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해근, “노동자들의 고통으로 일궈진 경제 기적을 찬양할 순 없다”

구해근, “노동자들의 고통으로 일궈진 경제 기적을 찬양할 순 없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조금씩 변모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여성 등 노동계급의 급진적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21년 2월 19일

[읽을거리]노동노동운동, 사회운동, 노동조합, 노동연구

이 글은 이틀 전인 지난 2월 17일 오후, 중국의 『펑파이신문(澎湃新闻)』에 기재된 구해근 인터뷰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具海根:我无法在劳工困境中赞扬韩国经济奇迹”로, 인터뷰 속에서 구해근 교수의 말에서 제목을 따왔다. 구해근은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우리에게는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다. 이 인터뷰에서 구해근은 자신의 학문 연구 궤적에 대해 개인사적이고도 한국 사회의 맥락과 얽힌 과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학문적 관심이 과거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관심에서 한국 노동자계급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최근 중산층에 대한 관심까지 이동하였는지 말하고 있다. 또, 최근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할 점, 나아가 동아시아(특히 한국) 노동자운동의 국제적 관심이 왜 여전히도 서구에 도움을 갈구하는 방향으로만 남아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한국의 사회운동이 뼈아프게 생각할 지점이다. 그가 제시한 쟁점들에 완전하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가 던지는 화두만큼은 충분히 토론하고 논쟁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인터뷰를 소개한다. 최대한 맥락을 통해 파악하려 했으나, 영어로 인터뷰한 내용을 중국어로 풀어쓴 기사이기에 학술적 용어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정확할 수 있다.

서울 명동 인근의 을지로에는 사나운 불길에 휩싸인 청년의 그림이 이따금씩 드러난다. 마치 거리의 암호와 같다. 그곳엔 청계천 물가를 마주하고 있는 전태일 기념관이 있는데, 이는 한국 노동자운동의 기념 센터이기도 하다. 1970년, 22세의 전태일은 노동자 대표로서 자본 및 정부와 협상을 했지만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손에 쥐고 평화시장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말라!”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의 노동 항쟁과 운동을 고무했다.

2020년은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지 50주기가 된 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새로운 노동운동과 개혁의 상징으로 삼았다.

동아시아 경제의 번영과 신흥 데이터 경제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들은 전무후무하고 혹독한 정세를 마주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둘러싼 공적 담론 역시 날이 갈수록 왜곡되고 있다. 중국의 배달 노동자들이 “시스템에 갇혀” 있을 때, 한국의 배달 노동자들 역시 알고리즘의 억압 아래서 빈번하게 사고를 겪고 있다. “라이더유니온/택배노조” 또는 “라이더연맹(骑手联盟)”이 합법 노동조합(한국) 또는 상호협력 네트워크(중국)의 형태로 양국에 출현했다. 중국의 IT빅테크들에서 청년들이 급사하고 있을 때 한국의 택배노조는 분류 작업으로 인해 과로사 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해 파업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동아시아 내의 횡적 연합은 꽤나 긴박해보인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당대 생산 방식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경제는 날로 발전하고 데이터 기술은 ‘미래형 경제시스템’을 보급하고 있는데, 과로와 네이줜(内卷; 내권; involution)은 대체 왜 일상이 되었는가? 설령 동아시아의 국가별 시스템이 지닌 서사가 다르긴 하지만, 오늘날 경제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곤경과 주변화의 추세는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항쟁과 운동은 이제 어디로 향할까?

