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안전운동과 산업안전보건법의 간략한 역사

한국에서 산업재해는 오랫동안 시급히 해결해야 할 위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산재 사망률 OECD 국가 1위라는 오명이 이를 증명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안전에 대한 시민들의 민감도가 높아지고, 계속된 산재사망과 유가족의 싸움으로 2018년 12월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개정되어 작년 1월부터 적용되고 있다. 또 올해 1월에는 안전보건 의무를 지키지 않은 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이제 살기 위해 일하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삶을 잃는 소식을 좀 덜 볼 수 있을까?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법인 ‘산업안전보건법’이 만들어진 지 40년이 되는 해, 산업안전보건법의 제·개정과 노동안전운동에 대해 짧게 돌아본다.

갈등의 억압 속에 탄생한 산업안전보건법

국가별로 시기와 양상은 다르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은 어디에서나 필요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자신의 재산(자본)을 거는 반면, 노동력의 판매 외에 생존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신체를 걸어야 한다. 프랑스의 법학자 알랭 쉬피오에 따르면, 노동법은 처음엔 노동자들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즉 ‘노동에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등장했고 그 뒤에 ‘노동에 의한 안전’, 즉 최저임금 등 경제적 안전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식민 지배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서 해외의 법제도가 이식되는 방식으로 발전해 온 한국은 노동법의 발전 순서에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노동기준 전반을 다룬 근로기준법이 1953년 도입된 후, 노동자의 신체 보호와 관련한 법이 근로기준법에서 독립하는 방식으로 추후에 신설됐다. 노동자의 신체 보호와 관련한 법은 사후보상과 사전예방에 관한 법으로 나뉜다. 1963년 사후보상을 위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먼저 도입되고, 1981년 사전예방을 위한 산업안전보건법이 근로기준법에서 분리 독립하는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

1981년은 노동운동이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억압받던 시기다. 노동안전에 대한 운동의 요구가 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었다. 먼저, 실제로 산업재해가 많이 늘어났다.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이 전환하면서 위험한 기계·기구와 유해물질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산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둘째, 대형사고가 빈발해 여론이 집중되었다. 1977년 11월에 연달아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77.11.11. 발생. 59명 사망)와 장성탄광 화재사고(77.11.16. 발생. 12명 사망) 등은 박정희 정권이 산업안전 및 보건에 관한 독립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하는 계기가 됐다. 셋째, 미약하게나마 1970년대에도 노동운동은 산재사망에 관해 국가와 자본에 책임을 물었다. 1977년 7월 협신피혁공업사의 노동자 민종진이 유독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유족들은 민종진의 사망을 ‘기업주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했다. 청계피복과 동일방직 등 민주노조 활동가들과 서울·인천지역 노동자들은 유족들의 호소에 응답하여 장례투쟁을 치르며 “노동청장 퇴진”, “사업주 구속”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나 대형사고 피해자, 노동운동의 요구가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인력보전’ 논리로 제정된다. ‘인력보전’은 ‘이미 형성된 인력이 산업재해를 입으면 이는 곧 노동력 손실이며 이로 인해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다’는 논리로, 정부와 사용자단체는 물론 한국노총 등 노동조합, 언론까지 수용할 수 있는 논리였으며 현재까지도 기업에 산재예방 필요성을 설득하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숙련노동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때 일부나마 설득력을 지니는데, 반숙련·미숙련이 늘어나고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통하기 어려운 논리다. 또한 80년대 초 국가와 노동 간 관계는 ‘갈등적이고 상호배타적’이었던 반면, 국가와 자본 간 관계는 ‘긴밀하고 호혜적’이었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법은 기업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기조로 형성된다. ‘기업의 자율적 규제(voluntary regulation)’가 무조건 기업 의무를 줄이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맥락에서 강조됐다.

1981년 억압된 갈등 속에서도 이후 산업재해 예방을 둘러싼 책임 문제에 대한 쟁점은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노동부는 법 제정 초기부터 ‘기업의 자율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한 기업의 ‘인식’과 ‘열의’를 강조했고, 기업 측은 ‘기업 뿐 아니라 국민전체의 의식 고취’가 필요하다며 자신의 책임을 흐리는 전략을 취했다. 당시 유일하게 대표성을 가진 노동자단체였던 한국노총은 재해 과반수가 노동자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는 노동부의 원인 분석을 비판하며, 사용자의 명령에 의해 노동이 제약된다는 점에서 대부분 재해를 사용자 귀책사유로 보는 국제적 추세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한국노총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억압된 채 산업안전보건법은 탄생했다.

