당했고, 해고되거나 체포됐다. 이후 일부 자스커지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은 여러 차례 체포된 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냈다. 이 연대 행동은 8월 24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날 경찰은 한 민박집을 급습하여 현장에 있던 여러 명의 자스커지 노동자들과 50명의 대학생들을 체포했다.

2018년 11월 1일 난징대학 동아리 마르크스주의연구사의 멤버들은 학교당국이 동아리 등록을 지연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학교 당위원회 서기에게 해명을 요구했는데, 갑작스레 학교 당국으로부터 진압됐다. 학생들의 진술에 따르면,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구타하고 유인물을 빼앗았다. 어떤 학생들은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이듬해 3월, 공청단 위원회(中国共产主义青年团委员会)의 지도·책임 관리를 받는 ‘난징대학생 동아리연합회’는 통지서를 발표했다. 연간 심사와 재등록 요구에 미달하는 11개 동아리의 등록을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이 중에는 난징대학 마르크스주의 연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멀리 퍼져나갔다. 그후 학생 활동에 대한 정부 당국의 통제는 더더욱 강화되었다. 쉬칭에 따르면, 반(半)민간조직이었던 사련(社联; 학생동아리연합회学生社团联合会의 준말)은 취소되었고, 모든 동아리들은 공청단 위원회로부터 직접 관리받았다. 2018년 9월, 난징대학이 심의·의결한 학생동아리명단(校级学生社团名单)에는 ‘난징대학 학생동아리연합회’로 명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2019년 9월의 같은 종류의 문건에는 ‘학교 공청단 위원회 산하 학생동아리관리부’(校团委学生社团管理部)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다른 대학에서도 똑같은 위축이 일어났다. 2021년 11월, 칭화대학 공청단 위원회가 공표한 동아리 취소 명단에는 도시노동자모니터링협회(关注城市劳动者协会), 정치경제학연구회,  현대자본주의연구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줄곧 ‘당의 영도와 공청단의 지도를 받아온’ 학생회가 추가적으로 개편됐다. 2019년 10월, 공청단 중앙과 교육부, 전국학련은 《대학·대학원 학생회 심화개혁 추진에 관한 몇 가지 의견》(关于推动高校学生会(研究生会)深化改革的若干意见)을 발표하여 학생회 “간소화(精简)”를 요구했다. 학교급 학생회 성원을 40명 내외로 지정하고, 업무 부서는 6개 이하, 각 부서 책임자는 2~3명, 학생회 성원의 성적 종합 순위는 본 학과 상위 30%에 들어야 한다고 지정했다.

2020년 9월부터 2021년 4월까지 난징대학에서 연구생(대학원생)들의 자살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하지만 학교 당국은 보수적이고 침묵하는 입장을 취했고, 웨이보의 빠른 조치로 관련 키워드는 빠르게 삭제됐다. 학교 당국은 아무런 공지나 추모 글도 올리지 않았다. 쉬칭은 11월 5일 게시판 아래에 몇 송이의 생화를 두었는데, 자살로 세상을 떠난 학우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의 감정이 정점에 와 있어요. 학교 당국의 이런 보수적인 입장과 단속적인 상태에 의해 매우 강하게 묶여 있죠. 그러니 다같이 저항해야 해요. 어떤 하나의 출구가 있다면 그건 곧 저항입니다. 그들의 감정을 쏟아내야 해요.”

2011년 11월 6일 새벽, 난징대학 공고 게시판 위에 있던 구호들이 죄다 지워졌다. 생리대 위에 “보기 좋냐”(好看吗)라는 세 글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몰래카메라 사건은 금세 감정을 폭발시켰다. 쉬칭은 “모두들 학내 성추행 사건으로 매우 경악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지만, 학교 당국은 공식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그건 일종의 공적인 분노에요. 캠퍼스 전체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 거죠.” 

11월 5일 밤 11시, 게시판 위에 적힌 구호들이 끊임없이 늘어났다. 어떤 학생들은 학교 보안처가 행정북동(行政北楼) 128호실에서 일부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온라인 회의 링크 하나가 위챗과 QQ에서 빠르게 전파됐다. 난징대학 학생들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접속해 회의를 경청했다.

