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의 선거 대응

IMF 외환위기 이후 들어선 김대중 정권(1998~2002년)과 연이어 등장한 노무현 정권 시기(2003~2007년)에 민중운동은 따로 또 같이 자신의 전망을 구획했다. 노동자운동은 이른바 ‘산별건설운동’을, 정치운동 흐름은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정세는 20세기 말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초국적 자본의 착취에 맞선 전 세계적인 반세계화‧대안세계화운동이 불붙은 때였고, 한국 사회 역시 이런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반세계화‧반전‧반미‧반신자유주의 등 전선에서 주체적인 조직 역량이 축적‧강화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정치전선 형성의 전략이 도출됐다.

동시에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와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개혁(시장화)의 후과를 도미노처럼 맞닥뜨렸다. 노동유연화이 심화되고 노조 탄압이 강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성취가 제한되기 시작했고, 대중운동에 대한 국가권력의 강력한 진압과 더불어, 지배계급 내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이는 바야흐로 ‘정치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와 동시에 진보정당은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면서 파국적 상황을 연출하였고, 이에 따라 좌파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는 이완되었다. 이는 시민사회운동의 정치노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반면 사회운동은 시의적절하게 대응하는 과제에 실패함으로써 그에 따른 열패감과 낙담은 가중되었다.

이 글에는 ‘사회운동’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운동(social movement; 社會運動)이 민중운동(民眾運動), 좌파운동(左派運動), 진보운동(進步運動), 시민운동(市民運動)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둘러싼 혼돈을 줄이기 위해 이 글에서는 가급적 기간의 일반적인 논법을 따라 사회운동 전반을 통칭할 때에는 ‘사회운동’ 또는 ‘시민사회운동’,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로 결집된 시민단체들은 ‘시민운동’, ‘시민운동’과 대별되어 좀 더 좌파적인 경향을 갖고 활동하는 운동조직들에 대해서는 ‘민중운동’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에 더 해, 인권운동사랑방과 한노보연, 플랫폼c 등 당 밖의 다양한 사회운동‧인권운동 단체들을 비롯한 경향을 특별히 언급할 때에는 ‘당 밖 사회운동’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 글은 지난 1월 19일에 열린 길내는모임 대선집담회 발제문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해당 발제문은 길내는모임 대선집담회 준비팀과의 토론, 플랫폼c 회원들과의 몇 차례 집단 토론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를 두 차례에 걸쳐 나누어 공개하고자 한다. 첫번째 글에서는 2000년 이후부터 퇴진 촛불 이전까지 선거에 대한 시민사회운동의 대응 궤적과 논쟁을 돌아볼 것이며, 며칠 후 공개할 두번째 글에서는 2016-17년 촛불 항쟁 시기와 문재인 정권 시기 시민사회운동 안팎의 논의를 통해 반성과 비판의 맥락을 짚고, 현시기 사회운동이 오는 대선을 통과하며 어떠한 과제를 마주하고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약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진보정당 22년

민중운동* 내에서 정치노선을 둘러싼 주류적 서사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민주노동당의 흥기와 분열, 2010년대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와 오랜 침체’로 정리된다. 민주노동당 ‘안’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 통일된 견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민중운동은 “통상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변혁적 지향을 갖는 기타 사회운동을 민중운동”을 지칭하는데, “80년대 인식지평에 있어서 민중운동은 현 체제를 혁명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으로 인식”(조희연, 2011)됐으며, 80년대 이후 민중운동 진영은 대체로 이러한 정의를 지향으로 받아들여왔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운동’은 흔히 말하는 ‘노동조합’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민주노총과 민주노총 안팎의 제 노동운동가 그룹들을 지칭한다.

우선 분열을 초래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을 제도(1인 다표제, 당직·공직 겸직 금지, 부문할당제 등)와 노선(코리아 연방공화국 슬로건, 의회 전술, 북한에 대한 태도 등)을 둘러싼 정파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은 각 정파의 이념·노선, 조직문화가 상이하여 양립하기 어려웠고, 과거의 대립 경험으로 인해 상호 불신과 고정관념이 강했으며, 당직·공직 후보 선출과 당론 결정을 위해 채택한 다수결제도가 파벌 간 경쟁과 대립을 조장했다고 본다. (정영태, 『파벌 – 민주노동당 정파 갈등의 기원과 종말』, 이매진)

