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사수하라! 미얀마 쿠데타, 위기, 그리고 자본 [上]

[편집주] 이 글은 지난 2월 20일 스펙터저널(Spectre Journal)에 실린 Keep the Streets: Coup, Crisis, and Capital in Myanmar를 번역한 것이다. 스펙터저널과의 협의를 통해 두 번에 나누어 플랫폼c에 소개하고자 한다. 

[인터뷰어] 지난 2월 1일, 미얀마의 군부(Tatmadaw; 탓마도)가 아웅산수치(Aung San Suu Kyi) 국가고문을 체포하고 정부를 장악하면서, 미얀마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스펙터저널 에디터 자카리 르벤슨(Zachary Levenson)은 미얀마의 경제수역과 무역 회랑의 인프라를 둘러싼 정치를 연구해온 조프리 아웅(Geoffrey Aung; 컬럼비아대학교 인류학과 박사수료)을 인터뷰했다. 아웅은 쿠데타가 일어난지 일주일 후 추앙(Chuang)지에 실린 자신의 분석에 기반해 쿠데타의 향방과 저항운동의 계급적인 구성, 그리고 이러한 전개를 미얀마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이행 궤적과 관련시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카리 르벤슨(左), 조프리 아웅(右)

 

르벤슨 :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2월 1일 쿠데타 이후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웅 : 새 군부 정권은 대중적인 저항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대도시들부터 전국 각지의 작은 마을들까지 대규모 파업과 거리 시위, 도심 바리케이드, 그리고 보편적인 동요를 목도하고 있죠. 의료 노동자들을 비롯한 여타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쿠데타에 맞서 가장 먼저 파업을 조직한 주체들이었습니다. 양곤의 공단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들이 도심 시위를 확산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죠. 

농민 시위 역시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요. 군부는 미얀마 최북단 지역의 전력발전소를 장악하기 위해, 이곳에 진입할 때 실탄을 사용해 이 지역을 사수중이던 시위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수도 네피도(Napyidaw)에서는 총상으로 사망자가 발생했고요. 만달레이(Mandalay)의 항구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던 과정에서 군대의 공격을 받아 2명의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군부에 맞선 분위기는 불길한 전조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군대가 언젠가 본격적으로 폭력적인 진압을 시작할까요? 군부는 [사람들의]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인터넷을 여러 차례 차단했습니다. 또, 심야에 반군부 인사들을 급습, 체포하여 공포를 확산시켰죠. 쿠데타 이후 500여명(3월 12일 기준 2천여명)이 체포됐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미얀마판 “만리방화벽”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상당한 경찰관들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에 합류했지만, 군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양곤 등 핵심적인 저항지들에서 방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죠. 현장의 조직가들과 활동가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거리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대중 저항을 지탱하는 동시에 군대가 조장하는 공포와 사이버보안 전술들에 대응하면서 말이죠. 물론 이는 쉽지 않은 과제지만, 쿠데타에 맞선 전국적인 저항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르벤슨 : 쿠데타는 항상 충격적으로 일어나지만, 반드시 예상하지 못 할 것은 아닙니다. 2011년 미얀마 군부가 일부 권력을 이양하고 아웅산수치의 NLD(민주주의민족동맹)가 2015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미얀마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2월 1일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예상하기는 어려웠나요?

아웅 : (미얀마 내 민선정부와 군부의 관계가) 가장 좋았을 때에도 그리 우호적이진 않았습니다. 민선정부와 군부 사이의 불화는 작년(2020년) 11월 총선 결과에 대해 군부가 문제제기한 이후 고조되고 있었죠. 그러다가 1월 말에 군부 대변인이 쿠데타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말을 하면서 더욱 악화됐습니다.

