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에서 만달레이까지,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보름 동안 무슨 일이?

미얀마는 서쪽으로는 인도·방글라데시, 동쪽으로는 태국·라오스, 북쪽으로는 중국 윈난성과 접한 동남아시아 국가다. 면적 676,578 km²으로, 한국의 6.7배이고 한반도 전체 면적의 3배에 달하고, 인구는 5,48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보다 300만 명 가량 많다. 버마족이 ⅔ 이상의 인구를 차지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들이 지역별로 세력화되어 있다. 그러니 미얀마 사회를 둘러싼 쟁점은 매우 복잡하고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군부 독재 치하에 있었고, 2015년 처음으로 민선 정권이 수립됐다. 그러나 이 정권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지는 못했고, 통치 기간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반쿠데타 시위만이 아니라, 역사적 모순, 대미·대중 관계와 얽힌 함수, 아세안과 미얀마, 현지 노동자운동의 상황 등에 대해 시리즈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2월 1일 쿠데타 이후 미얀마 상황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스케치한 글이다.  

전개

1일차 : 아마도 악마가

2월 1일 이른 아침. 일련의 장갑차가 의사당을 향해 진격했다. 행정수도 네피도의 의사당 앞 거리에서 매일 같이 에어로빅댄스를 추고 영상을 업로드하던 Khing Hnin Wai라는 여성의 뒤로 여러 대의 장갑차들이 지나갔다. 이날 미얀마 연방회의(상원)는 2020년 11월 치뤄진 총선거 이후 처음 개회될 예정이었다. 

오후까지만 해도 미얀마 현지 상황은 고요한 것처럼 보였다. 쿠데타가 이루어진 뒤 몇 시간 후 단절됐던 전화 통신망과 방송 네트워크는 서서이 복구되었다.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얀마 전역의 금융 업무도 한동안 정지되었고, 이내 다시 복구됐다.

아웅산수치(Aung San Suu Kyi) 국가고문과 윈 민(Win Myint) 대통령 등 고위급 인사들이 잇따라 체포됐다. 체포 당시 군부는 구체적인 혐의를 밝히지 않았다.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곧바로 아웅산수치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 군부의 행동을 수용하지 말고 항쟁할 것을 호소했다. 

수치 여사를 비롯한 NLD 상층이 군부에 의해 체포되자 국제 사회의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신임 국무장관 블링컨은 “미국은 미얀마 국민들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염원과 함께 한다”며, “미얀마 군은 반드시 즉각 쿠데타와 정치인사들에 대한 체포를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과 인도, 호주 등 정부들도 사태를 주시하고 읽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대표는 “미얀마의 각 세력이 헌법과 법률의 틀 내에서 이견을 선처해주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인도 외교부 역시 “법제와 민주적 프로세스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2일차 : 세상은 끝나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직접 성명을 냈다. 바이든은 “미얀마가 민주적 궤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압박하기 위해 미얀마군 및 유관인사들에 대한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국제사회는 마땅히 함께 한 목소리를 내고, 미얀마군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들이 즉시 권력 탈취를 포기하고 억류된 활동가들과 관리들을 석방하고, 통신에 대한 모든 통제를 철회하며,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을 중단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먼라이츠워치를 비롯한 리버럴 성향의 NGO들도 바이든 행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라고 촉구했다. 

민 아웅 훌라이 참모총장이 이끌고 있는 군부는 1년 동안 국가통수권을 유지하겠다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선거를 치루어 새로 선출된 정당에 정권을 넘기겠다는 것이 군부가 밝힌 향후 플랜이다. 

