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 찟 푸미삭과 태국 정치적 맥락에서 그의 이미지

이 글 「찟 푸미삭과 태국 정치적 맥락에서 그의 이미지」는 삐야다 촌라원(Piyada Chonlaworn; ปิยดา ชลวร)의 「Jit Phumisak and His Image in Thai Political Contexts」을 번역한 것이다. (박소현 번역) 계간지 『마르크스주의 연구』 통권 65호(2022)에 실렸으며, 이 글이 담고 있는 태국 좌파 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널리 공유하는 차원에서 역자와 계간지 측 동의하에 공동 게재한다.

찟 푸미삭Jit Phumisak(1930~1966)은 1950년대 활동한 태국의 좌파 학자와 활동가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태국 절대왕정이 폐지되지 직전에 태어나 사회주의 열풍과 반미 감정의 시기에 성장했다. 수많은 저작 외에 찟 푸미삭을 당대 다른 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와 다르게 만든 것은, 그의 전설적인 생애와 때 이른 죽음이다. 197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젊은 활동가 사이에서 그는 문화 영웅이자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여러 다른 의제 아래서 다른 동인에 의해 구성되고 수정되어 왔다. 이 논문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기마다 달라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며 군부정권, 공산주의 조직, 학계, 활동가, 지방 정부가 어떻게 찟 푸미삭의 이미지를 구축해왔는지 살펴본다.

서론

1932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뀐 이래, 태국은 선거로 선출된 민간 정부와 쿠데타로 등극한 군사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군부 독재는, 1948~1957년 피분송크람Phibunsongkram 시기, 1958~1973년 사릿과 그의 파벌이 주도한 전제적 사릿-타놈Sarit-Thanom 시기, 2006년과 2014년에 탁신Thaksin 정부과 그의 여동생 잉락Yingluck 정부를 각각 무너뜨린 최근의 왕당파 군사정권 시기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각 독재시기마다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하고 사회혁명을 요구하는 시도가 있었다. 크레이그 레이놀즈와 리사 홍이 지적했듯, 각 시기 특히 앞의 두 시기에 “정치, 경제, 사회, 역사적 분석은 물론 창의적인 문학을 위한 분위기가 권력을 잡은 정권들의 성격에 따라 형성됐다”(Reynolds and Hong, 1983: 78). 태국 급진운동은 크게 세 세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1세대는 주로 중국계 공산주의자(까시안 떼차삐라에 따르면 룩찐lookjin)들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중국 공산당 및 베트남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들은 보워라뎃 반란(1933년 왕당파 보워라뎃 왕자가 이끈 군사 쿠데타 반란-옮긴이) 가담자들과 함께 정치범으로 여겨졌다(Kasian, 2001: 26-27). 그중 일부는 언론인과 작가들로 1930년 시암 공산당the Siamese Communist Party(1952년 태국 공산당CPT, the Communist Party of Thailand으로 이름을 바꾸는)을 공동 창당했다. 2세대는 타이계와 중국계 도시지역 지식인들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피분과 사릿 정권 시기에 출판매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소개하고 전파했다. 3세대는 1973년과 1976년 타놈 군사정권에 저항한 대학생 활동가들로 1976년 10월 봉기 중에 경찰과 민병대의 손에 진압당하자 정글로 가서 지하운동을 이어갔다. 태국 문화 시장에 마르크스주의가 인쇄 상품printed commodities의 형태로 들어선 것은 전후 짧았던 민간 정부 때였다(ibid.: 59). 도서 외에도 『마하촌Mahachon』 같은 급진적 신문과 『악손산Aksornsan』 같은 잡지 또한 수파 시리마논Supha Sirimanond, 아사니 폴짠Asanee Pholchan(1918~1987, 태국의 작가. 공산주의자. 여러 필명으로 시, 사회비평, 단편 등을 다수 발표했으며 공무원으로 일하다 공산당 입당 후 1953년 중국에 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했다-옮긴이), 타윕 워라딜록Thaweep Woradilok, 세니 사오와퐁Seni Saowaphong 같은 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손에 의해 발행되었다.

