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핑 : 중국 대도시 신빈곤계급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 역주 : 지난 4~6월 중화권 인터넷에는 ‘탕핑’, ‘탕핑족’, ‘탕핑주의’ 등의 신조어들이 등장해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글은 「躺平:城市新贫困阶级的非暴力不合作运动」을 번역한 후 적절히 교정한 것으로, ‘탕핑’에 대한 해설이다. 저자는 대륙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필자로, 짐작컨대 <적과 흑>에 나오는 줄리앙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저자 나름의 해석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탕핑’ 논란에 대한 입장 중 하나로 참고해볼만하다고 여겨 플랫폼c에 소개한다.

  • 글 : 줄리앙
  • 번역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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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핑(躺平)’은 이번에 처음 등장한 신조어는 아니다. 일찍이 2011년, 중국의 포털사이트인 바이두 커뮤니티(百度贴吧)에 ‘반혼바(反婚吧)’라는 게시판이 만들어졌을 때 이미 등장한 바 있다. 2016년에는 연예인 팬덤 내부에서 ‘탕평임조(躺平任嘲; ‘아무렇게나 누워 비웃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역주 : 당시 이는 “열성 팬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냥 비웃기나 해라” 정도의 뉘앙스를 가졌다. 예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등장했다면 애꿎은 스타일리스트 탓하지 말고 그냥 누워서 빈정거리기나 하자”는 뉘앙스를 뜻했다.] 또 선전의 임시직 노동자 집단 ‘싼허다션(三和大神)’의 이틀 일하고 닷새 쉬는 삶(做二休五)에 대한 조롱과 자조 섞인 풍자 글들에서 ‘탕핑’은 이들 대도시 신세대 농민공들이 구조적인 착취에 저항하고자 취했던 일종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기도 했다.

[역주 : ‘싼허다션’의 “이틀 일하고 닷새 쉬는 삶”은 결코 유유자적하는, 아름다운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연안지대의 대도시에서의 일자리도 그만큼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 나아가 신세대 농민공들이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삶을 개선하기 어려워 자조하게 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싼허다션의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 《싼허에는 사람이 있다》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부터 ‘탕핑’은 이미 ‘네이주안(内卷)’식의 삶을 반항하는 것으로 부여됐다. 노력·분투[역주: 한국식으로 말하면 “노오오오력”]하는 서사를 환멸하는 함의를 갖는다. 한데 이번에 ‘탕핑’은 처음으로 인터넷상에서 광범위한 토론을 낳았다. 2021년 4월 한 네티즌이 바이두 커뮤니티 “중국인구 게시판’과 웨이보[역주: 중국에서 널리쓰이는 sns플랫폼] 등 여러 플랫폼에서 포스팅하고 자신의 탕핑 생활과 탕핑 철학에 대해 공유했는데, 마침 이때 중화권 인터넷에서는 바로 ‘네이주안’에 대한 토론과 자본 비판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이미 음식배송 플랫폼 노동자나 폭스콘 노동자, IT기업 노동자들의 돌연사 등 문제에 대한 토론 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청년들은 마땅히 탕핑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글이 매우 빠르게 인기 검색어에 올라 대중들의 정서를 파고들었고, 인터넷에서 ‘네이주안’에 이어 또 다른 신조어 유행을 낳았다.

[역주 : ‘네이주안(内卷)’이란 클리포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사회를 참여 관찰한 뒤 내놓은 저서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 Agricultural Involution』에서 제기된 involution이란 개념에서 유래한다. 역사학자 프래신짓트 두아라(Prasenjit Duara)는 『Culture, Power, and the State: Rural Society in North China, 1900-1942』에서 근대 중국 역사의 바퀴가 안으로 involution/内卷/퇴행했다고 묘사한 바 있다. 한데 지난해 인류학자 샹뱌오(项飙)가 중국 내 진보적인 언론으로 알려진 펑파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개념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식사회의 쟁점이 되었다. 중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지 않으면, 집정당의 고강도 억압과 내수 활성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되지 않아 더우반(豆瓣)의 ‘탕핑소조(躺平小组)’계정이 폐쇄되었다. 인터넷상에서 탕핑에 대해 토론하는 계정들은 갑작스레 계정 중지를 맞닥뜨려야 했다. 탕핑이란 말이 일단 한 번 등장하면 바로 국가와 ‘자본’이 연합한 억압을 맞닥뜨려야 했고, 이내 사람들은 ‘탕핑’이 토론이 허락되지 않는 어휘가 됐음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탕핑은 왜 이토록 거대한 토론을 낳았을까? 또 왜 그토록 빠르게 중국어권 인터넷에서 관리층의 제재를 받게 됐을까? 이 글은 이 문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역주: 더우반은 영화나 책, 게임에 대한 평론을 올리는 중국 온라인 플랫폼이다. 다른 플랫폼들보다 사회비판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편이고, 영화에 대한 평가도 전반적으로 냉정한 편이다. 국뽕 색깔이 매우 옅다.]