그날 밤 미얀마 군부는 중앙정부에 있던 24명의 장·차관을 해임하고, 국방부와 변경사무부, 계획부, 재정산업부, 투자및대외경제관계부, 국제협력부 등에서 11명의 관료들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시민들은 불복종 운동을 개시했다. 쿠데타 직후 저항이 군부의 강력 진압에 구실을 줄까 우려했던 시민들은 하나둘씩 거리로 나왔다. 둘째날 밤 양곤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소음 시위’는 이런 불복종 운동의 전초적 단계였다. 시민들은 테라스나 창문가, 혹은 거리로 나와 어떤 구호도 없이 냄비 등 물건을 들고 소리를 냈다. 거리를 지나가던 차량들도 경적 소리를 내며 이 행동에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시민들은 용기를 갖기 시작했고, 거리로 쏟아져나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소음 저항’은 매일 저녁 8시 정각에 시작된다. 첫날 집 안에서 소음 시위를 벌였던 시민들은 이제 집 밖으로 나서서 냄비와 그릇을 두드린다. 1988년 민주항쟁 이래 대중운동이 폭발할 때마다 불리곤 했던 민중가요 “세상은 끝나지 않을 거야”(ကမ္ဘာမကြေဘူး)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역사를 쓸거예요, 할아버지!
오~ 사랑할 줄 아는구려
100 피트 도로 위에 청춘들이
새로운 역사를 쓸거예요, 할아버지!
온 국민이 용감하게 나섰어요, 아버지!

100 피트 도로 위에 청춘들
절대 포기를 모르는 형제들이여
형제들이여
나라를 핍박하는 폭군들이 아직 남아있으니
망설이지 말자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우리의 영웅들 처럼
굳건히 맞서 싸우자꾸나!

형제들이여
나라를 핍박하는 폭군들이 아직 남아있으니
망설이지 말자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우리의 영웅들 처럼
굳건히 맞서 싸우자꾸나!

 

3일차 : 세 개의 손가락

시작은 병원이었다. 30여 개 도시 70여 개 병원에서 의료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의사와 간호사 등 노동자들은 빨간 리본을 달고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저항할 것을 표명했다. 영화 <헝거 게임>에서 저항자들의 표식으로 등장했던 ‘세 개의 손가락’은 2020년 태국 방콕 대중시위에서도 상징적 기표로 등장한 바 있다. 의료 노동자들의 저항은 확실히 전국 각지의 시민들을 자극했다.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불복종에 참여하는 직종과 지역이 늘어났다.

군부는 의료 노동자들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현지 언론 프론티어미얀마가 전한 현지 의료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양곤에서 일을 멈추지 않은 의료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같은 날 군부는 아웅산수치를 수출입법 위반 혐의로, 원 민 대통령을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응 관련 자연재해관리법 위반으로 형사 고발했다. 아웅산수치의 자택에서 여러 대의 무전기가 발견됐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떻게든 둘을 구속시키고, 쿠데타를 법적으로 정당화하겠다는 게 군부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엔 빌미가 너무 협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4일차 :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오랫동안 단절된 지역

여전히 60만 명 이상의 로힝야족 사람들이 살고 있는 라카인주에서 인터넷 복구에 대한 소식이 들렸다. 라카인주는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오랫동안 단절된 지역이었다. 2019년 가을부터 무려 19개월 동안 인터넷이 끊겨 있었다. 로힝야족에 대한 군부의 학살과 아웅산수치 정부의 방조 및 협조가 빚은 참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부와 친근한 아라칸민족당(The Arakan National Party)은 라카인주에 만연한 반NLD 정서를 바탕으로 로힝야 사람들을 우롱해왔다. 로힝야 학살에 대해선 침묵하고, 반NLD에 기반해 지역민족주의를 주창했다.

로힝야 학살은 미얀마가 지닌 이와 같은 역사적 모순과 대버마주의의 함정, 동시에 지역민족주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투명한 창이었다. 아웅산수치는 모순적이게도 대버마주의를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군부 세력을 통제하려 시도했다. 

한편 군부가 지난 총선이 총체적으로 위법했다고 선언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에서도 NLD 소속 70여 명의 입법의원 당선자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선서했다. 이들은 민 아웅 흘링(Min Aung Hlaing) 참모총장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학했다고 비판했다.

 

5일차 : 민주주의를 지키자

교사와 대학 교수들이 제1도시 양곤의 거리로 나와 쿠데타를 비판하는 불복종 시위를 펼쳤다. 사람들은 “군사 쿠데타를 저지하자”, “민주주의를 지키자” 등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 시위를 이어나갔다. 500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들은 붉은 리본을 달고 출근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업무를 멈추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인증샷을 촬영하고,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했다.

