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의 숨은 패배자들 : 문재인, 이준석, 어용지식인, 길을 잃은 사회운동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패배가 아니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패배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패배가 아니라면 누구의 패배로 규정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패배이기도 하다면 무엇을 돌아봐야 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20대 대통령선거가 1,639만 표 대 1,615만 표(24만7,077표차)로 야당 국민의힘 후보 윤석열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 이후 역대 가장 적은 표차이며, 역대 가장 낮은 득표율 차이로, 대통령제의 승자독식 구조에서 이른바 ‘국민통합’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려를 낳는다. 

이번 대선 출구조사 결과에서 지난 대선과 명백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20대 득표율과 서울이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20대와 30대에서 성별과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높은 득표율을 보였는데, 20대 대선에서 20대 남성 유권자들의 윤석열 후보로의 결집과 30대 유권자들의 이탈이 눈에 띈다. 30~40대에서 보인 민주당에 대한 높은 지지는 그대로 40~50대로 전이되어 어느 정도 상쇄했으나, 20~30대에서의 큰 하락에 비해 충분히 메워지지 않았다.

이재명 패배의 원인

앞으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이번 대선을 둘러싼 공론장에서 오고가는 말들은 크게 세 가지를 가리킨다. 첫째, 86세대 엘리트 정치인들과 문재인 정권 핵심 인사들의 ‘내로남불’에 대한 경멸이 젊은 층에게 좌절감과 경멸감은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원인은 조국 사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여권은 일을 이렇게 까지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극렬 친문인사들은 문제적 인사 결정과 입장을 고집스럽게 관철시켜나갔다. 물론 극소수 양심있는 민주당 인사들은 비판적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반성은 거의 없었다. 대선 국면이 다가와서야 밀린 숙제를 치르듯 반성문이 작성됐다. 이는 민주당에 대한 엷은 지지와 기대로부터의 이탈로 이어졌다. 대장동 이슈는 막판까지 그 기억을 잊지 않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둘째,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노동 정책은 총체적으로 실패하였고, 이 실패의 의미를 제멋대로 편취한 보수언론과 경제지의 공격이 주효했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 부동산 보유자에게는 자산 폭등을, 20~30대 다수에겐 열패감을 안겨주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권 시기 자산 격차는 크게 벌어졌는데, 누구도 제대로 반성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재명 후보는 막판에 수세에 몰리자 국민의힘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부동산 정책을 약속했다. 이재명 후보는 대대적인 주택 공급 확대와 규제완화, 세금 완화를 밝혔고, 특히 “종부세로 인한 억울함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4종 일반주거지역을 신설하고 용적률을 500%까지 상향해 재건축·재개발에 속도를 내겠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의 과오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지난 과오를 전 세대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산 격차를 더 심하게 벌리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약속은 아무리 자산 증식의 꿈을 안고 있는 젊은 세대라고 할지라도 신뢰감을 주지 못하거나, 혹은 기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위성정당을 포함해 180석이나 되는 의석수를 가지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이 약속한 것마저 지키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에 약속에 걸맞는 어떠한 행보도 보이지 않았고, 민주당은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으로 줄줄이 이어진 고위공직자 성폭력 사건의 당사자였다. 임기 내에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겠다는 약속은 내팽개쳤고, ILO 핵심 협약 비준 약속은 차 떼고 포 뗀 채로 이뤄졌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역시 민간 도급이나 자회사 간접고용으로 대체됐다. 그 결과 민주당은 시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환멸감을 안겨다주었고, 무능력과 거짓말쟁이 정당이라는 사실을 방증했다. 선거운동 기간 이재명 캠프가 아무리 윤석열에 비해 좀 더 선거 기술적으로 프로패셔널한 모습을 보였다고 할지라도, 이런 근본적 문제를 상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숨은 패배자들

주지하다시피 이번 대선은 민주당의 패배이고, 이재명 전 도지사의 패배다. 그런데 진짜 숨은 패배자는 따로 있다. 바로 문재인이다. 우리가 이 ‘숨은 패배자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책임과 과제를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윤석열을 낳은 일등 공신은 권영세도 장제원도 아닌 조국과 민주당의 86세대 정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젊은 날의 학생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우면서 거들먹거릴 뿐, 실질적으로 자신들 역시 국민의힘과 더불어 사회 엘리트 계급이라는 사실을 성공적인 부동산·금융 투기로 보여주었다. 투기는 자산과 고급 정보력을 갖출수록 유리한데,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권력을 십분 활용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에게 ‘운동권 출신’이라는 명함을 붙여주는 것은 이름 없이 활동해온 많은 운동권들에겐 치욕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떠들던 ‘민주화’ 같은 말들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했다.