 

탕핑 : 도시 빈곤계층의 최저한도 파업

탕핑은 무엇인가? 가장 통속적인 해석을 하자면 탕핑은 바로 ‘분투(奋斗)’하고 싶지 않고,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먹고 마시고, 자고, 스마트폰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계 범위 안에서 매우 보편적인 행위이다. 가령 일본에도 욕망이 극히 낮은 사람들이 있고, 한국에도 지하실의 ‘기생충’이 있으며, 영국에도 니트족(NEET)이 있다. 중국에서도 10년 전 혹은 그보다 전에도 다리(大理)에 은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향촌 사구 생활을 하는 히피족 청년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역주 : ‘분투’의 사전적 의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노력함”이다. 중국 관방에서는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등장한 이후 보다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고, 반대로 인터넷 상에서는 젊은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분투’에 대한 의문 역시 증대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탕핑이 중국어권 인터넷을 휩쓸고 일용직 노동자 집단에 의해 널리 사용될 때 그것이 집중시키는 정서는 도시 품팔이 노동자계층의 보편적인 권태를 드러낸다. 이 계층은 격자공간에 갇힌 인터넷기업 노동자와 미디어기업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임시직과 시스템에 의해 구축되어온 청년들을 포괄하며, 고학력임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잇는 실업자들까지 아우른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정서는 바로 노력과 분투에 대한 환멸이며, 노동을 통해 자기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다시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몇 년 간, 포시(佛系;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태도와 목표를 갖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 문화상실(丧文化; 목표와 희망을 잃고 퇴폐와 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감정도 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무감각한 삶을 뜻함), 모위(摸鱼; 손쉽게 이득을 취하는 행위)、다공런(打工人; 품팔이 노동자)、탕핑(躺平) 등 인터넷 인기검색어가 무더기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 사람들의 토론을 가장 많이 이끌었던 ‘네이주안’이라는 어휘가 결합되어 도시 사람들의 무거운 정신적 부담을 가리키고 있다. 탕핑은 단지 ‘게으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환기시킨다. 시스템을 바로 잡을 수는 없고, 996룰(996制) 노동 역시 피할 수 없으며, 자기 목숨의 대가로 해도 출신의 격차를 바꿀 수 없는데, 왜 ‘탕핑’과 ‘모위’를 택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자신이 기꺼이 자본주의의 우수한 나사못이 되게 내버려두진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임스 C. 스콧의 대표작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는 동아시아적 맥락에 부합한다. 스콧이 연구한 것은 본래 말레이시아 농민들의 저항적인 일상 형식이었다. 그들이 강자에 맞서 차용한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게으름 피우고, 모르는 척하고, 도망치고, 순종하는 척하고, 훔치고, 바보인 척 척하고, 비방하고, 불지르고, 몰래 파괴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 설령 자오딩신(赵鼎新) 같은 학자들은 이와 같은 일상 행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조적인 저항인지 반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동아시아 청년들이 이와 같은 형식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포스트 혁명 시대’에서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았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은 도시 탕핑의 한 쌍인데, 그것은 물론 시스템의 문제를 제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죄송하지만 난 당신들이 원하는대로 살 수 없어요. 이 참혹한 네이주안 놀이와 작별할께요”라는 태도를 선포하는 셈이다.

