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의 싸움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6월, 이들의 파업에 대해 건보공단 정규직 직원들이 공정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직고용‧직영화 철회를 요구한 일이 있었다. 정규직 직원들의 요구는 거세서, 고객센터 상담사 직고용 반대 파업을 하자며 2000명이 넘는 정규직 조합원들이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미 유사한 일이 국민건강보험공단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이 적용된 인천국제공항, 서울교통공사, 한국도로공사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공정’은 어쩌다 불평등을 옹호하는 담론이 된 걸까?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 뒤에는 ‘능력주의’가 있다. 능력주의와 공정성 문제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이슈로 떠오른지도 이미 수년이 지났고, 이 현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능력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개인의 능력에 비례해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이 가진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혈통이나 성별과 같은 태생적 조건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보상해주는 것이 공정하지 않나? 능력주의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능력주의가 아니라면 이 사회의 보상체계를 어떤 원리로 작동시켜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능력주의를 넘어설 대안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능력주의에 관한 몇 가지 쟁점을 짚고자 한다. 이 글이 초보적인 수준의 가이드 역할을 하길 바란다.

 

능력주의 논의의 세 층위 : 기여, 능력, 측정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 자체는 1950년대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처음 만들었지만, 개인의 능력에 비례해 보상하는 사회 시스템의 구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정의론에서 기여에 비례하여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비례적 정의’라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자원‧관직‧명예의 분배에 관한 정의, ‘분배 정의’를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겼는데, 각자에게 공평한 분배의 몫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기여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최원, 201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절대적 평등이 아니라, 기여도에 따른 상대적 평등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즉, 비례적 정의는 그 원리상 불평등한 배분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그런데 분배 정의를 둘러싼 난점은 무엇을 ‘기여’로 볼 것인가에서 발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민은 자유, 부자들은 부유함, 귀족은 미덕 등 서로 다른 사회세력이 각자 다른 덕목을 기여의 기준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할 것이라 보았다. 오늘날에 적용하면 아마 자본가는 투자금을, 엔지니어들은 기술을, 노동자들은 노동을 기여의 기준으로 삼자고 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 결국 무엇이 분배의 기준이 되는 ‘기여’인가에 대한 합의는 사회세력간 투쟁과 경합에 의해 (일시적으로) 합의될 수밖에 없다.

‘혈통’도 자격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재능과 노력에 의해 획득 가능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의 ‘능력’은 여러 기여의 기준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보상체계에서 가장 상위에 두자고 제안한다. 이제 일반적으로는 세습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을 능력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혈통과 신분을 제외하고 개인의 능력을 기여의 기준이라고 본다고 해도 어떤 ‘능력’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볼지에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암기력인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인가? 돌봄을 잘하는 능력인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 과정에서의 논쟁도 어떤 능력을 가치있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포함한다. 수년간 쌓아온 실무 능력은 왜 ‘능력’으로 쳐주지 않고, 시험을 잘 보는 능력만을 ‘능력’으로 인정하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나날이 축적된 노동이야말로 업무와 연관성조차 불분명한 공기업 입사 시험 성적보다 훨씬 명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일 수 있지 않은가(박권일, 2020: 139).

그럼에도 우선 초중고 교과과정의 이해를 한국사회에 필요한 능력으로 합의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해 정도는 어떻게 측정하는 것이 가장 올바를까? 객관식 시험인가, 주관식 시험인가? 수능인가, 내신인가? 사회가 선호하는 능력(기여)를 합의한 후에, 이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쉽지 않다. 측정기준 설계의 잘못으로 인해 누군가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기여에 비례하여 보상을 받자’는 비례적 정의의 원칙, 능력주의의 기본 원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 무엇이 공정한가에 대한 의견은 ‘기여’의 잣대, ‘능력’의 잣대, ‘측정’의 잣대에서 모두 나뉠 수 있다. 실제로 능력주의에 대해 논하는 수많은 글과 책들이 각기 초점으로 삼는 부분이 다르다. 누군가는 더 나은 평가시스템의 개선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어떤 능력이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하는 능력인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한다. 물론 이 세 층위는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며, 현재 논의에서 ‘기여’와 ‘능력’이 정말 구분되어 논의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개념적으로 기여, 능력, 측정의 세 층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여러 주장들이 주로 어떤 층위에 주목하는지 그 갈래가 보일 것이다.

 

한국의 논의 지형: ‘측정문제로의 집중과 청년 담론과의 결합

한국에서의 능력주의 논의의 특징을 꼽자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측정’ 문제 즉 ‘평가기준’의 공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진영을 가리지 않고 논의가 집중되어 왔다는 점, 둘째는 청년 담론 혹은 세대론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왔다는 점이다.