1950년대 좌파 지식인 중에서 찟 푸미삭Jit Phumisak(1930-1966)이라는 이름의 시인, 뮤지션, 지식인을 지나칠 수 없다. 찟은 절대왕정이 폐지되기 직전에 태어나 사회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의 반미(反美) 정서 속에서 자랐다. 그 또한 앞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당대 사회주의 작가 중 하나였지만 다른 사회주의자 및 마르크스주의자와 다른 점은 때 이른 죽음 후 금서가 된 그의 작품을 젊은 활동가들이 비밀리에 복제해 유통한 점이다(Reynolds, 1987). 2016년은 그의 50주기가 되는 해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이미지가 어떻게 공산주의자에서 혁명가, 학자, 최근에는 복권 당첨번호를 알려주는 영험한 혼령으로 변해왔는지 살펴보면 흥미롭다. 이 글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태국의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군부정권, 태국 공산당, 학자, 활동가, 지방정부 등 서로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구성된 그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찟의 삶과 저작을 검토하고자 한다.

클롱 프렘 중앙교도소(Klong Prem Central Prison)에 갇힌 찟 푸미삭과 동지들
삶과 저작

찟 푸미삭은 태국 정치사를 공부한 이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 언어학이나 문학 연구자에게는 농민과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재능 있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와 정치 활동가들에게 감히 태국 왕조와 불교를 비판한 진보적, 저항적 사상가로 기억될 것이다.

찟은 1930년 9월 25일 태국의 전형적인 중간계급 가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무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태어난 곳은 태국 동부의 쁘라친부리Prachinburi주이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16살에 방콕으로 이주했다.

찟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시를 다수 썼는데 대부분은 사랑, 연애, 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태국 영토였지만 지금은 캄보디아 동북부가 된 바탐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 바탐방에서 그는 크메르 언어, 역사, 고고학에 대해 배워 고대 비문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태국 고전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문학 연구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현실의 나는 너무 가난했다…책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라고 썼다(Wichai, 2003: 167). 이 시기에 쓴 시는 대개 사랑과 연애에 관한 것이지만 1946년에 쓴 시 한 편은 태국이 프랑스에 바탐방을 빼앗길 당시의 애국적 감정에 관한 것이다. 이 시에서 그는 태국이 다시 강력해진다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했다(Whchai, 2007: 5-6).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독서가였던 그는 1950년 쭐라롱꼰Chulalongkorn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학내외에 글을 다수 발표했다. 그중 찟 푸미삭 자신이 편집자로 있던 쭐라롱꼰 대학교 연감에 1953년 발표한 글 2편이 학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보수적인 학생들의 손에 연단에서 끌려 내려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일은 욘복Yonbok 사건으로 알려지게 된다. 연감에 발표한 글은 불교 승려들의 탐욕스럽고 물질주의적인 행동을 비판한 산문 한 편과 쾌락만 쫓다가 임신한 여성은 어머니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꾸짖는 시 한 편이었다(Samosorn 1953; Prachak 2015: 150-158). 이 글 때문에 찟 푸미삭은 1년 반 동안 정학 당했을 뿐 아니라 경찰로부터 공산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사게 된다. 태국 사회의 두 핵심가치인 불교와 여성을 비판했던 탓인데 이런 입장은 당시에는 공산주의로 간주됐다(Prachak, 2015: 150). 그러나 정학 중에도 그리고 후에도 찟은 태국 봉건주의, 제국주의, 왕조 중심의 역사를 비판하는 작품을 시, 기사, 문학 비평, 사회주의 소설 번역의 형태로 왕성하게 생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찟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오늘날 태국 봉건주의의 진정한 얼굴』(이하 『진정한 얼굴』)은 왕조와 지배계급 안에서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삭디나sakdina (‘논(畓)의 힘’이라는 뜻. 15세기 중반 아유타야 왕조 때 왕족부터 노예까지 모든 백성이 신분에 따라 받는 토지의 양을 정한 제도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분제와 봉건제를 상징하는 가치만 남았다-옮긴이) 곧 봉건적 가치에 기반을 둔 태국 사회구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1950년대 말 태국사회의 봉건적 잔재를 지적한다. 이 책은 크레이그 레이놀즈가 1987년 영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해외 학계에도 알려졌다. 『진정한 얼굴』은 1957년 한 저널에 처음 발표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서가 됐다. 1958년 친미 과두의 반공산주의 정책이 펼쳐지는 가운데 찟은 체포되어 투옥됐다.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바로 그해였다. 찟은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재판 없이 6년간 투옥되었다가 1964년 ‘무죄’ 평결을 받아 석방됐다. 그 후 찟은 동북부의 태국 공산당에 가담하러 정글로 들어갔다가 1966년 36살의 나이에 촌장과 민병대의 총에 죽음을 맞았다. 당국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기 때문에 살인은 정당화됐고 그를 쏜 촌장은 미 당국으로부터 소총과 하와이행 왕복 항공권을 보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찟의 시신은 제대로 화장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상세한 정황은 오늘날까지도 불확실한 채로 남았다(Reynolds 1987: 1장).