노동안전운동의 시작과 첫 번째 전면 개정

▲소년 노동자 문송면의 수은 중독 사실을 보도한 1988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국의 노동안전운동은 1988년 문송면 군 사망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으로 비로소 시작됐다. 1988년 7월 2일, 영등포 소재 온도계 생산 공장에서 일하던 15세 소년 문송면 군이 수은 중독증으로 사망한다. 다음날 주요 일간지와 방송사가 이를 보도하면서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고, ‘문송면 군 수은중독사건대책위’는 수은중독 문제를 알면서도 소극적으로 대처한 노동부 서울남부지방사무소장 구속과 노동부 장관 해임을 요구하며 장례투쟁을 진행한다. 7월 11일 남부지방사무소장이 직위해제되고 17일 문송면 군의 장례가 치러지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문송면 군 사망과 그 뒤를 이은 장례투쟁의 소식을 들은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구리노동상담소를 방문해 도움을 요청하면서 원진레이온 투쟁이 시작된다. 원진레이온은 1966년 일본에서 수입한 중고 방사기로 인견사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레이온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이황화탄소는 휘발성이 있어 방독면 없이 일하던 노동자들이 쉽게 흡입할 수 있었다. 이황화탄소 중독증은 마비, 정신 이상, 고혈압, 신부전증 등을 수반하는 직업병으로,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약 900명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1988년 도움을 요청한 원진레이온노동자 4명은 이미 1987년 1월에 직업병 여부 판정을 위해 청와대에 진정을 내고, 노동부로부터 직업병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회사가 6백만 원씩을 받고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를 요구하고, 노동부도 한 달간의 요양 치료 후 치료를 종결하고 장해보상금을 지급해 더 이상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들의 사정이 얼마 후 한겨레신문에 특종 보도되고, ‘문송면군 수은중독사건대책위’는 ‘원진지원대책위’로 전환해 활동할 것을 결정한다. 한겨레신문 보도를 통해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받은 다른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이들은 ‘원진레이온 피해노동자 및 가족협의회(원가협)’이 구성되어 사측과 합의를 이끌어낸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노동자 투쟁현장

이 투쟁의 영향으로 1990년 1월 13일, 제정 후 10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던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개정된다. 여기에는 직업병 피해 당사자들의 투쟁 뿐 아니라 1989년 노동법 개정투쟁의 일환으로 진행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투쟁도 주요한 배경이 됐다. 민주노조운동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 노동자의 ‘참여권, ’알권리‘, ’작업중지권‘을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1990년 전면 개정 당시에는 이 요구는 매우 일부만이 반영되었지만, 산업안전에 대한 정부 책무를 명확히 하고, 유해화학물질 규제와 건강관리수첩 제도 도입 등 유의미한 조항이 포함되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노사 동수로 구성하는 조항은 노동자 참여권의 확대로 평가된다.

1990년 산안법 전면 개정 이후에도 앞서 언급한 원진레이온 투쟁을 비롯한 직업병 관련 이슈는 끊이지 않았다. 1991년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격화된다. 피해자들은 사측과의 합의를 통해 계속 더 많은 직업병 피해자들을 포괄해 갔으나, 합의기준에서 제외된 직업병 피해자들이 있었다. 근무했던 부서가 유해부서로 분류되지 않아 이황화탄소 중독증이라는 의사 소견서를 받았음에도 회사로부터 요양신청서 날인을 받지 못한 김봉환 씨가 1991년 1월 5일 사망하게 된다. 그는 노동부에 직업병 검진을 받게 해달라고 지속적으로 호소했고, 그 결과 노동부로부터 직권으로 요양신청서를 내주겠다고 약속받았다. 요양신청의 길이 열린 바로 그날, 그는 거리에 쓰러져 사망했다. 이미 사망한 그의 직업병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4개월이 넘는 장례 투쟁이 이어졌다. 사측 추천 의사와 피해자 측 추천 의사 사이에서 직업병 여부가 합의되지 않고, 86일 만에 치르기로 한 장례에서 회사와 유족·대책위가 충돌하면서 결국 장례는 무기한 연장됐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직업병 피해자 권경룡씨가 자살하고, 언론이 이를 김봉환씨 관련 투쟁과 함께 일제히 보도하면서 여론이 집중됐다. 결국 국회에서 실태조사 소위원회를 파견, 김봉환씨가 직업병에 걸렸을 개연성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투쟁이 일단락된다. 김봉환씨는 사망 후 137일 만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 투쟁의 요구로, 한 달여 후인 1991년 6월 14일 노동부는 ‘직업병 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한다. 90년대 초 산업안전보건 문제에 대한 연구도 증가하고, 1995년 1월에는 199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 때 민주노조운동이 제기한 노동자의 참여권, 알권리, 작업중지권이 상당 부분 확보된다. 그러나 같은 시기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규제 완화가 시도되고 있었다. 1993년 6월 기업규제완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산업안전보건법에 규정된 여러 규제가 완화될 길이 열렸다. 경총 등 사용자단체는 법 자체가 아니라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규제 강화를 막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93년 기업규제완화를 위한 특별조치법 제정 당시만 해도 불발로 그쳤던 산업안전보건 관련 규제 완화는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초부터 본격화되었고, 97년 말에 IMF 구제금융이 시작되자 이 흐름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경제위기로 인해 안전·보건을 위한 설비 투자가 크게 줄었고, 고용 자체가 위협받으면서 노동운동 내에서도 노동안전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차화되었다. 비정규직 등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위험은 이들에게 주로 전가되었다.