쉬칭의 경우 처음에는 회의를 방청하기만 했다. 현장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있던 말들을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며, 학내 여학생들의 안전이 왜 보장받지 못하는지, 학교당국이 왜 연서명 자보를 철거했는지 따져물었다. 하지만 함께 논의하던 보위처 처장과 부처장은 요구에 응할 수도, 약속을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듣고 상부에 보고하는 것 뿐이지, 어떤 약속도 감히 할 수 없었어요. 학생들도 그걸 알고 있었죠.” 쉬칭이 말했다.

좌담회는 새벽 1시까지 계속 됐다. 마지막에 보위처의 인도 하에 17명의 학생 대표를 선출하였고, 이튿날 학교 고위관계자와의 좌담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선생님들의 유도로, 행정 전반의 무책임함을 성토하는 것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었죠.” 모두들 학교 당국과 직접적으로 대화한 경험이 적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고 생각했다. “학생 대표를 선정하면 우리를 대표하게 되거나, 아니면 관방의 관리에 따르거나 하게 되죠.”

둘째날, 17명의 학생 대표들이 참가한 좌담회에서 학교 당국은 사건 처리 과정을 처음으로 밝혔다. 학교 당국에 따르면 10월 11일 난징대학의 높은 전망대(鼓楼)에서 몰래 훔쳐본 자는 그 달 26일에 체포됐다. “몰래카메라, 유포 등 다른 행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안기관은 그에게 치안관리처벌 명목으로 400위안의 벌금을 부과했다. 11월 5일, 난징대학은 ‘난징대학 학생위기처분규정’(南京大学学生违纪处分规定)에 따라, 이 학생에게 1년 간 학교에서 떨어져 관찰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이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본안에 대한 유관 책임 교사의 확인 결과, 내용은 사실로 드러났으며, 학교의 진의 표시에 부합한다.”

적지 않은 학생들과 네티즌들은 이 처벌 결과에 대해 여전히 분노했지만, 항의는 계속되지 않았다.

2021년 11월 5일 저녁, 난징대학 게시판에 붙은 자보. “400위안짜리 존엄의 시대는 노예의 시간”
다다이즘적 저항

11월 5일 저녁 베이징외국어대학 재학생 천톈루이(陈天睿) 역시 인터넷 상에서 난징대학의 1차 좌담회를 방청했다. 얼마 전, 그는 베이징외대 캠퍼스 안에서 한 차례 퍼포먼스 저항을 제안한 바 있다.

작년 여름방학, 베이징외대는 개교 80주년 전야제를 위해 식당 인테리어를 진행했다. 하지만 9월 개학 이후 많은 학생들은 웨이보와 위챗 타임라인(朋友圈), 즈후(知乎) 등 플랫폼에 음식이 비싸지고 먹기도 어려워졌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천톈루이에 따르면, 반찬 1개의 가격이 이전보다 1~2 위안 정도 올랐다. 또, 어떤 학생들은 음식에서 벌레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 식당측은 부인하기만 했다. 

“전 세계에서 오직 베이징외대 학생들만이 바퀴벌레 고단백질 세트를 배식받죠. 전 세계에서 오직 베이징외대 학생들만이 앉은 자리에서 값을 부르는 마트와 식당을 감당해야 하고요.” 어떤 학생은 웨이보에 이렇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여러 개의 위챗 그룹채팅방을 만들어, 인근 학교 학생들에게 식당 음식을 싸서 베이징외대 교문 앞까지 배달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천톈루이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외대의 행정 역량은 죄다 80주년 행사 선전에 투입되고 있던 와중이라 학생들의 투서와 의견에 대해 아무런 처리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소리없이 저항을 개시했다.