앞서 언급했듯 찟이 당대의 유일한 좌파 작가는 아니었다. 1932년 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까지 중국계 공산주의자와 좌익 지식인들이 책, 신문, 잡지 등의 인쇄매체를 통해 태국 지식인 사회에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했다. 그러나 찟을 이전 세대와도 이후 세대와도 다르게 만든 것은, 그의 학문적 저술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된 점 말고도 문제적인 생애 탓에 1970년대 중반 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문화 영웅이자 혁명가의 전범이 됐다는 점이다(ibid.: 14).

살아있는 동안 찟은 에세이, 시, 학술논문, 노래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는데, 태국과 크메르(캄보디아) 역사, 어원학, 문화기술지에 관한 학술작업, 태국 고전문학과 예술비평, 마르크스주의 소설 번역과 여성과 불교에 대한 비판과 옥중 생활에 대한 회고록 등이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국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며 농민과 노동 계급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담고 있다. 그가 작곡한 노래 16곡 중에서 <생다오 행 삿타Saengdao haeng sattha>(믿음의 별빛)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찟은 옥중에서 자신과 동지들이 어려움과 불의를 극복할 용기를 북돋기 위해 이 곡을 만들었는데(Wichai 2009, 153-154), 다시 논하겠지만 이 노래는 1970년대 중반 태국 민주화운동 이후 지금까지 사회 불의에 맞서는 시위대에게 상징적인 곡이 되었다.

태국의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1947년 피분송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쁘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1900~1983, 태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 1932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 태국 운동을 이끌었으며 1946년 총리로 선출되었다. 탐마삿 대학의 설립자이자, 태국 자유주의와 반군부 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옮긴이)의 민간정권을 전복했지만, 1945년부터 1958년까지는 태국 사회문학의 황금기이자 전후 태국 좌익과 민족해방운동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Flood, 1975: 62) 태국 좌익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 혁명에 영감을 받은 이들이 태국 공산당을 결성하고, 자유태국(곧 세리 타이Seri Thai) 운동(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연합군에 협력한 태국의 지하운동-옮긴이) 내 좌익 구성원의 지지를 얻으면서 시작됐다. 1958년 쿠데타 이후 사릿의 탄압으로 그중 다수가 단명했지만, 1946년에서 1967년 사이 적어도 23종의 급진적 출판물이 신문, 주간지, 격주간지, 월간지 형태로 발행되었다(Kasian, 2001: 150).

당시의 급진적 출판물 중에서는 월간지 『악손산』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49년 친쁘리디파 베테랑 언론인 수파 시리마논이 창간한 이 잡지는 태국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외국 저작의 번역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생각과 연구를 확산시키는 플랫폼이 되었다. 잡지의 필자 중 절반 정도는 우익 지식인이었으므로 완전히 좌익 일색은 아니었지만 꿀랍 사이쁘라딧Kulap Saipradit, 아사니 폴짠, 사막 부라왓Samak Burawat 같은 사회주의자의 기고문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사니는 인트라웃Intrawuth이라는 필명으로 불교와 문학을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화하는 지배계급을 비판하는 글을 여럿 썼다. 예컨대 그는 아유타야 시대의 유명한 고전이자 잘 생긴 왕자와 타국 출신 두 공주의 비극적 사랑이야기 󰡔릴릿 프라 로르Lilit Phra Lor』(로르 왕자 서사시)를 비판했다. 인트라웃은 이 이야기가 지배계급이 즐겨 읽는 얄팍하고 에로틱한 이야기일 뿐이며 인민을 왕조에 복종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의 다른 글에는 마르크스주의 입문, 중국의 사회주의자 루쉰의 작품 번역, 스탈린의 역사유물론에 관한 글 번역 등이 있다(Suthachai, 2006: 148). 아사니 같은 『악손산』의 전위적 필자들이 새로운 개념의 예술 곧 ‘삶을 위한’ 예술과 문학을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ibid.: 164). 『악손산』은 1952년 공산주의적 색채 탓에 사릿 정권의 손에 폐간되고 만다. 이 잡지는 단명했지만 찟 푸미삭을 비롯 훗날 진지한 사회주의자가 되는 수많은 젊은 독자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찟은 『악손산』의 초창기 필자들로부터 분석의 방법론뿐 아니라 글의 소재도 얻었다.