한국이 능력주의의 여러 쟁점 중 가장 표면적인 쟁점인 ‘측정’의 문제에 주로 매달려왔다는 점은 계속 변화해 온 대입제도가 잘 보여준다. 대입제도 중 ‘수능시험이 공정하냐,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공정하냐’가 측정을 주요 쟁점으로 삼는 가장 대표적인 쟁점이다. 한국 사회가 무엇이 제대로 된 평가체계인지 혹은 어떻게 평가체계를 다면화할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능력주의가 ‘시험주의’의 형태를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양화(量化)하기 쉬운 방식의 시험을 오랫동안 채택해 오면서 생긴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소위 진보진영조차 “성적으로 일렬로 줄 세우는 것보다는 평가 항목이 많아지고 다층적‧다면적 평가를 시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채효정, 2020: 121). 또 평가 기준을 다면적으로 바꾸는 것은 실제로 일부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측정, 즉 평가 기준에만 논의를 집중하게 되면 보상을 받아야 하는 능력(혹은 기여)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고를 바꾸지는 못하며, 결정적으로 극소수만이 보상을 받는 사회를 전혀 변화시킬 수가 없다.

두 번째 특징은 능력주의 논의가 청년 담론과 강하게 결합했다는 것인데,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는 눈에 띄는 사회세력이 취준생이나 공기업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안정된 일자리가 적어지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은 대체로 합의된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의 능력주의는 시대적 특성이라기보다 세대적 특성으로 여겨져 온 측면이 있다(박권일, 2019). 능력주의를 청년세대에 고유한 담론으로 분석할 경우, 그 해결책도 청년세대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비판이든 설득이든 청년 세대만을 계속 호명하거나, 공정성 담론을 앞세워 계급 특권을 지키려는 담론에도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김정희원(2020)의 표현에 따르면 청년 담론과 결합한 능력주의는 ‘공정성 개념의 무기화’ 현상을 낳았다. 이것이 도입부에서도 언급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갈등 과정에서 주요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공정성 담론을 신자유주의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요구로 등치시킨 결과, 오히려 고학력·명문대 학생들이 사회적 약자로 본인들을 표상하며 공정성 담론을 전유(專有)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작년 인국공(인천국제공항) 논란 당시, 공기업을 준비하는 명문대 학생들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과 자신들을 유비하며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작년과 올해 비정규직 청년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청년들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시험에 따른 차별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문제라는 목소리가 MZ세대에도 존재한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안정적 일자리를 얻은 극소수의 청년들보다 훨씬 다수가 불안정한 노동을 통해 삶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소 대표되었던 청년들의 다른 목소리가 한국의 능력주의 논의 지형을 어떻게 바꿀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를 제대로 해야 한다?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다?

능력주의 논의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현재의 ‘세습화된’ 능력주의가 문제인지, 능력주의 이상 그 자체가 문제인지에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의 입장이 나뉘고, 또 혼란스럽게 제시된다는 점이다. 마이클 샌델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공정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매력적이며, 개인의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이 있다(샌델, 2020: 66). 현재의 능력주의가 실제로는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지 못해서 문제인 것이지, 제대로 실현된다면 능력주의 자체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진보적인 논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자본세와 누진적 소득세 등을 통해 불로소득과 경영자의 고소득을 제한하자는 조치를 제안하는 피케티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진정한 능력주의를 실현하자는 입장이다(장귀연, 2021). 게다가 이러한 입장 차이는 ‘능력주의 자체는 괜찮다’는 명쾌한 선언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비판을 통해 도출한 대안이 결국 능력주의의 이상으로 다시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모호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 비판을 위해 종종 인용되는 롤스에 대해서조차 샌델은 그의 대안도 능력주의적 사회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샌델, 2020: 204~241).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누구로부터 찾아야 하는가 머리가 아파질만 하다.

박권일(2020)은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로 현실에서는 능력주의가 세습주의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장 대표적 증거는 대입이나 취업에서 부모의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겠다. 자신의 성취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기 위해 이 지적은 백번 이뤄져야 마땅하지만,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알고 보면 세습주의’라는 점만을 강조하다 보면, 제대로 된 능력주의 혹은 이상적 능력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박권일은 능력주의를 발본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에는 이중의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데, 한편으로는 능력주의를 가장하는 세습주의와 지대추구가 왜 능력주의가 아닌지를 밝히는 것과, 한편으로는 이상적 능력주의조차 왜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지를 밝히는 것이다(박권일, 2020: 163).

최근 능력주의에 관련 서적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가 온전히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앞서 비례적 정의에 대한 논의에서도 살펴봤지만,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능력주의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평등을 약속하지 않는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 (샌델, 2020: 199) 샌델에 따르면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불평등이 심한 나라에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도 강하게 발견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점은 이 때문이다.

또한 능력주의 이상은 그 기본 성격상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데, 이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는 메시지와 동시에 실패도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제 빈곤과 실업의 책임도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된다. 샌델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승자의 오만, 패자의 굴욕’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자신이 얻은 모든 보상이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패자는 반대로 모든 어려움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능력주의 하에서는 패자 혹은 덜 성공한 이들이 그 원인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돌려 저항, 정치적 도전의 가능성을 축소한다는 점이다.