9월 18일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때, 천톈루이와 친구는 베이징외대 동캠퍼스의 연못 주변에 회화도구용 나무인형을 놓았는데, 이곳은 동캠퍼스의 중심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측에는 도서관 정문이 있고, 동남쪽엔 학생식당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나무인형의 두 팔 밑에는 A4용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이런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한푼만 주세요. 베이징외국어대학에서 밥을 먹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인형을 남겨둔 후 천톈루이와 친구는 연못 근처에 앉아 몰래 관찰했다. 그는 “학교 측에 식당 문제 처리를 요구하는 것이 이번 항의의 직접적인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의 주요한 요구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장치가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했고, 반드시 각종 방식의 참여와 피드백이 나타날 것이라고 봤다. 더구나 이는 학교 당국에 걸릴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2021년 9월 18일 오후, 천톈루이는 학내에 나무인형과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설치했다. 그 옆에 학우들이 남긴 음식들이 놓여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천톈루이는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인터넷에서 평론을 남기는 일에 열중했었죠.” 이미 그의 웨이보 계정과 QQ 계정은 여러 차례 폭파된 바 있다. 그 때문에 오랜 시간 온라인상에서의 표현 욕구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오프라인에서는 권익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식당 문제를 마주하면서 그는 스스로 다다이즘적 예술 표현을 선택했다. “매우 갑작스럽고, 무작위적이며, 터무니 없는 일이었죠.”

“그곳에 놓인 딱딱한 죽은 사물은 진실된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었죠. 이렇게 해서 아주 많은 위험을 회피할 수 있거든요.” 천톈루이는 덧붙였다. “제가 좋아하는 건 이 구조 안에서 이 구조를 활용해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은근하고,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표현이에요.” 

30분 사이, 연못 주변에 수많은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나무인형 주변에 장미꽃과 우유, 만두 같은 것을 놓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5시경, 천톈루이는 현장을 떠났고, 7시에 돌아오려 했다. ‘구걸’로 수집된 물건들을 모아 2차 창작을 진행하려 했다.

첫 번째 퇴거 이후, 어떤 학생이 천톈루이를 모방해 2차 창작을 진행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공간을 주세요. 베이징외대에서 말을 하고 싶어요. 실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말을. 감사합니다.”

그가 아직 돌아오기 전, 학교 보위처 사람들은 이미 현장을 깨끗이 치우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저녁 6시가 넘어서자 어떤 학생이 그(천톈루이)를 모방하여 같은 자리에 또 다른 구호를 놓았다. “공간을 주세요. 베이징외대에서 말을 하고 싶어요. 실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말을. 감사합니다.”

이 모퉁이는 다시 핫스팟이 되었다. 모두들 연이어 주변에 과자와 음료를 놓아두었다. 또 어떤 학생은 나무인형 사진을 찍어 작은 카드로 만들고는 강의동을 따라 연못까지 가는 길 이곳저곳에 뿌려놓았다. 천톈루이는 생각치도 못했지만, 어떤 학우가 뒤따라 2차 창작을 하였고, 이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채 30분도 되지 않아 보안원들이 다시 현장에 나타나 재차 철거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사건 후 베이징외대는 교수-학생 좌담회를 개최하여 총학생회 및 각 학부 학생회 대표들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식당 음식의 가격과 품질, 위생 등 문제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천톈루이는 저항의 배후에 완벽하게 숨었고, 학교 당국에 의해 발견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사진 카드를 흩뿌렸던 그 학우는 보위처에 불려가 면담을 가졌다고 한다. 다행히 어떠한 처벌도 이뤄지진 않았다. 천톈루이가 보기에 이번 행동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학교 당국이 결국 다음주에 학생식당 가격을 낮추었고, 위생 문제에 대한 투서도 매우 적어졌기 때문이다.

9월 18일 저녁, 학교 측은 노동자들을 보내 나무인형 항의 퍼포먼스가 이뤄졌던 동캠퍼스 연못 인근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곳은 감시되고 있죠.” 천톈루이는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명소가 된 거에요.”

보위처가 작은 나무인형을 가져간 후, 어떤 학우가 나무인형이 있던 자리에 스마트폰을 놓고 “저에게 몸값을 주세요”의 구호를 내걸었다.
금지된 익명의 벽

오프라인 공간이 바짝 감시받고 있다면, 온라인 토론 공간도 이와 같다. 2000년을 전후해 중국 대륙에서 칭화대학은 ‘수목칭화(水木清华)’, 베이징대학은 ‘엉망진창(一塌糊涂)’, 난징대학은 ‘소백합(小百合)’ 등으로 대표되는 대학 인터넷 게시판 논단들이 한 차례 풍미한 바 있다. (역주: 수목칭화는 여전히 존재하고, ‘엉망진창’은 1999년에 개설하여 2004년에 폐쇄됐다. 난징대학 ‘소백합’은 1997년에 개설해 2005년까지 유지되다가 폐쇄됐다.)