역주 : ‘内卷’이란 클리포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사회를 참여 관찰한 뒤 내놓은 저서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 Agricultural Involution』에서 제기된 involution이란 개념에서 유래한다. 역사학자 프래신짓트 두아라(Prasenjit Duara)는 『Culture, Power, and the State: Rural Society in North China, 1900-1942』에서 근대 중국 역사의 바퀴가 안으로 involution/内卷/퇴행했다고 묘사한 바 있다. 한데 지난해 인류학자 샹뱌오(项飙)가 중국 내 진보적인 언론으로 알려진 펑파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개념을 다시 언급하면서 지식사회의 쟁점이 되었다. 중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지 않으면, 집정당의 고강도 억압과 내수 활성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순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구해근(원문에서는 칭호가 표기되어있지 않음)을 찾았다. 우리는 이제 막 재개장한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아크릴판을 사이에 두고 3시간에 걸쳐 대화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구해근은 동아시아 노동연구의 선구자 중 하나다. 10년에 걸쳐 완성한 바이블 《韩国工人:阶级形成的文化与政治》[역주 : 영어 원제는 KOREAN WORKERS: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 중국어판 역시 “한국 노동자 : 계급형성의 문화와 정치”라는 제목을 그대로 옮겼다. 단, 한국에서는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란 제목으로 출판됐다]을 통해 권위적인 국가장치와 보수적인 유교 문화 속에서 냉전시대의 한국이 어떻게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노동운동을 탄생시켰으며, 고조되었던 항쟁은 1990년대에 이르러 왜 쇠락했는지 주목했다.

최근 그의 연구는 전세계 신흥 중산층으로 옮겨갔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1% 대 99%”라는 슬로건을 내건 것에 대해 “10%/90%”의 틀을 제시하여 현재의 소득 분화를 분석했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초조한 부유층”이란 화두로 심화되는 계급 불평등 문제로 확대됐다. 퇴임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아침마다 도서관으로 가 연구하고 있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10년 걸쳐 차기 연구 저작을 집필하고 있다. 낮은 톤으로 고전적 사회계급 이론들을 파헤치는 그의 지향은 단순히 ‘비(非)서방’의 시각을 갖는 것에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대항을 묘사하기 위해 정밀한 실증적 기초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그는 종종 중국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내 자신이 한국의 사정에 대해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실은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오늘날 어떤 나라의 경험도 완벽하게 독특한 것은 없으니까요.”

한국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쇠락

펑파이신문(이하 ‘펑파이’) : 서울에서 다시 만나니 뜻밖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미국에만 오래 계실 줄 알았거든요. 선생님은 1940년대에 태어나셨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에 어떻게 60~70년대에 미국으로 와 학자가 되셨나요?

구해근 : 이번 주말에 하와이로 돌아갈 예정이긴 합니다. 가기 전에 만나뵙고 이야기를 나눌수 있어서 좋네요. 6·25전쟁 때 소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1960년, 대학생들이 이끈 ‘4·19혁명’이 일어났는데요. 당시 저는 서울대 신입생이었고, 적극적인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참여하게 됐어요. 이 운동은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이 주도해 일어난 거였고, 제게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였어요. 

전 항상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건 주로 집안 환경 때문이었어요. 부모님은 농촌에서 도시로 왔고 가계는 아주 빈곤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께서 심장병으로 돌아가셨고, 제 누나가 저보다 더 똑똑했지만, 집안 생계에 보태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었어요. 이런 노동자계급으로 자란 제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이 고생하며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성실하게 일하는데도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현실, 그런 문제가 계속 제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대학에 간 후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커졌기 때문에 저는 사회학과를 선택했어요. 당시엔 사회학이 뭘 하는 건지 별로 알지 못했죠. 그래서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졸업 후에 <중앙일보>에 입사해 2년 동안 기자로 일했어요. 한데 제 대학 교수님께서는 제가 꼭 학술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분은 제 경제적 상황을 아셨기 대문에 캐나다의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주셨죠. 그렇게 해서 60년대 말에 출국하게 된 겁니다. 그런 후에 미국의 노스웨스턴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해서 박사 과정을 밟았죠. 당시 미국에서는 아무도 한국의 노동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제가 노스웨스턴대학에 있었던 게 1969년부터 73년까지인데요. 그 사이인 1970년에 전태일 분신 사건이 발생했죠. 박정희 정권 시기 언론들은 이 사건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신문 속에서 짧은 문장만을 찾아냈어요. 그런 후에 고국에서 기자를 하던 친구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거죠. 그게 저에게 아주 큰 충격을 줬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처음으로 한국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없었죠. 그래서 노동자 문제에 대한 논문을 쓸 수가 없었고, 한국의 개인 상공업자들에 대한 걸 썼죠. [역주 : 구해근의 박사 논문은 “Occupational Situs and Social Stratification in a Developing Society (1974) 개발사회에서의 직업의 위치와 사회적 계층화”이다. 1975년에는 미국사회학회에서 “Small Entrepreneurship in a Developing Society: Patterns of Labor Absorption and Social Mobility 개발사회에서의 영세자영업자의 역할 : 노동몰입과 사회이동의 패턴”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랐거든요. 당시 미국 사회학계에서는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서방 국가에서 스스로를 고용하는 경우는 여전히 적었거든요. 하지만 중국이나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노점상 등을 많이 볼 수 있었잖아요. 이 부분이 나중에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라는 이름으로 경제학의 중요한 영역이 됐죠. 1970년대에 아시아 경제는 아주 빠르게 발전했고, 특히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亚洲四小龙)’이 있었죠. 당시 제가 한 연구는 정치경제학에서의 계층 문제였습니다. 대만과 한국의 토지개혁과 계급 변화에 대해 연구했죠. 연구로 인해 작은 성취가 있었고, 계속해나갈 수가 있었죠. 