위험의 외주화와 김용균, 두 번째 전면 개정

IMF 구제금융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하에서 노동안전 문제는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90년대 후반 근골격계질환 집단산재 투쟁이나, 2000년대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 투쟁 등 산재 피해 당사자들과 노동안전운동 단체들의 계속된 투쟁이 있었지만 원진레이온 투쟁과 같이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커다란 비극이 전환점이 되었는데,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그것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 산재사망 문제도 다시 부상한다.

▲발전소 하청노동자였던 고 김용균

2010년대에 이르러 민주노총은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하청노동자의 산재사망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시점은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인천공항철도 선로유지보수 노동자 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이들은 열차가 운행 중인 것을 모른 채 작업하다 사고를 당했다. 이는 외주화로 인해 의사소통 체계가 분절되어 있지 않았다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기 때문에 노동조합 및 노동안전단체는 외주화로 인한 위험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이후 하청노동자들의 산재사망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 2016년 5월, 스크린도어 고장을 고치기 위해 선로 안쪽으로 들어가 작업하던 하청노동자 김군이 승강장으로 들어오던 열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위험의 외주화’ 문제는 완전히 사회화되었다.

산재문제 해결 여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지속적인 발의 등이 이어지자 2018년 2월 고용노동부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법안을 입법예고한다. 정부안은 노사 양측의 비판을 받았고, 1년 여 간 노동과 자본의 힘겨루기가 진행되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안전운동단체는 토론회, 입법예고 집단 의견서 제출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특히 2018년은 문송면, 원진레이온 투쟁의 30주기가 되는 해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조직된 추모조직위 역시 산안법 전면 개정 투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경총은 강하게 반발했다. 주요 쟁점은 사용자 책임이었다. 10월 30일 수정된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경총은 ‘산업재해 발생 책임을 사업주에게만 전가하는 규정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사업주의 책임을 넘어 과도하고 처벌하는 규정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11월 1일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11월에 열린 두 차례의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산안법은 전혀 언급되지 않아, 국회 통과는 불투명해보였다. 그러던 12월 11일, 태안화력 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하면서 다시 ‘위험의 외주화’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은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통과 여론이 거세졌다. 국회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안건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2018년 12월 27일, 28년만에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전부 개정안은 유해위험 업무 도급을 금지해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하청에 대한 원청 책임을 확대했고, 산재사망에 대한 처벌도 강화됐다. 이외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대상 노동자 확대를 확대하고, 영업비밀 제한 등 알권리에 대한 진전도 이뤄졌다. 그러나 ① 도급이 금지된 범위가 너무 좁다는 점, ② 기업규제완화 특별법으로 인해 안전·보건 관리자 선임 인원 규모가 적고, 겸직과 위탁대행이 허용되는 등 원청이 실제 책임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 ③ 처벌 규정에서 하한형이 도입되지 않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법 제정 후 2019년에는 시행령 제정을 둘러싸고 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노동운동은 법에서 제외된 보호대상을 확대하고, 도급승인을 받아야 하는 업무 범위를 넓히려 한 반면, 경총과 건설협회 등 사용자단체는 이 범위를 최대한 줄이려 했다. 승자는 사용자 단체였다.

2021년 1월 기업 처벌 조항을 보완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되었고, 현재 시행령이 논의 중이다. 비슷한 일은 다시 반복되고 있다. 4월 13일 경총이 최대한 적용범위를 줄이려는 의견을 제출한 것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 운동본부는 이를 강하게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산업안전보건 규제의 적용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개정을 위해

간략한 역사 속에서도 몇 가지 공통된 지점이 발견된다. 첫째, 산업안전보건법은 대형사고가 빈발하고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운동이 활발해질 때 겨우 제정·전면개정될 수 있었다. 둘째, 산업안전보건법은 국가, 노동, 자본 간의 치열한 힘겨루기와 합의의 산물이다. 노동은 사용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노동자의 참여권, 알권리, 작업중지권의 제도적·실질적 확보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반면, 자본은 이를 최대한 막으려고 했으며, 국가는 대체로 자본의 편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법제정 이후 시행령 등 하위법령을 제정할 때 오히려 법 제정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적용범위 후퇴, 예외조항 추가 등이 이뤄지는데 이것이 기업과 정부의 주요한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여론이 모이기 어렵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구체적인 조항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적용범위를 쪼개고 쪼개 책임을 다시 분산시키는 일은 한국의 법체계가 ‘조직화된 무책임’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죽음과 죽음을 잇대어 만들어낸 법들이 무력화되지 않도록 지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개정에 힘을 보태야 한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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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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