2004년 9월에 폐쇄된 베이징대학 ‘엉망진창’은 중국 교육네트워크 내 평균 온라인 접속자수가 가장 많은 게시판이었다. ‘삼각지(三角地)’, ‘대만해협 관찰(台海观察)’, ‘퀴어(酷儿)’, ‘런즈추(人之初; 내가 태어났을 때)’ 등 코너들이 있었으며, 학습·생활 콘텐츠가 많았다. ‘삼각지’ 같은 게시판에서는 모두가 열렬하게 토론하는 공적인 논의도 뜨거웠다. ‘삼각지’는 본래 베이징대학 캠퍼스 내의 게시판 이름인데, 8~90년대 민중운동 시기에 정보교환 장소였고, 2007년 10월에 이르러 학교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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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5월, 베이징대학 ‘엉망진창’은 쑨즈강(孙志刚) 사건에 대한 토론으로 뜨거웠다. 5월 4일, 정치·시사 이슈를 다루는 ‘삼각지’와 ‘공민생활’ 두 게시판이 정돈을 요구받았고, 글 게시나 댓글 게시가 불가능해지고, 읽기만 가능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방의 진주(홍콩)’ 지면 역시 같은 정돈 요구를 하달받았다. 1년 후, ‘엉망진창’은 베이징시 통신관리국에 의해 영구 폐쇄되었다.

2005년, 각 대학 BBS 게시판들은 잇달아 학외로부터의 방문을 막으라는 요구를 받고, 학내 토론장으로 전환했다. ‘수목칭화’는 학교측이 인수 후 이메일 인증이 시작되었고, 이후로 접속자 수가 대폭 감소하여 2012년에 운영을 종료했다. ‘소백합’은 ‘난징대학 BBS’로 대체되었는데, 난징대학 측이 관리하는데다 실명제를 도입하게 되었으며, 현재 학교 밖 IP로는 이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게 되었다.

쑨즈강 사건 : 2003년 3월, 27살의 나이로 광저우로 와서 품팔이 노동을 한 후베이성 출신의 쑨즈강이 임시거류증을 발급받지 않았는데, 파출소 경찰들에 의해 ‘3무 인원(三无人员)’에 속한다는 이유로 연행되어 수용소로 연행됐고, 이후 수용소 인원을 관리하던 병원에서 사망했다. 처음부터 당국은 쑨즈강이 병으로 사망했다는 입장을 견지했지만, 『남방도시보(南方都市报)』가 취재한 결과 쑨즈강은 수용소 직원들에 의해 구타 당하여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광범위한 여론의 관심을 이끌었고, 결국 중국 정부의 수용 송환제도 폐지를 촉발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여러 대학 캠퍼스들에서는 다시 ‘표현의 벽’(表白墙), ‘호조벽(互助墙; 서로 돕는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운영하는 커뮤니티들이 등장했는데, 이것들은 익명 발표와 자유토론을 제공하는 플랫폼들이었다. 이 중에서 ‘표현의 벽’은 독자들이 갠톡으로 관리자에게 투고하면, 관리자가 익명으로 QQ공간과 위챗 타임라인과 공식계정에 발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 ‘호조벽’은 위챗이나 QQ계정으로 접속한 후에 누구나 익명으로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정법대학 호조벽

중국정법대학은 최근 한 차례 학생운동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호조벽’에서 빚어진 사건이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정법대학의 ‘호조벽’에는 누군가가 연이어서 ‘19일 오후4시 캠퍼스 남문에서 모이자’고 호소했다. ‘산보 행동’을 통해 모두가 내내 불만을 가져왔던 몇 가지 문제들(선택과목에 대한 학교측의 점수, 일률적인 캠퍼스 봉쇄 정책, 졸업논문 주제선정에 대한 제한, 학생회 간부 개인의 작풍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항의하자는 취지였다. 4개 요구를 하나로 묶어, 호조벽 위를 연이어 뒤덮었다. “캠퍼스 봉쇄 해제! 논문 자유! 처분 공개! 자주성 분배!”(解除封校,论文自由,公开处分,给分自主)