펑파이 : 선생님께서 박사 학위를 딴 후 오랫동안 교수로 일하시다가 나중에서야 노동자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네요.

구해근 : 80년대 초에 이르러서 한국에 한 번 갔었어요. 그때 우연히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찾았죠. 진보적인 교회와 학생 리더들이 조직한 야학에 모인 여성 노동자들이 쓴 거였어요. 그들은 모두 농촌에서 상경했고, 돈을 벌어 집안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온 거였어요. 노동조건은 아주 열악했죠. 매일 12시간에서 14시간씩 일했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도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야학에 참가한 겁니다. 대학생 조직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지하에서 출판하는 방식으로 발행했어요. 저는 이와 같은 자료들을 하와이대학으로 가져왔어요. 사회의 불공정함을 알고 있긴 했지만, 노동자들이 몸으로 겪은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을 읽으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고,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시엔 일종의 강렬한 죄책감을 느꼈어요.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당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를 ‘노학연대’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은 퇴학하거나 휴학한 후에 공장에 들어갔죠. [인터뷰어 : 1980년대 운동을 목적으로 공장에 진입한 학생들은 약 3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고작해야 나는 미국에서 편안하게 조교수나 하면서 한국의 경제 기적에 대해 쓰고 있구나!’ 이 일기들을 읽었을 때, 저는 최소한 이걸 번역해서 전 세계가 한국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대학생들은 항쟁과 정치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써내고 있었는데, 노동자계급의 시각에서 출판된 것은 적은 편이었거든요.

죄책감과 정치적 양심 말고도 학술적인 포부도 있었습니다. 당시 수업에서 흐리멍텅하게 톰슨(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을 읽고 있었는데요. 의심할 바 없는 대가의 저작이었죠. 저는 나중에 이런 책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발견한 후에 저는 더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한국 노동자운동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노동자들의 항쟁을 사회운동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어느 정도 편협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뒤에는 노동자들이 독립적 계급이 되어 경제적인 의식과 단결의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 즉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있죠. 한국의 문화 환경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계급은 영국이나 미국의 역사 과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점이 바로 저의 학술적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노동 연구를 한 것이지, 마르크스주의나 좌파적인 입장처럼 노동자계급은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출발 한 게 아닌 거죠.

펑파이 : 그 점은 선생님의 연구 경로를 여러 측면으로 나누죠. 한편으로는 사회운동과 정치투쟁의 시각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시대적·지역적 경험으로서 전통적인 사회계급이론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말예요. 선생님은 국가와 문화라는 두 포인트를 주되게 제시하셨는데요.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자본의 확장이 결합됐다는 점이 있고요. 그리고 유교문화의 ‘경청’과 ‘복종’이라는 훈육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억압으로 인해서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노동자운동 문화가 파생되기도 했죠.