‘모위’ 역시 은밀한 태업을 뜻한다. 그렇다면 ‘탕핑’은 일종의 최저한도의 파업이라 할 수 있겠다. ‘탕핑’은 개인이 자본의 작동 범주 내에서 생산하는 능력을 멈추겠다는 것이며, 이는 휴식과는 다르다. 휴식은 숨을 돌리고 다시 계속해서 생산력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탕핑’은 휴식에 그치지 않고 경쟁과 자본을 위한 품팔이 노동에 맞서 거절하겠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일종의 노력과 분투의 염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파업 없는 국가 제도의 파업 형식이며, 그 때문에 국가와 자본이 연합한 억압을 맞닥뜨린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행위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탈중심화의 민중정치의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설령 탕핑이 처음 인터넷에서 유입된 것이 결혼에 대한 공포나 팬덤, 저욕망 등과 관련되기는 했지만, 이번에 인터넷 여론을 폭발시킨 것은 도시 빈곤층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에 있다. 여기서 빈곤이란 경제적인 빈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대도시에서 밤낮으로 일하며 지친 젊은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정도의 빈곤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정신적인 빈곤이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빈곤, 인생의 척박한 울타리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빈곤을 칭하기도 한다.

중복과 네이주안의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하나하나의 노동자들(打工人)을 규범적으로 양산하고, 도시화의 고속 추진은 혼잡스럽고 비좁은 셋방들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이웃간 관계나 공공이 통치하는 사구(社区; 커뮤니티)는 사라지고 있다. 청년들이 스스로 만든 독립적인 공적 공간은 높은 월세와 가도판사처[역주 : 街道办事处는 동사무소 정도의 행정기관]나 이웃의 제보[역주 : 청년들이 모여 너무 시끄럽게 한다는 식의 불만일 수도 있고, 혹은 뭔가 수상쩍은 일을 한다며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로 소멸했다. 이로 인해 남은 것은 원자화된 개인의 삶뿐이고, 대부분의 도시 불안정 노동자들은 생존과 반복된 노동·작업에 지쳐버렸다. 임시직 노동이 나날이 보편화되고, 경제는 구조적인 구조조정기에 접어든 지금, 실업과 빈곤의 위험은 날로 커지고 있다.

 

‘개똥 같은 일’에 맞선 신경증적 반응

탕핑의 광범위한 전파는 거시적인 상승 통로가 막혀 있고 노력 분투 서사가 파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개똥같은 일(狗屁工作)’이 누적되면서, 임금생활자들은 일하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소위 ‘탕핑’은 노력에 대한 환상을 거절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개똥 같은 일에 대한 스트레스성 반응이기도 하다. 가령 이런 것일 게다. “나는 비록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겠지만, 최소한 잠시라도 나는 가장 낮은 한도의 파업이라고 하고 싶고, 개똥 같은 일을 할 권리를 거부하고 싶다.”

일상 생활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사장들이 내뱉는 “열심히 일하면 긍정에너지(赋能)를 갖추게 될 것”이란 식의 말에 염증을 느끼는 것은 현실의 삶에는 개똥같은 일(狗屁工作)이 가득하다는 점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똥같은 일들은 긍정에너지와는 무관할뿐만 아니라, 인터넷 시대 새로운 스태그플레이션이 가져온 반복적이고 저효율의 막노동이 현실에 넘쳐난다. 따라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자신의 저서 『Bullshit Jobs : A Theory』[멍청한 일 : 이론]에서 이렇게 썼다.

“실제 소련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당 40시간, 심지어 50시간씩 공문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많아졌지만, 유효 근로시간은 불과 15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케인즈가 예측한대로, 여타의 시간은 조직 내 토론회에 참가하고 사기를 북돋는 것에 보내거나, 페이스북에 개인자료를 갱신하고, TV 셋톱박스 다운로드에 쏟았기 때문이다.”

[사진: Welcome to the Jungle]

이런 일들은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기에 편리하고, 질서의 안정을 위협할 만큼의 여유에 다다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업무들은 결코 그리 많은 지적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단지 충분히 말을 잘 듣고, 사리분별을 하며, 뼈빠지게 일하면 된다. 학부를 졸업하지 않은 대학생들이라 해도 절차를 익히면, 개똥같은 노동을 처리하는데 있어 박사 학위자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기업의 홍보 전략은 우리에게 일을 많이 할수록 삶의 가치도 더 커진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기를 회피하는 것은 기업에서의 많은 일들이 자본의 성장에만 유용하다는 점이다. 기업 내 노동은 실제 사회와 개인에게 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며, 사회안정의 디딤돌이며, 기업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필요한 부품 역할을 할 뿐이다.