10월 22일, 베이징시 창핑(昌平)구에서는 4건의 PCR검사 양성 사례가 새로 발생했다. 그날 창핑구는 긴급상태에 진입했고, 캠퍼스에 있던 학생들은 폐쇄 관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11월 17일 창핑구가 위험도가 낮은 지역으로 분류된 후에도 정법대학은 여전히 계속 엄격한 캠퍼스 폐쇄 정책을 집행하였고, 이는 학생들의 불만을 야기해 호조벽에 분노를 쏟아내게 했다. “대체 언제 폐쇄를 해제할 것인가?”, “저위험인데도 여전히 매일 폐쇄!”

산보 : ‘산보’는 중국 대륙 내에서 ‘시위’를 은밀히 에둘러서 쓰는표현이다. 2007년, 샤먼시 정부는 하이창(海沧)구에서 파라자일렌( 对位二甲苯) 생산 화학공장 건설을 계획하였다가, 시민들의 거리 시위와 집단 저항을 맞닥뜨려야 했다. 이후 이는 ‘샤먼 산보사건(厦门散步事件)’으로 불리었다.

2021년 11월 19일 오후, 중국정법대학의 두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프리허그’ 행동을 진행하고 있다.

정법대학생 궈자자(郭佳佳)는 자신이 속한 학부가 매우 엄격하다고 말한다. 질병에 걸린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사유로 학교를 통과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호조벽 위에 학교 측은 그저 각 반에서 매주 최대 2명의 학생들이 이발을 사유로 출입하는 게 가능할 뿐이라고 적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외에도 모든 학생들에게 점수를 매기는 정책도 분노를 야기했다. 전공 필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75점을 초과할 수 없도록 결정되자, 학생들은 강사들에게 자초지종을 문의했다. 그러자 강사들은 이것이 교무처의 가이드라인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학교 교무처가 선택과목 강사들에게도 통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중국 대학에서는 교무처가 교과목의 시험점수를 ‘정규분포’가 되도록 제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정책은 학생 성적이 ‘중간 분포는 높게, 머리와 꼬리는 낮게’ 분포 추세를 보이도록 엄격하게 규정하기 위함이다. 중국 대륙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정규분포’는 수업 담당 강사의 질을 판단하는 일종의 리트머스지로 활용된다. 높은 점수가 나올 경우, 시험지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뜻이라는 거다.

11월 18일, 정법대학 교무처는 본과생 졸업논문 주제 선정에 대한 통지를 발표하여 각 연구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인원수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학생이 원하는 연구 방향을 찾지 못하면 나머지 분야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밖에도 정법대학 학생회 주석 4명의 활동 방식(作风)에 대해 적지 않은 학생들이 공개적 처분을 요구했고, 캠퍼스 내의 부족한 자습 공간이나 식당 개방 시간이 너무 짧다는 문제 등이 제기됐다.

18일, 연이어 출현하는 산보(시위)를 호소하는 익명의 메시지들에 대해 한 계정이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는 계속 이 벽을 주시하고 있다. 일단 뭔가 나타나면, 우리는 열을 떨어뜨리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이 소란을 피운 사건은 좋은 결말로 이어진 게 별로 없다.”, “학생들이 난동을 부려서 좋은 결말이 난 적은 역대 별로 없지”, “내일 4시 니네가 나타나서 뭘 하는 건 불가능해. 설령 뭔가 하더라도,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라!”

궈자자는 설령 익명의 발표일지라도, 호조벽은 내내 학교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나아가 이 기술로도 개인의 IP주소 등에 대한 추적을 피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인 19일 오전, 호조벽은 이미 사용 제한이 되었고, 메시지를 올릴 수도, 댓글을 달 수도 없게 됐다. 산보를 호소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삭제됐다. 정법대학 학생들은 빠르게 또 다른 인터넷 공간으로 진지를 바꾸었다. 즈후(知乎), 웨이보 차오화(微博超话), 그밖에 대학 호조벽들에 초점이 모였다.