구해근 : 동아시아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에서 국가의 역할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이는 아시아의 경험과 초기 공업화 국가를 구분케 하죠.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시기 한국은 수출지향의 국가자본주의를 유지했고, 정부는 끊임없이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을 탄압했습니다. 아주 노골적인 친자본·반노동자의 입장을 드러냈죠.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형성되고, 그로 인해 노동자운동의 전개를 촉진시켰습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일거리를 찾지 못하게 되고,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일단 드러나게 되면 퇴학 당하고 취직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죠. 국가 권력기관은 이런 힘을 투항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서 결국 오직 단결해서 저항하도록 만들죠. 그래서 1970년대에 시작된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 산업선교운동들이 서로 간에 연맹을 결성하게 된 겁니다. 그것이 소위 ‘민중운동’의 기초가 된 거죠. 당시 그것은 ‘무산계급혁명’보다 더 가능성이 있었고, 광범위한 지지도 받고 있었습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톰슨에게서 얻었는데요.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가 제출한 ‘계급’이란 경제구조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라, 개인이 삶의 경험을 통해 반응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계급문화의 지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었죠. 한국 노동자들의 각성은 오랜 시간동안 주도적이었던 유교문화,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마주하면서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들었습니다. 노동자들과 인터뷰할 때 저는 노동자들이 ‘교육’과 ‘소실’이란 것에 대해 민감하다는 걸 알았어요. 경제적 착취에 대한 달갑지 않은 현실을 훨씬 뛰어넘어 사회에 의해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고, 그러면서 정신적 경멸과 수모를 느끼죠. 육체노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흔히 ‘더럽다’거나 ‘냄새난다’라는 말들은 노동자들을 ‘공순이’나 ‘공돌이’, ‘노가다’라고 불리게 하고, 이것이 경시의 칭호를 가져옵니다. 관건은 이와 같은 문화적 지위를 어떻게 바꾸느냐죠. 교회 활동과 야학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합니다. 1980년대의 독립 노동조합 중에서 ‘문화행동’ 공연을 전담하는 단체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노동자계급은 내심 불평등에 대한 ‘한’을 강렬하게 표현했어요. [인터뷰어 : ‘한’은 한국인들의 국민정서와 정신기질이다.] 주체적으로 그런 게 드러난 거죠. 1987년 전국 총파업이나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노동자들이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가며 나타난 ‘산업전사’의 이미지는 일종의 불복종, 자존감 넘치는 노동자라는 지위였습니다.

펑파이 : 이런 저항을 역사의 유산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산업화의 새로운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선생님이 한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분석한 아주 흥미로운 점은 노동자운동 초기 여성 노동자들이 선봉에 있었고 노동자운동을 주도하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는 사실인데요.

구해근 : 역사가 반복된다는 관점은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반역의 정신을 갖고 있었고, 큰 나라들 사이에 껴있는데다, 외세의 개입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설령 저항이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당한 억압에 맞서 싸운다는 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강한 국가(strong state)가 있어도 사회적인 ‘갈등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전통이 존재해왔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산업화 시기의 강도 높은 억압은 이러한 저항문화의 발흥에 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국가는 지속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 있고, 노동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억압했죠.

여성 노동자의 선봉적인 성격은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운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역할도 했죠. 이는 세계 노동자운동에서 아주 보기 드문 것입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모여 있었고, 생활적인 연계가 긴밀했습니다. 한 공장 안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같은 지역이나 학교에서 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대우는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떨어졌고, 노동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낮았습니다. 이렇다보니 그들의 투쟁성이 만들어진 거죠. 또 진보적인 교회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교회들은 여성 노동운동가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리드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남성 노동자들의 와해와 반발을 부추기기도 했는데요. 1980년대에 이르러 노동자운동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때 한국의 공업 발전이 중공업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남성 노동자들은 수량이나 그 중요성에 있어서 우세를 점하게 되죠. 그로 인해 노동자운동의 성격 역시도 남성화되고 준군사화됩니다.