그렇다면 찟 푸미삭은 언제 어떻게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우익 기관인 쭐라롱꼰 대학교가 바로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그 사상을 수용한 곳이다. 1950년대 초 좌파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점점 더 주목받던 상황을 고려하면 우연은 아니다. 찟은 『악손산』에 실린 글에서 영감을 얻고 중국의 혁명가 루쉰에 대해 알고 존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찟 푸미삭(좌)과 그의 논쟁적인 글에 대한 신문 기사(우) (출처: Din Deng)
찟 푸미삭의 삭디나 문학 비판

찟은 주요 작품인 『오늘날 태국 봉건주의의 진정한 얼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다른 작품 또한 주목해볼 만한 가지가 있다. 이 절에서는 태국 고전문학에 대한 찟의 비평에 초점을 맞춰보겠다.

태국과 캄보디아 고전문학의 열독자였던 찟은 수코타이 시대부터 방콕시대 중기(13세기부터 1860년대) 사이에 쓰인 숱한 태국 고전문학 작품을 비평했다. 『진정한 얼굴』에서와 비슷하게 찟의 목적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왕족과 조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고전적인 운문 쓰기 방식을 비판하고 독자들이 이런 작품들의 사회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제일 먼저 찟은 하급 관료인 띰 수카양Tim Sukhayang(정식 이름은 루앙 팟타나뽕팍디Luang Phatthanapongphakdi)이 1869년 쓴 장문의 기행문 『니랏 농카이Nirat Nongkhai(농카이 기행)』을 비평했다. 이 글은 당시 태국의 조공국이던 라오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방콕에서 동북부 농카이로 떠난 군사 원정에 관한 것이다. 원정대에 참여했던 저자 띰은 그 원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묘사하고, 원정대 사령관이자 쭐라롱꼰 왕 시절의 권신 프라야 보롬마하스리수리야웡Phraya Borommahasrisuriyawong(추앙 분낙Chuang Bunnak)의 오판과 전략 부재를 지적했다. 자신이 비판당한 것을 안 사령관은 분노에 차 자신의 영향력으로 쭐라롱꼰 왕을 압박해서 띰에게 벌을 내린다. 기행문은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정의 명령에 따라 금서가 되고 불태워졌으며 띰도 형벌을 받고 투옥됐다. 찟은 띰이 윗사람을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용감했기에 처벌받았다고 지적했다. 상관을 비판하는 것은, 그에 볼복종하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태국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당시에 쓰인 니랏nirat이 대개 저자가 방문한 장소의 풍경을 묘사하는 내레이션과 고향과 연인을 그리워하는 주관적인 감정을 대개 에로틱한 표현을 동원해 담았던 데 반해 『니랏 농카이』는 당시 왕궁 안의 정치적 파벌을 건드림으로써 전통 양식을 뛰어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방문한 고장의 사회 경제 생활도 묘사하는데, 그런 부분은 찟이 보기에 사료적 가치가 충분했다. 한편 찟은 독자들에게 기행문을 재미로만 읽지 말고 그 사회적 함의까지 들여다보라고 요청했다(Jit[Sithi], 1975: 4-13). 또 한편 그는 이 작품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태국 사회의 위계와 후원-수혜patron-client 체제를 보여주는데 이용했다(ibid.: 89).

찟은 고전 『릴릿 옹칸 챙남Lilit Ongkam Chaengnam(충성의 맹세)』도 분석했다. 이 작품은 14세기 중반 아유타야 초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태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다. 이 시는 왕을 배신하거나 불충하는 자에게 내릴 무시무시한 저주와 재앙에 관한 것이다. 해마다 두 번 브라민 승려들이 주제하는 충성의 맹세 의식에 맞춰 쓰였는데 이 의식에서 관료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성스러운’ 물을 마셔야 한다. 앙코르 왕국의 영향을 받은 이 의식은 수코타이(1238~1438년 오늘날 태국의 중북부 지역에 영향력을 미친 왕국-옮긴이) 시대부터 1932년 쿠데타(찟이 평민의 혁명이라고 본)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Jit, 1994: 111-112, 116). 태국의 보수 학자들은 이 작품을 왕국 내 다른 지역 출신인 관료들을 통합하는 위대한 글로 보며, 의식 자체는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액막이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찟이 보기에 이 글은 태국 왕을 힌두 사상의 신왕God-King 곧 데와라차Devaraja로 격상시키고 충성의 맹세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왕권을 정당화하고 그에 복종하게 할 목적으로 쓰였다. 그는 왕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지는 이 의식은 사실 왕의 신민을 겁박하고자 열린 것으로 비이성적일뿐 아니라 일종의 착취라고 주장했다(ibid.: 102-113). 당시의 반공주의라는 맥락에 놓고 보면, 정부가 공산주의를 반란으로 여기는 자신의 시대와 고대의 반란을 비겨보려 했던 것이다(ibid.: 103).