정파 갈등을 요인으로 보는 시각은 민노당 내 파벌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념적 거리가 가까워지고, 민노당 결성 당시 정세조건 하 현실적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주요 의사결정권자들이 일시적 선거연합이 아닌 조직통합을 통한 생존과 발전 전략을 선택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대북관계나 인식 등 노선‧정책의 차이, 상호불신의 이미지를 해결할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태로 조직의 생존과 성공이라는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이뤄짐으로써 파국으로 끝났다고 평가한다. (정영태, 「라이벌 정치운동단체의 연합에 의한 정당건설 – 민주노동당의 사례」, 『한국정치연구』, 43호)

위와 같은 견해에 대해 일각에선 “진보정당의 갈등과 분열, 분당과 통합에 관해 ‘왜’라는 의문을 명쾌하게 해소하는 데는 많은 여백이 존재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치는 결국 갈등과 합의의 변증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합의나 갈등은 불일치에 대한 결과적 양태일 뿐, 어느것에 가치나 무게를 더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강병익, 「진보정당 파벌정치의 기원, 전개, 트라우마에 대한 심층보고서」, 『황해문화』, 73호)

당시 대다수 진보 지식인들은 소위 ‘자주파’에 일방적인 책임을 돌렸다. 손호철은 “만일 친북적인 자주파가 당내 다수파라는 현실로 인해 이 같은 개혁이 힘들다면 이번 기회에 친북적인 조선노동당과 그렇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갈라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노자 역시 “민노당이 분당이 되어서 나와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한 소위 좌파민족주의자(NL)들이 당을 떠나면 아마도 나도 당원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도 분당 쪽이지만 객관적으로도 이 길 이외에 없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진중권은 가장 적극적으로 분당을 선동하며 “종북파와는 애초에 만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민족자주당 만들어서 열심히 ‘조국통일사업’에 매진하게 내버려 두라. 뭐 하러 전혀 다른 정치적 목표를 가진 두 세력이 하나의 당에서 계파싸움이나 하면서 정력을 낭비해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내 정파 갈등이 심화된 이유에 대한 진지한 분석도 여럿 도출됐다. 공통의 목표가 부재해지면서 정파 간 갈등이 심화됐고, 당권교체 가능성에 대해 평등파가 좌절감을 겪으면서 당 활동 참여가 약화됐으며, 정파연합당의 효용성에 대한 당 안팎의 부정적 인식이 증대하면서 분당이 대안으로 부상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분석은 정파 갈등이 분당의 전제조건이었을 뿐, 다른 요소가 모두 약화되면 연합정당의 분열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김윤철, 「민주노동당의 분당 – 연대 유인의 다층적 약화와 대안으로서의 분당」, 『한국정당학회보』, 18호)

분열의 원인을 리더십 부재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통합적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당내 정파적 갈등과 대립이 심화(정책에 대한 논의들조차 정파적 대립 구도에 소환됐다)되었고, 당직‧공직 겸직 금지 규정으로 원내외 지도체계가 이원화되면서 의회주의에 대한 당의 견제가 결합하면서 유기적 소통이 이뤄지지 못해 중앙당-의원단 간 갈등도 심화된 결과, 정파 갈등이 전면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정경윤, 『다시, 진보정당 – 거대한 소수, 민주노동당 사례로 본 진보의 길』, 오월의봄) 이런 평가는 대체로 당시 자주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활동가들이 공유한다.

한편 일부는 저명한 진보 지식인들의 견해를 따라, 문제의 핵심이 “당 내부의 정파-패권구조, 특히 지배 정파와 헤게모니 집단의 ‘종북-패권주의’에 있다”며, 탈당파(평등파) 입장에 근접한 분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조현연, 「민주노동당의 분당 과정 연구 : 정파·제도·리더십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20호)

이에 반해, 정당 운동 바깥의 활동가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냉정한 입장을 도출하기도 했다. 당시 민주노동당 탈당이 섣부르다고 보았거나, 평등파의 주장을 일면적이라고 본 당 바깥의 좌파 정치조직들은 이러한 종북주의 타령이 일면적이라고 비판한다. 지역 당권 장악을 위한 ‘위장전입, 당비 대납, 집단 주소 이전’ 등 ‘자주파’의 비민주적 행태와 권력 독점에 대한 분노라는 점에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자주파에 대한 이념 공세를 통해 대선 실패나 민노당 위기에 대한 공동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사회진보연대, 「민주노동당의 혁신/분당 논의를 바라보는 시각 – 대중운동의 재건과 계급형성을 위한 운동의 재편이 필요하다」, 사회화와노동)