펑파이 : 냉전시기에 한국 교회의 확장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참여와 리더쉽이 두드러졌죠. 당시에는 남성들이 가가호호 방문을 다니면 지하 결사운동이 의심됐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들이 ‘비정치적’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1990년대에 와서는 여성의 역할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쇠락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노동문화운동이 전반적으로 미미해졌습니다. 노조는 더 이상 다양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지 못했고, 파트타임 경제의 활성화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산으로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주변화되고 낮은 곳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구해근 : 1990년대에 제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책을 썼을 때에는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대한 큰 낙관이 있었습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에 노동조합의 입장은 보수적으로 변했죠. 제가 만났던 일련의 활동가들은 이와 같은 흐름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이 비로소 독립적인 주체이자 문화운동이라는 얼굴로 나타났을 때,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라는 중상을 입은 것이죠. 부득이 IMF(국제통화기구)의 구제정책을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1998년 정부의 리드로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는데요. 이 위원회는 노동운동을 중재하는 틀이었죠. 민주노총은 고용 문제에 있어 자본 측에 크게 양보해 대규모 정리해고를 용인했고, 대신 단기 계약직 고용을 할 수 있도록 합의했습니다. 산업 구조상 중소기업과 대기업 재벌의 분화가 가속화되었고, 대기업 노조와 자본의 관계는 모호했죠. 그들은 임시계약직 고용의 활성화를 묵인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본은 일정 수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게 됐죠. 자기 일자리의 안전을 위해서 긴장 관계에 있던 노자관계의 항쟁을 임시 고용으로 전이시킨 겁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중국어판 《韩国工人》 표지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기업들은 경영 전략과 방법을 바꿉니다. 정규직 노조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라, 기업 복지 향상을 통한 노사관계의 개선입니다.

정규직 노조에 대해 거부 자세를 택하지 않고 처우와 복지를 향상시킴으로써 노사관계의 긴장을 완화했죠. 그렇게 해서 대기업 노동자들은 안정적이고 쾌적한 생활을 영위하게 됐고, (통치자들과 매스미디어가 말하는) ‘노동귀족’이 됐죠. 

과거의 정치운동 동맹, 예컨대 대학생들과 사회단체가 정체성 정치나 다른 이슈들로 관심을 돌리면서 사회적 항쟁을 목적으로 한 노동자운동은 후퇴합니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직접적인 정당 지지도 없고, 그 때문에 제대로 된 대표도 없습니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을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부르죠.

제가 2000년 초 한국에 돌아왔을 때 과거의 리더들은 고급 아파트에 살며 SUV를 타더군요. 그들은 저에게 “교수님 죄송해요.” 우리는 이제 다들 중산층이 됐네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미안한 건 없어요. 이념과 입장만 잊지 않으면 되죠.” 안타깝지만 그들은 이미 초기에 가졌던 자신의 신념을 잊었다고 생각합니다.

10% 대 90% : 귀족 중산계급의 근심

펑파이 : 전통적인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은 아마 모두 “대표성의 위기”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대표해야 할 조직들과는 점차 멀어지고 있죠. 이는 유럽의 좌익정당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 점입니다. 노동자 내부가 분화되었고,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나 공동 이익의 추구를 통해 통합하는 것은 매우 어렵죠. 이는 20세기 초반과는 다릅니다. 당시 노동자계급은 국제노동자연맹을 조직했고, 전 지구적인 계급으로서의 감각이 있었죠. 하지만 오늘날에는 드문 사례들을 제외하면, 이처럼 국제 노동운동과의 연대는 매우 적습니다. 심지어 일국 내에서 노조를 만드는 것조차 힘들죠. [인터뷰어 : 예외적 사례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2010-2011년 한진중공업 파업 과정에서 한국과 필리핀의 노동조합이 서로 연대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구해근 : 이러한 노동의 분화가 제가 중산층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이유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배경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중산층에서 더 현저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산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대적으로 단순하죠. 현행 관념 속에는 중국, 인도, 혹은 과거의 한국처럼 중산층이 확대될 것이라고 보고, 정부 역시 “신 중산”이라는 이미지로 자신의 합법성을 공고히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과 미국 같은 탈산업 국가들처럼 쇠락할 거라는 거죠. 이와 같은 관점에는 중산층 내부의 분화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경제 분화는 종종 1% 대 99%의 틀이죠. 그것은 월가 점거 운동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슬로건입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를 보면 모든 중산계급의 수입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죠. 상위 10%나 20%를 보면, 그들의 자산은 증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10%를 더 많이 봐야 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계급성은 무엇인지.