이번 선거의 두번째 실패자가 있다면, 바로 이준석과 그의 극렬 추종자들이다. (물론 민주당에도 김남국 같은 유사-이준석이 있다) 이재명 후보는 민주당과 청와대, 선본 자신의 헛발질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힘을 짜내 국민의힘 후보로 나선 윤석열 당선자에 매우 근접하게 따라붙었다. 선거 막판 추적불꽃단 박지현 씨를 영입해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이전에는 발휘하지 못하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사표론이나 읍소에 흔들리지 않던 부동층 상당수가 여성 혐오에 대한 공포 효과로 결집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준석과 그의 극렬 추종자들은 젠더 갈등을 적극 악용하면서, 이른바 ‘이대남’의 사회적 불만을 시스템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끌어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20대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은 이윤 밖에 모르는 자본과 민주당·국힘 기성 정치세력에게 있지만, 이준석 대표는 20대 남성의 피해감이 여성을 향하고 있던 인터넷상의 쟁론을 정치적 언어로 교묘하게 치환함으로써 20대를 성별로 갈라치는 데 성공했다. 

선거일 직전까지 이준석은 10%포인트 차의 승리를 장담하며 떠들었지만, 결과적으로 0.73%포인트 차이에 불과한 박빙의 신승이었다.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윤석열 후보는 20대 전체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뒤지는 결과(이재명 47.8%, 윤석열 45.4%)를 얻었는데, 이는 지난 5년 문재인 정권이 20대들로부터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받은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과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이준석 대표 때문에 10%포인트 차이로 이길 걸, 1%포인트 차이로 이겼다”고 비판하고 있다. 

윤석열 후보는 20대부터 50대까지 여성들로부터 일관되게 외면받았다. 윤석열이 이준석의 이대남·반페미 젠더 갈라치기 전술을 적극 받아안으면서 언론은 이것이 마치 대세인양 떠들어댔지만, 정작 윤석열에게 간발의 승리를 안겨다준 것은 이전의 서울 지역 내 강남4구에 몰려있던 강력한 지지세가 한강벨트의 고가 아파트가 위치한 지역(마포, 용산, 성동, 영등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됐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한동안 민주당 지지가 높았던 충청권이 윤석열 쪽으로 돌아섰고(충청지역 유세에서 윤석열은 “충청의 아들”을 자처하며 선전했다),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연령대(40대)의 투표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청년층의 투표율이 떨어진데 비해 고령층의 투표율은 상승했는데, 결과적으로 청년들의 정치 혐오를 부추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20대 표심을 모두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떠들었던 이준석의 몰인식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준석의 지독한 선동에도 불구하고 20대 남성의 3분의1은 윤석열에 표를 던지지 않았는데, 마치 모든 남성이 피해자인 것처럼 선동했던 것에 비춰볼 때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상기한 이유에서 이준석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선거 전략으로 인해 자칫하면 윤석열에게 석패를 안겨줄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국힘 내부에선 벌써부터 이준석 손절론이 제기되고 있다. 남은 지방 선거와 내후년 총선에서 이들이 다시 전면에 나설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약 그가 당 대표 역할을 지속하고 이전과 같은 전략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국힘의 빠른 실패는 예고되어 있는 셈이다.