다른 한편 당 바깥의 좌파 정치조직들로부터는 ‘종북주의’라는 딱지를 활용해 자주파를 비판하는 것은 이념과 노선에 대한 정당한 논쟁이기보다는 마녀사냥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런 방식의 비판 논리는 기성 언론이나 자유주의 이데올로그가 주체사상, 스탈린주의, 레닌주의, 사회주의 등 신‧구 좌파 이념 전반을 공격하고 대안 사상을 봉쇄하게 만드는데 완전히 무방비하도록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진보정당운동의 우경화를 촉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 바깥의 궤적

오늘날 정치의 위기는 단순히 정당들의 위기가 아니다. 이는 당 밖 사회운동의 위기와 맞닿아 있으며, 노동자운동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마찬가지로 진보정당운동의 문제는 복수의 진보정당들로 갈라졌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진보정당운동 내 논쟁이 사라졌고, 내부 혁신의 동인이 소멸해가고 있으며, 당 바깥의 사회운동과의 접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다.

따라서 지금 국면에서 단순히 진보정당운동의 궤적을 돌아보는 것을 넘어 정당운동 바깥에서의 정치노선에 대한 논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민주노동당의 갈등과 분열, 통합진보당 결성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 대한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논의들에 반해, 진보정당운동 ‘밖’의 논의 궤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했다.

1990년대 급진적 학생운동이 점차 쇠락하던 중 시민단체 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 정치에 대한 시민운동단체들의 관점은 ‘개혁운동’에 방점을 찍고 있었는데, 1990년대 중후반에는 주로 의정감시의 형태로 펼쳐졌다. 이러한 의정감시운동은 1999년 정기국회에서 국정감사 모니터운동을 시작하면서 확대됐고, 이 과정에서 낙천‧낙선운동이 계획됐다. 2000년 1월 24일 500여 개 시민사회단체들이 ‘2000년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하여 66명의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했고, 2월 2일에는 2차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했다. 조희연(2000)은 이 운동을 “구정치의 위기”이자, “신정치를 위한 산고”라고 평가하며, 이 시기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생활정치의 활성화”로 규정한다. (조희연, 「‘정치지체’와 낙천‧낙선운동」, 『창작과비평』, 107호)

한편 좌파성향 사회운동단체들은 “정치권의 물갈이와 세대교체, 새로운 젊은층의 인입이 국민적인 요구이자 민중의 바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민중들의 정치적 요구를 왜곡”했다며, 이 운동이 남긴 후과를 비판적으로 진단한다. “생존권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처절한 투쟁은 총선시민연대와 정치권의 허구적인 공방 속에서 재갈물리고 질식당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들은 진보정당은 민중투쟁과 결합해야 대중적 힘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야 보수정당들의 선거법 협상에 기대하는 대기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낙천낙선운동을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방기한 시민단체들만의 캠페인에 그쳤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런 비판을 내용적으로는 수렴하되 공중전으로서의 위력까지 부정하지 않으려면, 전술적으로는 낙천‧낙선운동의 방식을 취하되 내용적으로는 외환위기의 민중 전가 책임을 기성 정치인들에게 묻는 방식으로 낙선운동을 기획할 수 있지 않았는지 반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2002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세운다. 이에 대해 민중운동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치방침에 대한 강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배타적 지지 방침이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일에 걸림돌이 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과 주체형성‧조직화를 제약하기 때문에, 대중조직의 정치활동을 강화할 계획을 실행하고, 정치조직과의 관계를 특정 정당과의 관계만을 일방적으로 맺는 것에서 탈피해 노동자계급에 기반해 정치활동을 펴고 있는 여러 정치세력과의 연대·협력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택, 「민주노조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검토」, 『현장에서 미래를』, 81호)