제 관점에 이 10%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중고급의 관리자층, 엔지니어이거나 컨설턴트인데요. 본래의 중산층 신분에서 이탈하고 있는 중일 수 있고, 스스로를 일반적인 중산층과는 다른 소비문화와 교육문화를 만드는 주된 힘으로 보고, 세계화 과정을 빌어 특권을 얻었습니다. 한때 문화적인 흐름을 가져온 부르주아에 비해 이들 신흥 중산층은 물질주의라는 환경에서 성장했죠. 이 나라들은 하나같이 경제 성장을 거의 유일한 목표로 삼은 나라들이며, 중산의 정의를 주로 경제 지표를 통해 짐작합니다.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 경제는 불안정합니다. 부유한 중산층은 그들의 지위를 지키고 싶어하며, 이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은 안정감이 작동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문화는 현재 세습중산층[역주 : 편의상 원문이 ‘权贵中产’이라고 표기한 것을 ‘세습중산층’으로 번역함]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습중산층들이 어떻게 일반 중산층에서 벗어나 더 많은 특권을 쟁취해나갈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마 ‘조국 사태’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과거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보수화되어 제도의 일부가 되어버렸죠. 이들은 안락한 경제적 지위를 누리며 강남에 살고 있다는 ‘강남 좌파’라는 풍자를 듣고 있습니다. 민주와 평등을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는 새로운 귀족이 된 거죠. 이들은 과거의 ‘공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역량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던 단기 노동자는 전통적인 노조와 이른바 ‘진보 정부’로부터 사실상 동시에 버림받았죠. 이것의 일부 책임은 신흥 세습중산층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펑파이 : 세습중산층 또는 부유중산층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한 계급입니다. 그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됐고, 다른 계층과 갈라진 거리는 점차 커지고 있죠. 하지만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날 뿐입니다. 이 집단은 부의 축적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고 있죠.

구해근 : 이런 깊은 불안감은 그들을 둘러싼 경제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회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에 획득한 특권으로 불안정한 특성을 지니고 있죠. 세습중산층은 ‘파티션’[역주 : 원문에서는 隔断. 여기서는 사회로부터의 특권적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 사로잡혀 있고, 구획화된 아파트단지[역주 : 원문에서는중국식 기초 주거·행정단위 社区. 실제로는 중산층의 gated community를 뜻하는 것으로 보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해외로 유학을 보내죠. 사회 규범을 새롭게 세우고 삶에서 다른 계층과 더 구획지어지길 바랍니다. 그 점은 교육 문제에서 특히 중요한데요. 교육의 질적 차이에 그치지 않고, 이른바 엘리트 교육과 엘리트 그룹 안에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어교육에 열광해 기러기 아빠, 즉 혼자 국내에서 일하면서 아이와 엄마를 해외로 보내고 부양하는 ‘철새 가족’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파티션’을 추구하고, 비용도 따지지 않고 교육에 투자하는 것으로는 아마도 불안을 충족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점은 새롭게 떠오른 부유한 중산층의 명확한 인식에서 기인하는데요. 자기 세대에 쌓아온 특권을 다음 세대에게 이전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거죠. 영국 사회학자 필립 브라운(Philip Brown)이 말했던 ‘기회 함정’(opportunity trap)에 세계 신진 중산층들이 빠져 있는 겁니다. [인터뷰어 : ‘기회 격차 opportunity gap’는 계층별로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기회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기회 함정’이 지칭하는 것은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오히려 실업과 기회의 부족을 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가령 고등교육을 보급하지만 오히려 문학 박사의 수는 늘고 일자리는 적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한다.]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가 계속되면서, 그런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송출국의 아이들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하죠. 부모는 계속해서 결혼 등 후대의 삶에 개입해야 합니다. 중산층은 이런 악순환이 불평등을 증폭시키고, 다음 세대의 입지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펑파이 : 중산층의 어려움을 언급할 때, 과거 노동운동처럼 뚜렷한 항쟁의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까 일정 부분 이런 억압은 스스로 가중시킨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희생’에 기대 바꾼 상황에서 고통이 생기는 거죠. 제가 한국 문화예술을 보면 줄곧 비판적인 작품들을 내놓는 걸 보게 되는데요. 가령 <기생충>처럼 말이죠. 이런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글로벌 의식’과 연합에 있어서 ‘각성’이 필요할까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상황이 세계 경제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죠.