찟은 위에서 분석한 궁정 중심적 문학과는 상반되는 대중소설 『라덴-란다이Raden-Landai(라덴과 란다이 이야기)』도 비평했다. 19세기 초 라마3세 재위기에, 찟이 삭디나(봉건) 관료로 여긴 경찰 수장 프라 마하몬뜨리Phra Mahamontri가 쓴 이 작품은, 인도계 거지 란다이와 두 여인 끄라-애Kra-ae와 쁘라대Pradae에 관한 이야기다. 란다이의 애인 끄라-애는 시장에서 단 과자를 판다. 쁘라대는 파타니 출신의 아름다운 말레이 여인으로 노예로 방콕에 끌려와, 역시 인도계일 듯한 목부牧夫 쁘라두아에게 아내로 팔려간다. 란다이가 쁘라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들의 불륜은 쁘라대의 남편 쁘라두아의 골치 아픈 대립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끄라-애가 질투심에 빠져 이 애정 관계에 끼어들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재미있고 풍자적인 문체에 에로틱한 장면도 일부 담긴 『라덴-란다이』는 당대의 조신과 평민 모두에게 사랑받은 것으로 보이며, 후일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찟에 따르면 이 소설이 특출한 지점은 당대의 관습적이고 편협한 주류 문학이 왕과 왕자 이야기만 다룰 때 등장한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찟은 저자의 “삭디나 문학의 관습적 양식을 부순 용기와 당대 관료로서는 보기 드문 진보성”을 높이 평가했다(ibid., 28-29).

찟은 『라덴-란다이』를 제외하고는 이런 종류의 문학이 태국 왕조에 복무하기 위해 쓰였으므로 ‘삭디나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그는 왕조가 얼마나 위세당당하고 순조로울지는 문학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달렸다고 지적했다. 독자가 이런 문학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곧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왕조의 영향력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의 목표였다(ibid.: 116).

태국 정치에서 찟 푸미삭

찟 푸미삭은 절대왕정이던 태국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기 얼마 전에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동안 태국은 피분송크람과 사릿의 독재 아래 있었다. 냉전의 맥락 속에서 초기에 정부 내 권력을 확립하지 못했던 피분은 미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피분과 사릿의 공통 의제는 반공이었다. 1958년 피분 정권을 전복한 사릿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도 반공정책을 이용했다. 정부 기조 아래서 공산주의는 불교와 왕조에 반하는 외래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이런 담론은 당국에 수상한 자들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는 권력을 손쉽게 내주었다. 태국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쁘리디 파놈용의 민간정부 아래서 잠시 표현의 자유를 누리다가 곧 지하단체가 되었다.

사릿의 쿠데타 이전에 찟 푸미삭은 태국의 사회 정치 생활을 휩쓸던 물질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와 기사를 여러 편 썼다. 당연히 이런 저술 활동은 1958년에서 1970년 사이 찟을 비롯한 좌파 언론인과 반왕당파가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명목으로 체포 투옥되는 빌미가 되었다. 레이놀즈가 지적했듯 찟과 다른 좌파의 사상과 활동을 공산주의 외래 세력의 것이라고 몰아간 사릿 정부의 시도는 그 사상과 활동의 위험성을 축소하고 태국의 실질적인 문제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방편이었다(Reynolds, 1987: 28-29). 랏야오Lard Yao 교도소에서 찟은 스스로를 “정치 시인”으로 일컬으며 독재와 친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는 시와 논고를 60편 이상 계속 썼다. 그는 교도소에서 여러 태국 공산당원을 알게 됐으며 그 인연으로 1965년 말 태국 공산당에 입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태국 공산당의 관계는 모호한 것이었다. 레이놀즈는 그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으며 태국 공산당이 찟의 사후에야 입당을 인정했기 때문에 찟은 살아서는 당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ibid., 38). 반면 솜삭은 찟이 공산당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는 등 여러 가지로 당과 관련 맺었고 여러 당 간부가 그를 잘 알았다고 주장하며 레이놀즈의 주장에 반론을 펼쳤다(Somsak, 1993: 22-36). 몇몇 태국 공산당원은 찟의 가족과 가까웠으며 그 덕분에 찟의 사후 유고를 입수해 출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찟은 태국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전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으며 찟과 다른 수많은 이들을 공산당에 입당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반공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 수업에서 태국의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찟 푸미삭 (왼쪽에서 세번째)
1970년대 중반 찟 푸미삭의 이미지