임시직(비정규직) 일자리가 성행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실습생(인턴)들을 저렴한 노동력으로 고용하고, 그들에게 순 소모형 일을 내맡긴다. 노동자들,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마음 속에서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이상과 현실 상황의 격차가 균형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자아실현적인 서사로 성장한 개혁개방 세대 청년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전파했던 노력이 성공을 이끈다는 식의 말은 파산했다. 집값은 해마다 오르고, 물가 역시 오르지만, 임금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에 못 미치고, 사회계층은 고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력에 기대어 운명을 바꾸는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아주 희소해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직장에서 야근을 해도 임금은 그대로이고, 스스로 목숨을 바쳐도 계층 상승을 이루기는커녕 병만 늘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이뤄진 빅테크 기업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국유기업에서는 비록 일이 바쁘더라도 일의 강도는 사기업만 못하다. 사기업, 특히 IT기업들에서 직원에 대한 관계는 일종의 돈을 벌어다주고 목숨과 바꾸는 관계와 같다. 받는 임금은 상대적으로 높지만, 그 대가는 휴일이 없는 연장근무다. 그것은 기계를 대하는 인간의 관계를 의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국가박물관에서 일하는 임시직 노동자. 하루 종일 마르크스에 관한 삽화 앞을 좌우로 왔다갔다한다. [사진: 홍명교]

하지만 국유기업은 처세술(노력과 경쟁)이라는 또 다른 권태에 눌려있다. 물론 사기업의 노동 강도가 더 세긴 하지만, 사기업에서의 경쟁은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진행되다보니 노력하면 도약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국유기업에서는 많은 경우 첫번째로 보는 것은 노력도, 업무 능력도 아니다. 당신이 이 환경에 적응하는 수준, 한 마리의 카멜레온이 될 수 있는 수준을 본다. 다시 말해, 국유기업 내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기술이나 능력이 아니라, 교제 능력이다. 그 사람이 인간 사회에서의 접대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본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국유기업 내에서는 연공서열과 윗사람 말이 무조건 중시되는 상황이 사기업보다 훨씬 보편적이다. 당신의 출신이나 집안 내력, 인맥 등이 당신의 재능에 비해 더 유용하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청년들은 노력에 대한 환멸감을 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을 의심하지만, 이는 그들이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노력해봤자 계층 상승을 이루거나 성공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윗세대에 비해 우리는 물질적인 조건이 더 좋아보이지만, 오히려 더 피폐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상실은 보다 은폐되고 있으면서도 고질적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척박함이나 전쟁포화가 가져온 상실이 아니라, 하루하루 높은 집값과 저임금, 시스템 내의 악성 경쟁에 의해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데서 오는 절망감이다.

탕핑소조를 발의하고, 탕핑운동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결코 향촌과 작은 도시 시민들이 아니다. 바로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 등 1~2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집단이며, 그들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80·90년대생(빠링허우, 지우링허우)가 많다. 대학 교육을 받고 졸업한 후 빈곤을 맞닥뜨린 그들 개개인은 각성하여 더 이상 스스로 현실의 처지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단지 5.4시기의 떠들썩하게 철로 된 방 안의 잠든 사람들을 깨웠던 일군의 지식인들만은 아니다. 그들은 도시 안의 수많은 월급쟁이들이며,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탕핑은 왜 강력한 탄압을 맞닥뜨렸나

‘네이주안’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뜨겁게 회자되었던 것과 달리 ‘탕핑’은 한 번 널리 화제에 오르내리자 곧바로 플랫폼의 강력한 제재를 맞닥뜨렸다. 특히 더우반(豆瓣)과 같은 강력한 자본이 없는, 공권력에 의한 중점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사이트의 운영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 나섰다. 그들은 화살에 놀란 새처럼(惊弓之鸟) 연속적으로 여러 개의 탕핑소조 계정을 정지시켰다. 탕핑에 대해 토론하던 많은 네티즌들 역시 4일에서 15일 가량의 정지를 먹었다. 토론할 가치가 있는 것은 네이주안과 탕핑은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네이주안은 활발하게 살아있고, 탕핑은 플랫폼 관리자들에 의해 갑작스레 엄격한 징계(严阵以待)를 맞닥뜨리게 됐냐는 것이다.