‘능력주의 이상’ 자체를 비판하고, 능력주의가 경제적 분배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인정의 문제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샌델만의 고유한 주장은 아니다. 한국의 능력주의와 공정성 담론을 다루는 이들도 같은 문제를 짚고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업적을 내세우는 상위계층이 높은 보상을 당연히 여기게 하고, 능력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사회계급의 효과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게 만든다는 지적(김윤태, 2018: 44), 공정성 담론의 문제에는 경제적 분배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인정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김정희원, 2020) 등이 그러한 예다. “공정 담론에 영향을 받은 청년 노동자들은 본인 스스로가 불안정한 노동과 차별을 겪고 있음에도 체념하고 부러우면 시험 쳐서 정규직이 되어야 하고 아니면 감내해야 한다는 얘기를 받아들이게 된다”(한겨레, 2021.7.22.)는 한국지엠 하청업체 노동자의 증언은 능력주의로 인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도전 가능성의 축소가 한국에서도 관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떻게 능력주의를 넘어설까

능력주의 이상 자체를 비판한 샌델은 그러면 어떤 대안을 이야기했는지 보자. 그는 크게 두 제안을 한다. 먼저 성공이 능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고, 경쟁을 약화하기 위해 대입에서 일정 자격 이상을 거른 후에는 제비뽑기로 입학자격을 주자고 제안한다. 성공한 이들이 감사와 겸손 같은 시민적 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이 제안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샌델을 더 급진적으로 읽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노동’의 문제다. 샌델은 책의 마지막에서 일의 존엄에 대해 논의하자고, 즉 ‘기여’가 무엇인지를 토론하자고 말한다. 과연 펀드 매니저가 청소노동자보다 더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것이 맞냐고 그는 묻는다. 샌델은 또한 이를 통해 현재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일자리의 위계를 뒤엎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샌델 역시 기본적으로 비례적 정의의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과연 그가 적절히 제어된 능력주의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인지 불확실하다(오근창, 2021: 273). 그러나 ‘일의 존엄성 문제를 진지한 정치적 어젠다로 만들자’는 그의 제안은 곱씹어볼 부분이 많다.

샌델이 시민적 덕성의 회복과 ‘기여’에 대한 토론을 가장 강조한다면, “기회의 재구조화”를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조지프 피시킨(Joseph Fishkin)은 『병목사회』에서 노력이나 재능을 사회적 환경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 자체에 근본적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능력주의에서는 그 무엇보다 기회 균등이 중요하지만, 기회를 완전히 균등하게 만들 수 있는 시기란 ‘없다’(피시킨, 2016: 459). 그러므로 세습적 능력주의와 순수한 능력주의를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습주의 성격을 띠지 않는 능력주의라는 것은 현실에서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현재 단일한 기회구조를 다원적 기회구조로, 기회가 삶의 모든 단계에서 열려 있게 하고 성공의 상을 다양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고할 때 마르크스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에 대한 구상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례적 정의와 평등적 정의 사이의 시소 사이에서 벗어날 힌트를 저 문장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능력에 따른 분배’가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에 집중하면 ‘어떤 능력이 사회적 가치가 있는가’에서 ‘다양한 사회집단의 필요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로 쟁점이 옮겨가게 된다. 기여에 따른 보상체계를 해체하고, 필요에 따른 분배체계를 확립하자는 논의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누가, 어떻게 이러한 대안적 상을 사회에 새겨 넣을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너무 명확히도 하위계층, 노동자계급일 것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계속 노동자들을 원자화하고, 저항의 의지를 약화시켜 왔다. 능력주의는 하층의 저항을 점점 더 어렵게 하는데, 하층의 저항 없이는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능력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 시대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에게 주어진 난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원자화된 노동자들이 연대의 원리를 강화할 계기들을 놓치지 말고, 자신의 사회적 기여를 재평가하라는 이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확산해야 한다. 일의 존엄성에 대한 재합의와 기회구조의 다원화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지금까지의 기회에서 탈락한 이들의 집단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글 : 박상은

 

참고 문헌

  • 김윤태. 2018. “불평등과 이데올로기: 능력, 경쟁, 확산의 담론에 대한 비판”. 『한국학연구』 67
  • 김정희원. 2020. “‘공정’의 이데올로기, 문제화를 넘어 대안을 모색할 때”. 『황해문화』. 109호.
  • 마이클 샌델. 2020.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와이즈베리
  • 박권일. 2019. “제1부 청년세대와 오늘의 사회적 상상.” 「청년조합원에 대한 이해와 노동조합의 과제」.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사회공공연구원.
  • 박권일. 2020. “능력주의 해부를 위한 네 가지 질문.”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벗
  • 오근창. 2021.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와이즈베리, 2020).” 『철학과 현실』 2021.3.
  • 채효정. 2020. “학벌은 끝났는가.”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벗
  • 최원. 2011.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비판.” 『무엇이 정의인가-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마티.
  • 장귀연, 2021. “능력주의와 공정성 담론의 성격” 『질라라비』 2021년 5월호
  • 조지프 피시킨. 2016. 『병목사회』. 문예출판사
  • 한겨레. ““능력 따른 차별이 공정? 공감 안 돼요” 연대의 MZ가 온다” 202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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