2002년 10월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노동자의힘, 사회진보연대, 전국연합, 자통협(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은 ‘민중연대투쟁 강화와 2002년 대선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공동투쟁본부(대선공투본)’ 결성을 위한 6차례의 예비모임을 가지면서 대선 시기 공동투쟁, 후보 선출 등 쟁점을 두고 논의하였다. 그러면서 반제·반신자유주의 전국 투쟁전선 구축을 위해 대중투쟁을 중심에 놓고 선거투쟁을 결합시킨 대중행동과 투쟁전술을 구사하기로 합의하고, 공동의 투쟁 과제와 선거 강령을 통해 보수정치와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투쟁할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울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결정적 문제는 후보등록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공투본 예비모임은 후보의 법적 등록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합의 도달에 실패했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평가들이 있었다. 우선 대선공투본이 대중의 자기통치력을 제고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제안된 것이라면, 의회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은 단지 운동정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 대 비제도정치로 상징되는 부르주아적 이분법의 정치를 허무는 것에 준거할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선 후보의 법적 등록 방식 등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어야 한다는 평가가 있다. 또, 후보 등록 방식 문제는 정치협상의 대상인 만큼 굳이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공투본, 민중경선보다 하위에 위치하는 목표이어야 했다는 평가도 제시된 바 있다. (이광일, 「’노동자의 힘’의 정치 궤적의 의미와 한계」, 『마르크스주의 연구』, 17호), (유영주, 「민주적, 계급적 운동진영의 2002 대선투쟁 평가 – ‘공투본/실천단’ 전술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미래를』, 82호)

2007년 대선에서는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 등 대중조직들이 ‘배타적 지지방침’을 세우고 공동으로 선거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다분히 상층부 중심의 대응에 그칠 뿐이었다. 그 외에도 시민사회운동은 차별금지법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주거권 운동,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등 현안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였지만, 대선 시기에 맞는 이렇다 할 전술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과 실망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명박은 역대급 표차로 당선됐다. 일부는 ‘감시’와 ‘비판’에 역할을 한정하였고, 일부는 거리에서의 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보정당은 참담한 패배를 겪어야 했다. 민중운동이 거의 단일한 후보를 냈음에도 민노당이 매우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은 사실은 단순히 문제의 원인을 ‘사분오열’이나 ‘역량 축소’로 평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민주당 정부 실정에 대한 심판 여론이 높아진 시기에 민중운동세력이 ‘대안 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하였고, 민주당과 함께 도매금으로 평가된 것에서 기인한다. (가령 2004년 노무현 탄핵 당시 시민사회운동 상당수는 친노진영과 함께 탄핵 반대 활동에 치중했는데, 이것이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 비정규직 열사 투쟁 등 노력들을 가려버린 것은 아닌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대선 직후 민노당은 소위 ‘종북 논쟁’에 휩싸여 내부 비판자들의 대거 탈당으로 분열하고 만다. 민노당의 위기와 분열은 민중운동 전반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에 따라 운동질서를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운동의 구심이 사라진 상황에서 민중운동의 질서재편은 요원한 일이었으며, 이후로도 지리멸렬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회운동의 디커플링

이즈음 세계 대안세계화 운동은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들썩였던 분위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촉발하면서 도시 점거 운동이나 반긴축 운동이 폭발했으나, 상대적으로 한국의 민중운동은 그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2008년 5~8월 광우병 반대 촛불 시위가 한‧미 FTA에 대한 불만 여론 속에서 폭발했으나, 전 세계적인 대안세계화 운동의 기조와는 동떨어진 분위기 속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광우병 반대’의 목소리는 FTA나 사유화‧시장화 저지의 구호로 연결되지 않았다. 운동세력은 전술적으로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운동의 지향과 비전에 대해서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이후에도 한국의 정세를 국외와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몇 차례 있었지만,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령 2011년 당시 희망버스 투쟁과 뉴욕의 ‘Occupy Wall Street’ 운동을 맥락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2011년 10월 8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오큐파이 시위대의 General Assembly 시간에 전화를 걸어 연대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 2011년 12월에는 시청광장에서 ‘희망텐트’ 시위가 기획되기도 했다. 이는 오큐파이 운동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광우병 촛불 시위에 모인 대중이 기존 운동에 대해 불신하였으나, 민중운동이 이들의 목소리와 접점을 찾는 과정에서 운동을 주도하는 역할까지 뺏기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광우병 촛불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진보정당의 득표가 전보다 더 높아진 것이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 이러한 견해의 근거이다.)