한편 NLD는 군부 쿠데타에 맞서 파업했다가 해고된 모든 노동자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군부는 미얀마 통신사업자들에게 페이스북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군부는 이 조치가 토요일(2월 7일)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맥주회사 기린은 미얀마 군부와 관련된 기업과 도모하려 했던 합작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6일차 : 어느 쪽에 설 것입니까?

아침 9시. 시민불복종 운동이 거리를 점유하기 시작했다. 미얀마학생연합회 전 의장을 비롯한 청년 활동가 약 100명이 양곤 중심 거리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자 시위 행렬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머리끈을 묶은 여성들도, 공장으로 출근 중이던 안전모를 쓴 남성 노동자들도 있었다. 시위 행렬의 선두에는 미얀마학생연합회 깃발과 카렌족 깃발이 보였다. 이 시위가 버마족만의 저항이 아니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이 시위는 군부 쿠데타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다. 시민불복종 행동은 파업과 거리 시위로 확대됐고, “민주주의를 지키자”, “군사 쿠데타를 반대한다”, “독재정권 퇴진하라” 등의 구호들이 울려퍼졌다.

100명의 학생들이 양곤 시내 번화가 레단길에 도착했을 때 시위 행렬은 이미 5000여 명으로 불어나버렸다. 경찰은 레단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시민들을 가로막았다. 시민들은 항의 구호를 외치거나 혹은 경찰에게 음료수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경찰들에게 건네진 음료수에는 하나같이 “억압자와 피억압자, 어느 쪽에 설 것입니까?”라는 질문이 적힌 쪽지가 붙어있었다.

바리케이드 앞에서 양측이 대치하는 사이 미얀마 전역의 인터넷이 다시 중단됐다. 일부 현지 언론들만 국제전화 인터넷카드로 시위 상황을 업데이트할 수 있을 뿐이었다.

 

7일차 : 용기있게 위대하게

인터넷 차단은 이튿날인 7일 오후 2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전화통화와 문자메시지를 통해 동료 시민들을 조직했고, 이로 인해 시위 대오는 더 불어나있었다. 양곤을 넘어 파테인(ပုသိမ်), 타라와이(သာယာဝတီ), 프롬(ပြည်) 등 지방 도시로 시위가 확산됐다. 양곤에서는 10만 명 가량이 거리로 나왔다. 이날까지도 모든 시위는 평화로웠고, 시민들은 강력한 열기로 구호를 외치면서도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들을 설득하려 했다. 

가두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은 금색 공작새 한 마리와 동그라미가 그려진 붉은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붉은색은 학생들의 용기를, 금색은 위대함을, 동그라미는 독재권력을 압박하기 위한 덫을 상징한다. 

이날 저녁 8시 동부의 한 도시에서는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거리로 나와 도시 전체를 누비며 사이렌을 울렸다.

 

8일차 : 중요한 건 색깔이 아니다

쿠데타 이후 한 주가 지났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전국적인 ‘총궐기’가 제안됐고,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양곤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 대오가 “양곤의 명동거리”와 같은 레단 거리로 진출했다. 평소 이곳은 청년들이 춤 연습을 하거나 빈민 어린이들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재스민꽃을 파는 모습이 보이는 곳이다. 미얀마학생연합회 등 급진주의 조직들의 청년활동가들은 연단에 서서 “총궐기”를 위한 5대 목표를 되새겼다. ① 민주주의 실현, ② 독재에 저항, ③ 헌법 폐지, ④ 정치범 석방, ⑤ 연방제 민주주의 수립이 그것이다. 양곤의 또 다른 집결지 시청 광장에도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제각각의 모습으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양곤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가령 카친주 밀지나에서도 처음으로 쿠데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샨주 라시오에서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시민들은 라시오대학 정문 앞에서 행진을 시작해 2시간 동안 행진했다. 샨족만이 아니라 버마족, 화인 등 가리지 않고 서로 뒤섞여 함께 싸웠다.