한데 쿠데타 며칠 전 군 장성들이 법률과 헌법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협박을 철회할 것처럼 보였죠. 이런 배경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니 충격으로 다가온 겁니다. 다들 ‘위기를 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미얀마 내 권력의 균형이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 되묻는 것은 좋은 질문입니다. 분명히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았죠. 제 추정에 따르면, 군부가 [NLD로 대표되는] 다른 계급분파와 정치적 권력을 나누게 된 것에는 세 가지 변수가 작용했습니다. 첫째, 1990년대부터 군부는 자원 추출이나 중공업, 대규모 농업 등 떠오르는 시장경제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부와 관련이 깊은 기업들과 계열사[소위 “정실 자본가들 crony capitalists”]들은 국가 자산의 민영화를 통해 큰 이익을 봤습니다. 그 덕분에 2011년 이후 군 장성들은 미얀마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형식적인 직위가 불필요하게 된 겁니다.

둘째, 군부는 형식적으로 민선정부가 해외 자본, 특히 서구 자본으로부터의 투자를 유치하기에 더 좋은 형식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민선정부가 세워지면] 경제 제재가 해제될 테니까요[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죠]. [군부에게] 이는 더 많은 부를 획득할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였죠[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연방단결발전당의 리더들

셋째, 군부는 연방단결발전당(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을 기반으로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장하고 정당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이런 점들은 군부가 자유주의적인 계급분파인 NLD와 서로 얻을 게 있는 위태롭고도 일시적인 동맹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본적인 조건이었죠.

하지만 장성들은 세 번째 조건에 대해서 오판했습니다.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연방단결발전당이나 군부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소외되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게 보이기 시작했죠. 심지어 2020년에는 NLD가 더욱 설득력 있게 승리했습니다. 더구나 로힝야 학살로 인해 평판에 지대한 타격을 받게 되면서 포스트-2011년 경제는 2017년까지만 잘 작동했습니다. 어떤 경우든 경제 전망이 어두워졌죠. 성장지표가 감소했고, 서구 기업들은 발을 뺐으며, 관광객도 줄어들었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미얀마 통화가치가 절하되면서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들이 정체됐죠. 또한 NLD가 이끄는 민선정부는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의 평화협상에서 진전을 보지 못 했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포스트-2011년의 정치적 분립 구도가 파괴된 원인들 중에서 한 가지만 떼어내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서 애초 빈약했던 합의가 구조적으로 압박받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제 생각에는 과도하게 분석되고 있다고 보이는] 군부 정상들과 NLD 사이의 증오가 어떻든지 말이죠. 요약하자면, 2011년의 제휴는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이를 지탱해주던 조건들이 떨어져나가자,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버린 거죠. 이런 관점에서 2020년 총선에 뒤따른 민선정부-군부 관계의 드라마틱한 붕괴는 보다 큰 구조적인 붕괴 과정의 마지막 조각이었을 뿐입니다.

 

르벤슨 : 쿠데타에 대한 저항을 어떻게 특징 지을 수 있을까요? 대체로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요? 저항하는 사람들의 계급이나 종교, 민족적 구성에 대해서 말씀해줄 수 있을까요?

아웅 :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공공 부문 파업에서부터 시작됐고, 대규모 거리 시위로 폭발했으며, 공간적인[즉 전국적으로], 그리고 구성적인 측면에서 확산됐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저항의 형태는 양곤, 만달레이, 네피도, 그리고 다른 도시들과 마을들에서 벌어진 군대에 맞선 공공연한 저항입니다. 이 시위들은 주로 도심에서의 대규모 봉쇄의 형태를 취했는데요. 예를 들어 수 만명의 사람들이 양곤의 흘레단센터(Hledan Center)와 술레 파고다(Sule Pagoda)에 지속적으로 모였고, 남부의 다웨이(Dawei)같은 곳에서는 보다 적은 규모라 해도 사거리를 점거하는 거리 시위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슈웨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가 시위의 주요 장소였다면, 최근에는 도심에 위치한 공간들을 점거하는 게 주요 전략이 된 것 같습니다.