찟이 죽은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73년 10월, 태국은 타논과 프라팟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헌법 개정을 요구한 대중 봉기를 겪었다. 이 사건은 태국 정치사에서 최초로 대학생과 왕당파 대중이 이끈 민주화 운동이 승리한 일이었다. 그 후 태국은 민주주의의 환희에 찬 몇 년을 보냈고 공산주의 운동은 태국 공산당의 손에 되살아났다. 1970년대에 과두 체제 아래서 금지됐던 출판물이 복간되거나 재발행됐다. 『진정한 얼굴』, 『‘정치 시인’의 시편과 문학 비평Collected Poems and Literary Reviews by “Political-Poet”』, 󰡔티파콘: 예술가, 인민의 전사Thiphakorn: Artist, Warrior of the People』(찟의 문학 에세이 모음) 등 찟의 도발적인 작품들이 복간되고 숨겨졌던 그의 논문이 발견되어 공개되었다(Somsak, 1993: 29; Kengkit, 2014: 128). 찟과 다른 마르크스주의자의 작품은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재해석 되었으며, 이들은 그로부터 영감을 얻고 정치에 참여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할 각오를 다졌다.

청년들을 급진화하려는 태국 공산당과 신좌파의 시도에는 도발적인 사회주의 서적의 출판뿐 아니라 혁명 영웅의 신화-만들기도 있었다. 체 게바라가 가장 대표적인 예로 당은 그를 무장투쟁에 동참한 지식인으로 널리 선전했다. 그러나 이후 외국인에서 태국인으로 초점을 옮겨 찟이 “인민의 전사”이자 애국자, 태국의 게바라로 알려진다. 그의 전기 뿐 아니라 그에 관한 노래와 시가 당시 여러 유명 예술가들의 손에 만들어졌다.

1973년 10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태국 공산당이 선전을 퍼뜨리며 최전성기를 누리는 사이 학생들의 더해가는 급진주의를 못마땅해 하던 도시 중간계급의 적대 역시 커져갔다. 이후 이 중간계급은, 보수 지배층의 후원을 받아 새로 등장한 우파를 위한 사회적 플랫폼이 되었고 그런 긴장은 1976년 10월 6일 탐마삿Thammasat대학교 학생 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Prachak, 2015: 136).

그 시위는 원래 전 총리 타놈이 망명에서 돌아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우익 정부와 민병대가 개입해 대학생 100명 이상이 대량학살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3000명 이상이 체포되고 19명이 ‘폭동’과 국가, 종교, 왕조를 위험에 빠뜨린 죄로 재판을 받았다(Thongchai, 2002: 253-254). 그 결과 간신히 체포를 피한 학생 수천 명에게는 정글로 들어가 태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졌다.

태국 공산당과 10월 사건의 학생운동은 어떤 관계인가? 태국 공산당이 도시 지역 학생들 사이에서 급진주의를 종식시키고 그들이 정글로 들어가 무장투쟁에 가담하도록 이 시위를 이용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에는 확실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ibid.: 251-252). 학살의 직접적인 결과 태국 공산당은 수많은 학생을 입당시킬 수 있었으며 계속해서 찟에 관한 지하서적을 출판하고 아사니 폴짠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와 찟을 ‘혁명가 영웅’으로 만들었다(Thikan, 2014: 157). 정글에서의 혁명에 관한 찟의 시와 옥중에서 만든 행진가는 나중에 청년들 사이에서 불렸다.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생다오 행 삿타>는 독재체제와 싸우고 사회주의적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지하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을 고무했다. 10월 사건 이후 정글의 태국 공산당에 입당한 학생들은 이미 전설적인 찟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알기를 열망했다(Reynolds, 1987: 39).

찟 푸미삭을 공산주의자이자 혁명가-문화 영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연구가 지적하듯 찟의 이미지가 태국 공산당원과 1970년대 좌파 활동가들에 의해 창조되고 윤색되고 재생산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목적은 청년들을 당이 지도하는 무장투쟁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죽음 10년 후에 만들어진 찟의 이미지는 그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거나 물질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삶과 의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달리 말해 태국 공산당은 젊은이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전파하기보다는 영웅 만들기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던 듯하다(Chusak, 2014: 46-47; Kengkit, 2014: 117-120).