19일 오후 4시는 바로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궈자자가 학생 기숙사 화장실까지 뛰어가니 창문에서 바로 보이는 캠퍼스 남문이 보였다. 그는 수십여 명의 학생들이 이미 모인 것을 목격하였는데, 사람 수는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머지 않아 경찰차가 나타났다. 궈자자에 따르면, 집회가 끝까지 진행될 수 없었고, 사람들이 집결지에 모인 것은 십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역시 밖으로 나가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있던 한 학생이 ‘프리허그’ 활동을 시작했고,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현장의 학우들에게 앞으로 다가와 포옹해달라고 청하였다. 한 여학생도 가세해 그와 나란히 서서 팔을 벌렸다. 모두가 그 둘을 둘러싸고 한데 모여 흩어지지 않았다. 인터넷상의 기록에 따르면 4시반 즈음 학교 고위인사가 두 학생들 옆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 한 여성은 정법대학의 부총장이었다. 이후 이 부총장은 학생들을 향해 일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리허그의 발기인은 이후 위챗 타임라인에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업로드했다. “비록 나는 스스로에게 공권력에 대해 분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아직은 이 땅에서 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하. 이 분노의 표현 방식을 바꿔보자. 사랑은 모든 걸 감화시킬 수 있다.” 이 기록은 정법대학 학생들 사이에 광범하게 공유됐다.

둘째날 오전, 정법대학은 교수-학생 좌담회를 개최했다. 좌담회에서 교무처 처장은 점수 배분을 압박하는 정책의 존재를 부정했고, 졸업논문의 방향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한 학생 대표가 공개한 회의 기록에 따르면, 정법대학 총장은 회의에서 ‘호조벽’을 언급하면서, 누군가 소셜미디어에서 ‘정서적인 선동’을 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 대해 책임지려면, 어떠한 익명 여론이든 누가 썼는지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 누가 내게 위안을 줄까” (베이징대학)
상아탑의 두려움과 이상

이제 천톈루이는 그저 사석에서 친구와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공개적 발언과 인터넷에 비평을 게시하는 건 매우 적다.

2019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폭발할 때, 그는 고교 3학년이었고, 매일 스마트폰으로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뉴스를 봤다. 하지만 스스로는 무력감으로 가득해졌다고 느낀다. 한동안 그는 우울감에 빠져 수업에 가지도 않았다. “완전한 관점을 표현할 능력도, 이 정보들을 분석하고 이해할 능력도 없었죠.”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점점 신중해졌다. “이 체제가 어떠한 것인지 이미 정해진 사실이고, 저는 지금 그걸 바꿀 능력이 없잖아요.” 천톈루이는 말했다. “지금은 그것(체제)에 맞서 저항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게다가 비축된 지식도 아주 적고요. 최소한 저 스스로에게 분명히 답해야겠죠. 예를 들면, ‘만약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왜 해야 하는거지?’라고요.”

그는 지금 더 중요한 것은 개인들의 구체적 요구들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가 베이징외대 식당 사건에서 얻어낸 생각이다. 한 번은 그도 연못가에 직접 앉아 퍼포먼스 방식으로 저항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두 달 후, 이런 형식은 베이징전영학원(北京电影学院) 캠퍼스 안에서 일어났다. 2021년 11월 22일, 베이징전영학원 하이뎬 캠퍼스의 한 학생은 검정색 새장 안에 들어가 앉아, 마스크로 두 눈을 가렸다. 새장 위에는 “꼭 필요하지 않으면 새장에서 나가지 않겠다”(非必要不出籠)고 적어놓고, 학교 당국의 “일률적인” 캠퍼스 봉쇄 정책에 항의했다.

“저는 그의 그런 활동 방법이 좋더라고요. 하지만 저 개인은 그렇게 강렬하게 하지 못해요. 전 확실히 배짱이 없는 사람인 거죠. 이렇게 철저하게 예술 창작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야말로 저항이죠.” 천톈루이가 말했다.