[양곤 도심 흘레단 센터 앞에서의 대중 시위]

도로를 막고 무역을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저항이 전환되고 있기도 합니다. 대규모 점거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도심 사거리를 막기 위해 고장난 자동차들을 세워둔다던지, 소규모의 시위대가 고속도로를 막는다든지, 무역거래가 이뤄지는 중국 접경의 교역점들을 봉쇄하는 등의 방법들이 고안됐습니다. 운송의 취약성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제 생각에 지금의 저항에서 보다 생산적인 양상들 중 하나입니다. 거리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아, 전 정권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도로가 막혀서 일하러 못 갔을 뿐이에요”라고 그럴듯하게 부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는 지점도 있습니다. 쿠데타에 맞선 공공연한 저항이 계속되면서 경제와 정치의 명확한 구분이 흐려지고 있는 겁니다.

또 하나 덧붙일 게 있는데요. 최소한 양곤에서 UN사무실이나 대사관들, 그리고 일부 공공 기관들을 타겟 삼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시위(roving protests)도 있습니다. 소규모로 옮겨다니는 시위라고 하면, 홍콩과 태국에서도 목격했던 “플래시몹”이나 “물처럼 싸우기(Be Water)”같은 저항 양식들이 떠오를 겁니다. 비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가 더 큰 관심을 받지만 말이죠. 어쨌거나, 다양한 형태의 저항들이 있고, 어떤 것은 더 직접적이고 다른 것은 덜 그러한데, 어떤 시위는 가공의 국제 사회(아래를 보시오)에 호소하고 또 어떤 시위는 직접적으로 군대와 충돌하기도 합니다.

계급 구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은데요. 요약하자면, 저항은 단일한 주체로 묶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2007년[the sangha; 미얀마 불교 수도승들의 시위]이나 1988년[주된 구성은 학생이나, 실제로는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죠]과 다릅니다. 이번에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일찌감치 저항을 시작했고, 의류제조업 노동자들이 초기 대중 시위를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죠. 소수민족 역시 양곤과 소수민족 지역들[미얀마 중남부 대도시 이외]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LGBTQ 단체들도 시위에 활발하게 참여했죠. 또, 각성한 농민들이 주도하는 시위 역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승려들 역시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미얀마의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재치 넘치고 ‘밈’을 활용한 시위 피켓이나 구호들이 많아서 그럴 겁니다. 논쟁해볼만한 주장이지만, 이번 저항은 미얀마에서 인터넷을 통해 자라온 세대에게 많은 것을 빚지는 첫 저항입니다. 인터넷, 무엇보다 페이스북이 2011년 이후에 미얀마에 들어왔기 때문이죠. 시위가 네트워킹되고 온라인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그런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노동자들, 의료 노동자 등 공공부문 전반의 노동자들, 그리고 봉제산업 노동자들의 결정적인 역할이 가려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어쨌거나, 이 저항을 노동자계급이든 다른 단일한 정치주체에 위치짓는 것은 오류일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를 횡단하며 정치적 투쟁을 구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죠. 이 힘은 형식적인 통합에서가 아니라, 많은 부분들이 연결됨으로써 생기는 힘입니다. 서로 공유하는 점이 별로 없는 드랙퀸과 의류제조업 노동자가, 또는 밈을 만드는 Z세대와 북부의 농민들이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상황에 내던져진 겁니다. 분리를 통한 통합, 혁명가 없는 혁명, 또는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도출된 어떤 구절이 떠오릅니다.