2012년은 민중운동에게 최악의 해였다.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의 출범 전까지 민중운동은 대중의 요구와 투쟁을 조직해 사회적 정당성과 영향력을 획득하고, 대중운동과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배질서에 맞서야 한다는 점, 나아가 민중이 우리 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을 공유해왔다. 그 때문에 정치적 자주성과 조직적인 독자성은 지배계급과 민중운동이 분별될 수 있는 핵심적인 기준이었다. 그런데 자유주의 세력(유시민 등 참여계)과의 연대로 탄생한 통합진보당은 그러한 기준을 해체시켰고, 민중운동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했다. 사회운동과 제도정치 내 정당은 차츰 ‘남남’처럼 되어갔다. 2012년 4월 통합진보당은 13석의 의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곧바로 총선 과정의 부정경선 이슈가 폭발하면서 둘로 갈라졌다.

2012년 총선‧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복지’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중된 경기 침체와 생산성 저하 상황에서 지배계급 양대 세력은 과감한 복지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민심을 사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것이 ‘뻥공약’에 불과했다는 점은 이후 명약하게 드러났지만, 대중의 이목을 조직하기엔 충분했다.

절대반지

반면 진보정당들은 말 그대로 사분오열했다. 겨울 대선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 무소속 김소연 후보, 무소속 김순자 후보가 각각 출마했다. 그마저 진보정의당은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았고, 이후 친민주당 성향의 단체들과 함께 ‘국민연대’를 출범시키고 문재인 후보를 국민 후보로 추대했다. 이정희 후보 역시 대선 기간 내내 박근혜 후보만 비판하다가 중도 사퇴함으로써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두 무소속 후보만 완주했으나 참혹한 성적표를 받았다. 민중운동의 입장에서는 독자성도 존재감도 상실한 뼈아픈 성적표였는데, 이는 2008~2012년 이명박 정권 5년간 ‘반MB 전선’이 ‘절대반지’처럼 작동했기 때문이다. (한 활동가는 당시 시민사회운동에서 팽배했던 반MB 전선이 색채가 옅거나 친민주당 성격의 시민단체들까지 포괄하려면 요구를 어느 정도 선에서 절제해야 한다는 식의 강박이 작동됨으로서 강제되었다고 회고한다. 예를 들어 ‘G20대응민중행동’이 출범할 때에도 ‘G20 반대’냐 ‘G20 대응’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는 독자적인 이념 지향과 아래로부터 대중운동을 기각한 ‘진보’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는 사이 당 밖의 사회운동은 쌍용차, 유성기업, SJM 등 금속 현장에 불어닥친 노조 깨부수기 프로젝트에 맞서 적극 연대하면서 선거 대응으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두었다. 진보정당들이 자중지란에 빠지면서 접속의 경로를 만들기가 점차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암울한 조건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고군분투했다고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정치 쟁점에 대한 ‘기권’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열패감과 정치적 우울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6년 총선은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를 겪은 이후 처음 치른 선거였고, 본격적인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를 실감하는 선거였다. 뼛속까지 박힌 갈등으로 인해 진보정당들의 연대‧연합을 도모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고, 민주노총 역시 기존의 배타적 지지 방침을 철회하지도 밀어붙이도 못하는 상태에서 애매하게 ‘민주노총 지지 후보’를 선정하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하였다.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를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했지만, 민중운동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심리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편 당 바깥의 시민사회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책협약과 공약 검증뿐이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정책협약들이 있었지만, 사실상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은 그에 상응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운동은 주류 정치의 정책 제안을 위한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성을 담보하는 사회운동단체에게 정책협약은 불가피한 것이고, 때때로 그것은 운동의 과정으로서도 유효할 수 있지만,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조직화’를 우회할 때에는 빠지기 쉬운 함정이었다.

전체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시기 시민사회운동은 ‘반보수 전선’으로 결집하였고, 덩달아 정치적 주도권을 ‘親(친)민주당’에 내주었다. 2012년 대선에서 주요 진보정당 후보들의 사퇴는 그 반영이며, 연립정부에서의 제도화 지분을 노린 정당들의 이해가 작동한 것이었다. 민중운동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복직 투쟁, 세월호 진상규명 등 굵직한 투쟁에 대해서도 민주당의 정치적 주도권과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했고, 민주노총 역시 개별 사업장들의 현안 해결을 위해 부득이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빈번하게 접속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당장의 필요에 의해 이뤄진 일들이지만, 정치노선이 부재하거나 단절된 채 실용적 선택만 이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치적 주도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글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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