세번째 실패자는 소위 ‘민주진보’ 진영 내의 어용 지식인들이다. 스스로 ‘어용’을 자처하거나, 그런 비판을 위악적으로 즐기는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의 절망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몸소 보여준 장본인이다. 이들은 조국 사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문재인 정권 시기 사회운동의 곤경에 대해선 대체로 무시하거나 무지했고, 선거가 급박해지자 온갖 논거를 동원하며 비판적 지지를 강요했다. 문재인 정부의 눈에 띄는 실정들을 대놓고 찬양할 수 없었던 진보-어용-지식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남발하며, “촛불 혁명 2기 정부를 위해 결집하자”고 호소했다. 무엇이 촛불 항쟁의 정신이었으며, 민주당이 그것을 참칭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논리는 애써 무시됐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함으로써, 기득권 정치와 양분화된 엘리트 계급의 이전투구를 대신할 ‘대안 세력’을 양성하는 것을 폐기처분했다. 윤석열과 국힘 세력의 극악무도함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것만이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논거였다. 민주당과 신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기만에 대해선 내내 침묵했다.

네번째 실패자는 민주당에 줄 선 노동운동가들, 환경운동가들, NGO 활동가들, 올드 여성운동가들이다. 가령 강승규, 신승철 등 이재명 캠프에서 노동위원회를 구성한 이들에게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 시기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노조 조직률은 향상됐지만, 노동자 내 임금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고, 노동자운동의 조직력은 양적으론 성장했으되 조금 더 느슨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명박·박근혜 시기와 같은 강력한 노조 진압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보수언론이 호도하듯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철저한 노사정위 논의가 완전히 끝난 이후에는 ‘노조 배제’ 노선을 지속했다.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시기에 노동조합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다. 모든 노동조합이 건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어떤 일터는 노동조합이라는 견제 세력이 있기에 직원들의 권리가 지켜진다. 직장내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는 일터에서는 이런 일을 개인이 감당하는 것에 맡겨지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해고 위기나 장시간 노동에 비해 적은 임금에 억울할 때 평범한 직장인이 찾아갈 수 있는 창구는 노조 외에는 별로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득권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우듯 “노조가 망해야 나라가 산다”가 아니라, 더 많은 건강한 노동조합이다. 출세주의와 핑계로 무장한 가짜 노동운동가, 시장주의에 몸을 내맡긴 환경운동가들, 사회운동의 독자성을 폐기 처분하려는 무늬만 운동가들이 아니라, 더 많은 노동조합과 체제 전환을 위해 발로 뛸, 이름 없는 활동가들이 필요하다. 길을 잃은 운동이 기득권 정치의 하위파트너에서 벗어나, 사회변혁적 전망을 만들고 가시화해야 한다.

우리의 실패

마지막 실패자는 진보정당을 포함한 우리 사회운동 자신이다. 대안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사회운동의 성취가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로부터 선택받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이명박-박근혜 시기 사회운동은 거악에 맞선 ‘대단결’로 시민사회 내의 차이를 애써 무시하고 뭉개버릴뿐, 대안적인 정치 운동을 준비하지도 국힘-민주당 내의 차이를 분별하지도 못했다. 진보정당들은 혁신에 지지부진했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정치적 실용주의는 비현실적인 노선이었고, 결과적으로 실리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사회운동은 정당들의 정책 하위파트너로 취급될 뿐, 대안 세력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촛불 항쟁 이후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 내로남불 정치 엘리트들만의 5년, 혐오 정치의 5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희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체 판도를 뒤바꾸는데 실패했다. 

물론 저들의 실패와 우리의 실패는 다르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실패를 인식한다는 것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이전과는 다르게 대안을 만드는 것으로 연결된다. 요컨대 국제 정세의 혼돈 속에서 만성적이고 장기화된 신자유주의 정치 위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젠더 갈등을 여성 혐오로 치환하여 이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거두려는 이들도 이런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보다 단단하고 끈끈하게 사라지고 짓밟힌 목소리들을 연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는 이런 극단의 시대에 우리의 선택지가 ‘야만 혹은 변혁’으로 갈린다는 것을 일러준다. 2022년의 우리는 어떤 쪽이든 야만에 가까워보인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조금 덜 한 야만과의 연합을 편의적으로 택하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총체적 위기에 맞서, 서로의 잠재력을 결집하고 대항의 헤게모니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앞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미래의 꿈과 목표가 있는 ‘운동’은 결코 위축되지 않는다. 그러니 야만의 세계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꿈을 포기하지도 누군가에게 의탁할 필요도 없다. 같은 현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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