구해근 :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입니다. 한국 문화예술계가 현실에 대해 갖는 관심은 좋은 일이죠.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까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지만, 중산계급의 상황은 대부분 욕망으로부터 비롯됐고, 그것이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죠. 이와 같은 사적이고 보수적인 심리는 1990년대의 산업 변화와 구조조정 때문입니다. 1980년대 전에 흥기했던 노동자운동은 정의감과 분노의 단결에 기초하고, 이는 진정한 노동자계급의식과 조직을 확립하기 전에 해체되었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절박하게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중산층 의식이었죠. 일부 노동자계급은 부유한 중산층이 됐습니다. 이전에 노동자들의 격분의 기원은 바깥 세계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부인하는 것이었는데요. 소수의 사람들이 상층의 중산층으로 올라간 후, 욕망은 현 상황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전환됐습니다. 이것 역시 노동자계급운동의 요구와 노선이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이르러 중산층이 된 사람들의 이익과 요구는 분화되었고, 상황은 복잡해졌죠. 

‘글로벌 의식’을 얘기하셨는데요. 노동자운동에서 그것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노동자운동이 소리내고 단결하는 방향은 여전히 유럽과 미국의 운동으로부터 목소리를 듣고 자원적인 지지를 찾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인정받는 게 아시아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보다 더 크게 여겨지는 것 같아요. (강조는 역자)

펑파이 : 현 상황에 대한 민중들의 ‘반등’(反弹)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거기엔 일종의 ‘국가주의’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안정한 경제에서 갇혀 있는 사람들은 국가를 글로벌 경제가 가져온 위기에 대한 보호막으로 여기기 시작했죠. 예컨대 신흥 자본이나 전통적 재벌 자본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마주할 때, 노동자들은 최후의 개입과 중재를 발휘할 힘으로 국가에 의지할 수 있죠. 동시에 이는 일종의 미래를 향한 상상이기도 한데요. 자동화의 보급에 따라서 특히나 적극적으로 보유한 신기술을 확대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육체노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른바 ‘포스트 노동’의 시대입니다. 끝으로 선생님이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구해근 : 국가주의 경향이 커지고 있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국가의 함의는 과거 몇 년 간 큰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국가로 하여금 개입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바깥의 힘으로 국가가 인식되기 때문인지 봐야 합니다. ‘노동’에 대한 토론은 사회학에서도 열기가 뜨겁습니다. 저는 노동은 그 자체로 소멸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노동에 대해 토론할 때 여전히 육체노동을 가리키곤 하는데요. 이는 육체노동에 대해 여전히 뭔가 도태된 것, 저급한 것이라고 보는 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보기에 직업이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거나 실제 생산이 없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그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게다가 일의 높은 보수를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의 노동자 투쟁 방향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 노동자 조직과 NGO들의 범주에서 보면, 후자(시민운동)는 젠더나 환경 의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죠. 단시간 내에 통합의 추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 노동자들의 격렬한 항쟁 전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까 언급했던 긱 노동자(gig worker)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으로 옮겨졌죠. 장기간의 파업과 단식 투쟁, 새로운 노동조합 모델, 그리고 투쟁성이 강력하고 여성들이 주도하는 등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노동자운동의 발전과 매우 흡사하죠.

이런 변화들은 우리를 고무시킵니다. 저는 상세한 자료들을 찾고 싶지만, 제 나이가 이미 많이 들어서 현장을 따라다니며 이런 추세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이건 아마 미래의 학자들에게 남겨진 과제겠죠.

질문 : 샤오위(晓宇) 옥스포드대학 정치학 박사
인터뷰 : 구해근
번역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