동시대 운동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치그룹들이나 조직들 간 연합을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운동들은 고유성 그 자체를 기반으로 고유한 개인들을 형식적인 전체로 통합하지 않으면서 모이죠. 비록 거리라는 용광로가 항상 새로운 실천적인 진형들을 생성하고 [간절히 바라건대] 도래할 긴 위기들을 넘어설 수 있는 생활방식을 낳을 수도 있지만, 운동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당장 하나의 동일성으로 융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힘은 단결이 아니라 카오스 속의 민첩성으로부터 올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경험을 공유하되, 그 경험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상황에 적응해야 합니다. 문제는 원자들을 모조리 모아 하나의 새로운 대중 주체를 만들고자 하는데에 있지 않고, 분리된 다양한 신체와 욕망들이 협조할 수 있도록 서로 투과하며 유연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르벤슨 : NLD의 지지 기반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요? 개별적인 유권자들말고 제도화된 지지 기반이 있나요? 저는 승려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조직화된 노동자나 지역 조직 등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아웅 : 여론조사에서 NLD의 인기는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구분을 하는 게 중요한데요. 먼저, NLD는 명백하게도 소수민족 지역에서 미얀마의 중·남부 지역에서만큼 인기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소수민족 지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죠]. 둘째, [집권한] 2015년 이후 NLD는 미얀마 시민사회의 많은 부분을 소외시켰습니다. NLD는 [자기-서사에서 마침내 정당하게] 획득한 정치공간을 시민사회가 잠식한다고 여겼습니다. 가령 NLD는 1988년 항쟁 당시의 학생 리더들과 좋게 봐야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셋째, NLD는 토지 정치나 노동 쟁의, 민족 간 문제에 있어 평화적인 합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NLD는 노동자, 농민, 시민사회, 또는 소수민족의 정치적 세계에서 제도적 지지를 요구할 수가 없었죠. 사실 NLD는 정당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적고, 외부적인 제도적 기반이 취약합니다. NLD의 상층부에는 아웅산수치 외에 “원로들이 장로정치(gerentocracy)를 형성하고 있고, 이는 개인 숭배라 할 수 있죠. NLD는 이 이상으로 무엇인가를 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선거에서는 아웅산수치라는 인물 하나로 충분하기 때문이죠. 그가 정상에 있는 한 선거에서 NLD에 대한 지지는 도시와 농촌, 계급 차이를 아우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NLD가 미얀마의 대다수인 노동자, 농민, 소수민족을 소외시키기 위해 만전을 다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기층에서의 인기는 여전히 막강합니다.

2010s년 12월 1일 미얀마 건국 9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NLD 아웅산수치와 원로 간부들

 

르벤슨 : 군대는 어떤가요? 군부도 지지를 요청할 수 있는 기반이 있나요? 

아웅 : 1990년대에 군부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독재정권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던 일당독재 정당 골카(Golkar)를 모델로 삼아 대중적 기반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연방연대및발전연합(USDA,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Association)이었죠. 이후 USDA는 연방단결발전당(USDP)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난 십 년의 선거에서 [NLD와] 겨뤘습니다. 2000년대 한때 USDA는 형식적으로나마 미얀마 성인 인구의 3분의1에 달하는 당원수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죠] USDA는 새로 형성된 민간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적나라하게 국가 지원을 받았고, 지역 수준에서 후견주의적 정치(patronage politics)를 실행했죠. 지역과 전국을 아울러 광범위한 비즈니스(보석 채굴업, 버스 및 기차 수송업, 수입업, 양식업, 농업, 정미, 부동산 등)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USDP는 선거에서 NLD의 지지율에 완전히 묻히는 비참한 패배를 맛봤죠.

저는 미얀마 남부에서 수행한 연구에서 USDP의 후견자 네트워크가 중소기업과 관련해 어느 정도 작동하는지 확인했고, 보다 잘 나가는 지역의 사업가들도 USDP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들을 봤습니다. 중공업, 자원 추출, 대단위 농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산업들이 대개 USDP과 관계를 맺고 있죠. 여기엔 군대도 있습니다. 군인과 그 가족들이 USDP에 어느 정도 지지를 보내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USDP가 선거의 매개물로 온전히 작동하기 위한 산소를 충분히 제공해주지 못 하는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번역 : 보리 (플랫폼c 활동가)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