탈공산주의 시대의 찟 푸미삭

1976년 학생 봉기/학살 사건 이후, 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도시 기반 우익과 태국 공산당이 이끄는 정글-기반 좌익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태국과 중국 정부의 동맹 및 학생운동과 공산당의 핵심인물 간의 분열 등 몇몇 요인으로 태국 공산당은 좌파 지배층 사이에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Thongchai, 2002: 259-261). 동시에 태국 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쇠락하고 민족주의와 공동체 연구 같은 흐름이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는 태국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고 공산주의에 반감이 큰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을 위한 길을 닦아주었다. 이들은 혁명가로서 찟의 이미지를 태국 문학, 어원학, 역사를 주목한 학술저작을 남긴 학자의 이미지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일부 출판사와 학자들에 의해 찟의 작품 출판이 사회주의적 주제에서 언어학과 역사에 관한 다른 여러 주제로 옮겨가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달리 말해 태국 공산당의 몰락과 함께 찟의 이미지는 ‘탈급진화’ 탈정치화되었다(Kengkit, 2014: 118-126).

찟의 작품은 최근 학자들에 의해 젠더연구적 접근법으로도 분석되었다. 그의 여성에 대한 시선은 여러 시, 논문, 외국 소설의 번역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국 여성의 과거, 현재, 미래Adit pachuban lae anakot khong satri Thai”라는 글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틀을 이용해 전통적 삭디나 시대부터 당대까지 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분석했다. 그는 태국 봉건사회는 여성을 남성에게 성적 쾌락을 주는 존재이자 하인으로만 취급했으며 1932년 체제 변화 이후 중간 계급이 부상했음에도 태국 여성의 지위는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지배계급과 자본가의 경제 정치 사회 독점으로 인해 약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 분석틀을 따른 그의 여성 연구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태국 사회의 세습체제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찟은 태국 여성의 사회문제를 분석하는 체계적인 틀을 마련한 여성학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Sucheela, 1997: 142-143). 그의 저작은 학문 후속 세대가 태국 여성학 연구와 이론을 발전시켜나가는데 큰 영감이 되었다.

사콘나콘의 찟 푸미삭 동상 (출처: Din Deng)
현재 태국 정치에서 찟 푸미삭

2006년 탁신 친나왓을 끌어낸 쿠데타 이후 태국 정치는, 옐로셔츠로 알려진 반탁신파와 레드셔츠로 알려진 친탁신파 사이의 색상으로 코드화한 양극화 안에 갇혔다. 대부분 도시 중간 계급으로 구성된 옐로셔츠는 민주주의국민연맹(PAD: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과 귀족주의적 민주당이 이끌며 탁신의 가족정치와 부패 의혹으로부터 왕조와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탁신을 대변하는 반독재민주연합전선(UDD: United Front for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이 이끄는 레드셔츠는, 대부분 동원된 동북부 지역의 저소득층 서민으로 스스로를 귀족에 맞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평민이라고 본다. 이 옐로와 레드 간의 양극화는 정치적 분열일 뿐 아니라 태국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도시 중간계급과 농촌 서민 사이의 분열이며, 누군가의 지적대로 “정체성의 위기”이다(Nostitz, 2009).

이 시나리오에서 주변화된 약자 편에 선 전사로서 찟의 이미지는 다시 한 번 흥미롭게도 옐로셔츠와 레드셔츠 양자 모두에 의해 이용되었다. 2005년과 2006년 탁신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옐로셔츠-PAD는 현존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우리 왕을 위해 (독재와) 싸우자”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애국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찟의 <생다오 행 삿타>를 비롯 1970년대 태국 공산당과 좌파 학생들이 부른 여러 노래를 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래의 작곡자가 사실 반왕조 입장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PAD는 노래 가사 속의 “별들”을 국왕에 비유했다(Prachak, 2015: 10장)!