탕핑은 행동력을 갖춘 어휘이기 때문에, 이미 ‘불만을 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행동을 수반한다. 공권력과 자본이 걱정하는 것은 탕핑이 임금노동자들이 어떤 ‘비폭력 불복종’의 공동체를 결성하여, 실질적으로 파업의 동맹형식을 쟁취하는 것에 있다.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참여 문턱이 매우 낮은 방식(당신은 그저 눕기만 하면 된다)이기 때문에, 어느 틈에 권위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의 일상적 저항의 욕구와 맞닿게 된다. “약자의 무기”란 또한 중국어권에서 꽤나 실감나는 표현이기도 하다. 

베이징의 거리에서. [사진: 홍명교]

따라서 오늘의 탕핑은 이미 일종의 정서적인 어리광이 아니라, 사회 행동의 잠재력을 감춘다. 그것은 대기업(특히 인터넷 빅테크) 자본의 축적 과정에 영향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함께 “최저한도의 파업”을 운용할 수도 있다. 안정을 유지하려는 플랫폼 관리자가 보기에 이는 당연히도 위험의 신호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5월 말부터 6월 초 사이에 중국어권 인터넷 상에서 탕핑에 대한 강력한 삭제의 물결이 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강력하고 과격한 반응은 한편으로는 계획적인 지령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는 난폭스러움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플랫폼 막후에 있는 상층 유령들의 공포를 동시에 드러낸다. 반대로 그것은 탕핑의 뒤에 숨겨진 행동의 잠재력을 증명한 것이기도 하다.

탕핑의 소조들은 삭제되었고, 탕핑이라는 말은 제재받을테지만, 심원한 권태의 환경은 여전하다. 탕핑은 여전히 대지 위에 거대한 물결처럼 존재할 것이다. 《탕핑주의자 선언(T平主义者宣言)》를 통해 “만국의 탕핑자들이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정치 패러디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유격전과 유사한 당대 노동자들의 저항 형식이기도 하다.

다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을 수 있다. 가령 탕핑자의 연맹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일종의 행동력을 갖춘 탕핑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은 쉽사리 가능할까? 그 이면이 가리키는 것은 전 세계 도시 빈곤계층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권위주의적인 언어적 환경에서 객관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격렬한 정치 행동에 참여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치모델을 취할 수 있을까. 보다 많은 탕핑에 적합한 상호부조 조직을 만들 때, 도시 빈곤계층에게 더 많은 혜택을 만들고 계급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협력의 공간을 만들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많은 연결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기타 동맹들의 친밀한 상호협동을 통해야, 보다 행동력 있는 공동체 정치를 만들 수 있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의 코로나바이러스 격리병동 건설현장에서 잠에 든 노동자. 사진: 게티이미지]

우리는 ‘대국굴기’의 스토리텔링을 마주하고 있지만, 태양이 비치지 않는 그늘은 있다. 태양이 강할수록 보이지 않는 그늘은 깊어질 수 있다. 비록 탕핑을 자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날 여전히도 일하러 가야하지만, 그것은 이미 일종의 “지긋지긋하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플랫폼의 심사위원들은 화살에 놀란 새처럼 탕핑소조를 삭제해버렸지만, 이는 일부 청년들이 환멸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만 못하다.

물론 그들도 잘 알 것이다. 달리는 고속열차이니 더 빨리 달리자는 생각 뿐이고, 특실칸에 앉아 있는 승객이라면 꼬리칸의 사람들을 동정하기란 어렵다. 만약 한 사회에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모두가 함께 돌본다면, 많은 인민들은 노력을 통해 당당한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투를 통해 삶을 낫게 만들 수 있고, 40~50대까지 분투하지 않아도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다. 그러면 탕핑이라는 말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분투하여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노력과 분투에 대해 환멸하며, 노동을 통해 운명을 바꾼다는 말에 대한 신념은 동요한다. 이것이 탕핑의 심리적 원인이다. 더구나 이러한 동요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 그러니까 최소한 구호상 “노동자를 존중한다”는 나라에서는, 사실 위험의 신호이다. ‘탕핑’과 “출산의 쇠퇴”는 사실 동전의 양면이며, 굴기 신화가 야기한 길고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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