설령 이번 행동이 절대다수 학우들의 지지와 상찬을 얻긴 했지만, 어떤 학생은 천톈루이의 행위는 고의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왜 늘 화를 내면서 고의로 쓸데없는 갈등을 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어”라고 말이다. 동시에 그는 베이징외대 식당서비스센터 관계자의 회신을 캡쳐해 첨부했는데, 그 회신에는 “귀하가 서신에서 건의한 내용은 매우 좋습니다. 저희는 반드시 진지하게 청취하여,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쉬칭은 보위처 부처장이 학교 업무 우편함이나 당 선전 판공실 등 “정상적 경로로” 의견 피드백을 접수하면 된다고 고지했던 걸 상기했다. 그러면서 부처장은 그렇게 하면 “이렇게 시끄러운” 연서명의 방식을 통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쉬칭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학교 당국이 제공하는 채널이 진짜 채널이 아니라는 데는 이미 적지 않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당위원회를 찾으시나요? 절대 불가능하죠! 무슨 일이 생기면 지도원(辅导员)을 만나 이야기하나요? 아주 적죠. 아마 불가능할 거에요.” 쉬칭이 말했다. 평소에는 하나같이 작은 단체 안에서 사정들을 소화할 뿐이지, 지도원과 이야기하는 건 드물며, 어떻게 더 높은 층 인사에게 가서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대륙의 대학들에서 지도원은 학생들의 일상에 대한 관리를 책임지고, 사상 정치 교육 등 업무를 맡는다. 일반적으로 관리하는 수는 1개 반 정도다.

정법대학 ‘호조벽’이 폐쇄된 그날, 궈자자는 운영진을 교체할 것이라는 글을 보았다. 봉쇄된 커뮤니티를 마주하며, 어떤 학생은 비밀 웨이보 차오화를 만들었다. 차오화 이름에는 정법대학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지만 100여 명이 가입했고, 게시물 수는 적었다. 궈자자는 “다들 글을 쓰면 자기 웨이보 계정이 탄로날까봐 걱정한다”고 말했다.

“글을 쓴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적어요.” 궈자자는 “사실 다들 아주 겁이 난 거죠. 호조벽이 폐쇄되기 전에는 아직 소식들이 돌았지만, 학교 당국이 기술적 수단을 통해 학생 개인을 추적해 협박을 가할테니까요.”

11월 26일, 폐쇄한지 1주일이 된 호조벽이 새로운 운영진에 의해 다시 가동되면서 새로운 ‘관리 규정’이 설치됐다. 그중 하나는 ‘정치(행정) 관련’ 정보의 금지가 언급되어 있다.

또 다른 정법대학 학생은 지난 시기 행동에 대한 학내에서의 토론은 많지 않고, 짧다고 말했다. 이번 행동의 이면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얽혀 있어서, 사람들의 분노은 쌓일대로 쌓였지만 실제로는 제각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위의 세 사건들 중 가장 격렬해 보이는 정법대학 ‘산보’ 시위는 오히려 인터넷상에서는 가장 뜨겁지 않았다. 궈자자는 “사건이 불거진 날 친구들 사이에선 관련 글을 올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익명의 벽(온라인 게시판)에서 격론을 벌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쉬칭이 보기에 캠퍼스에서의 행동은 수동적인 작은 저항일 뿐, 체제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갖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격 안에는 그렇게 근본적인 반란이 많지 않죠.”

나아가 쉬칭은 학교 당국의 행태를 ‘고압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어요. 다만 약간 보수적이고 나태해졌다고 말할 뿐이죠. 지금의 대학 내 행동들은 사람들을 움직일만한 주체성이 충분하지 않아요.”

두 달 전, 난징대학 학생들은 몰래카메라 사건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쉬칭이 생각하기에 이는 대학이라는 상아탑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후에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 너무 많은 실제적인 고려가 뒤섞여 자신부터 돌보게 될 것이다. 자기 직업의 앞날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까지 미칠까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쉬칭이 보기에 오늘날 중국 대학 내 행동들은 여전히 이상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음을 방증한다.

글 속에 등장하는 쉬칭(徐淸)·천톈루이(陳天睿)·궈자자(郭佳佳) 등은 모두 가명이다.

참고 자료
卓琳, 「一夜民主牆:中國高校學生的花式抗議」, 端傳媒
陈彦, 「“民主墙运动”及其历史地位」, 当代中国研究

“北京之春”— 回顾1978-1981年的中国民主运动, Universität Wien
造谣诽谤、约谈施压、强制噤声——论南大官僚如何应对马会“刺头”, 南京大学马克思主义阅读研究社
조영남, 『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민음사
홍명교,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빨간소금

번역 및 정리 : 홍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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