마찬가지로 레드셔츠와 UDD가 2006~2010년 군부독재와 군부가 후원하는 아비싯Abhisit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며 많은 사상자를 냈을 때도 다른 혁명가와 함께 찟의 노래가 독재에 맞선 ‘민중 혁명’과 ‘민주 전사’의 상징으로 불렸다. 이번에 찟의 이미지는 ‘귀족에 맞선 평민(혹은 신민)’ 또는 귀족을 무너뜨리는 평민이라는 UDD의 정치적 표현에 들어맞은 것이다. 나이 피 또는 쁘리디 파놈용 같은 전설적 사회주의자와 찟의 사진, 포스터, 책 등이 시위현장에서 팔렸는데 (1973년) 10월 14일 학생 봉기 때와 비슷한 시나리오였다. 그 결과 주요 인사들의 연설과 다른 수단을 통해 UDD는 시위마다 1만 명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다. 농촌 지역 서민 뿐 아니라 도시 지역 중간 계급도 상당수 시위에 참여했다.

또한 2014년 잉락 정부를 무너뜨린 쁘라윳 군사 체제 아래서는 반쿠데타 집단이 국왕모독죄를 비롯한 다른 여러 죄목으로 체포됐다. 그중 ‘새로운 민주주의New Democracy’라는 집단이 다른 피의자와 함께 국왕모독죄로 구금된 한 여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로 행진했다. 그때 경찰관인 그 여성의 아들이 다른 지지자들과 촛불을 켜고 <생다오 행 삿타>를 불렀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보자면 찟의 진정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노래는 권력에 맞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반대파의 상징이 되었으며 찟 자신은 서로 다른 정치적 반대파들에 의해 “자유롭게 떠도는 기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Chusak, 2014: 63-64).

(아이러니한) 이미지의 변화

최근 들어 태국 각지에서 시작된 지역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위협적 공산주의자였던 찟 푸미삭의 이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태국 공산당이 근거지였던 사꼰나콘Sakonnakhorn주의 중요 인물로 바뀌었다. 그가 살해당한 마을과 그의 동상은 그 지역뿐 아니라 타지에서 온 관광객까지 찾는 명소가 되었다. 47주기를 기념해 활동가와 학자들이 찟이 살해당한 농꿍 마을에 동상을 세웠다. 동시에 사꼰나콘주 관계 기관이 마을 입구에 ‘찟 푸미삭 추모길’이라는 큰 간판을 내걸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4월 5일에 그의 죽음을 기리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지역 사람들에게 찟이 인정받게 되는데, 지식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불법 복권의 번호를 일러주는 “영험한 혼령”으로서다. 지역 사람들은 존경을 담아 그를 “아짠 찟Achan Jit”(찟 선생님)이나 “짜오포 찟Chaopho Jit”이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은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나 조직폭력배 우두머리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복권 번호를 기대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은 담배와 찟이 좋아했다고 믿는 특정 상표의 맥주를 바친다.

이 글은 찟의 전기 일부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서로 다른 행위자들이 만든 그의 이미지를 검토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과연 무엇이 태국의 젊은 세대를 위한 찟의 영향과 유산인가? 그는 특히 군사 정권의 시대에 정치적 적대자들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수상 경력의 큭릿 쁘라못Kukrit Pramoj(1911~1995, 태국 왕가 출신의 정치인이자 학자. 1975~1976년 13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20세기 태국과 왕실을 그린 소설 『네 치세』가 널리 사랑받았다-옮긴이)과 비교하자면 찟이 가장 저명한 태국 작가는 아니지만 특정한 집단 특히 1973년 태국 민주화운동에서 참여하고 1976년 10월 이후 정글로 들어간 이들에게는 지식인 출신의 전설적 존재이자 정치적 태도로 남아있다. 직접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찟의 삶은, 비영리 독립 인터넷 뉴스 『쁘라차타이Prachathai』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 영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006년에 정치와 역사 특히 1973년 10월 민주화운동과 그 파급효과에 관한 진지한 책을 출판하기 위한 시도로 사메스키Samesky (Fa-deokan)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간헐적인 국가 검열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안 미디어는 반독재 운동과 언론의 자유를 위한 플랫폼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대중의 낮은 관심과 제한된 예산에도 불구하고 『쁘라차타이』는 지난 10년 간 상당한 독자와 지지자를 확보했다. 사회 정의를 외친 찟의 담론은 현재 사회저항 운동에서 자주 간과되겠지만 누군가가 말했듯(Kengkit, 2014: 117-137) 태국에서 정치적 투쟁이 계속되는 한 찟 푸미삭과 그의 다양한 이미지는 반정부 반체제 세력 사이에 기억되고 살아남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진정한 유산일 것이다.

2020년 9월 쭐랄롱꼰 대학교에서 열린 찟 푸미삭 탄생 90주년 행사 포스터 (Khaosod English)

번역: 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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