몽유와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수천 명의 시민들이 플래카드와 미얀마 국기를 들고 비가 막 그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도심 한복판 시계탑으로 모인 시민들은 “군사독재에 맞서자”, “2008년 헌법을 폐지하자”, “민주연방을 건설하자”, “불법 구속자를 석방하라” 등 구호를 외쳤다.

수도 네피도에서도 수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오토바이 행렬은 미얀마의 건국영웅이자 아웅산수치의 친부인 아웅산 장군 동상 앞으로 모여 군부 쿠데타에 항의했다. 군경과의 대치가 길어지자 경찰은 물대포를 쏴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만달레이에서는 검은색 직업복을 입은 변호사들이 “군사 독재에 항의한다”는 슬로건이 종이를 들고 법원으로 향했다. 도로 양옆에서 변호사들을 기다리던 시위대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지나가던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은 경적을 연발했다. 

미얀마 전역의 병원·로펌·대학·은행·전력공기업·소방서 등에서 광범위한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미얀마의 반군부 쿠데타 시위에서도 Z세대는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미얀마의 Z세대는 1988년 이후 태어난 청년들을 지칭하는데 온라인-오프라인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Z세대의 전투’라 부른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도구에 익숙하고, 해외 미디어의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는 게 특징이다. 또, 각양각색의 시위 전술을 지향하는 모습에서 2019년 홍콩이나 2020년 방콕을 떠올릴 수도 있다. 

8일 밤, 미얀마군은 오후 8시부터 오전 4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선포했다. 특히 시위가 빈발하는 양곤과 만달레이에서는 5명 이상만 모여도 ‘불법’이라며 엄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TV 채널에서는 조용하고 밝은 거리에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풍경만 나왔다. 문 밖의 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만 방영되고 있었다. 군이 묘와디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카렌족 평화지원네트워크(KPSN)는 성명을 통해 “평화 정착은 끝났다. 우리에 대한 군부의 전술적 분열과 통치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각 민족, 진보적인 민간사회단체와 국제사회 사이에 새롭고 효율적인 연대를 구축해 새로운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중국 윈난성과 티벳자치구와 면한 접경지역 미얀마 북부 카친주(ကချင်ပြည်နယ်, Kachin State) 여론은 쿠데타 상황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운동이 NLD가 이끄는 운동일 뿐이고 그들이 회복하고 싶은 것은 단지 ‘대버마주의’에 입각한 민선 정부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냉소는 오랜 시간 누적되어온 민족 간 갈등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 쿠데타를 몰아내고 연방제 민주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에 NLD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반쿠데타 전선은 제대로 형성될 것이다. 실제 카친족 활동가들은 ‘붉은 색이 아닌’ 검정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하는 “Movement for 2021”을 준비 중이다. NLD의 붉은 색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좌파적 경향의 활동가들은 “중요한 것은 색깔이 아니다. 쿠데타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이다”라며,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고 있다.

민 아웅 흘링 군사정부 수반은 첫 TV연설에서 수치 여사의 전국민주연맹에 의해 압승된 11월의 선거는 부정적이었다며 쿠데타는 정당하며 헌법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상시기의 과제가 끝나면 헌법에 따라 자유롭고 공정한 다당 총선이 치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선자는 민주적 기준에 따라 국직을 이양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고, 학교와 불교 탑을 재개하는 것을 포함한 코로나 바이러스 규제 철폐를 발표했다.

 

9일차 : 무더기 체포

시위가 그칠줄 모르고 계속되고 심지어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자 군부는 “안정을 위협하는 시위에 대해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양곤, 만달레이, 네피도의 3대 도시와 다른 여러 도시에서 집회와 야간 통행금지가 발효되었다.

그럼에도 아웅산수치의 축출에 반대하는 시위가 나흘 연속 벌어졌다. 네피도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고 고무탄이 발사됐다. 이로 인해 최소 4명의 시민들이 고무탄과 실탄 등 총에 맞아 다쳤다. 한 여성은 치명상에 가까운 중상을 입어 응급실로 실려갔다. 병원 측 X레이 검사에 따르면 총알은 실탄임이 밝혀졌다.

양곤대학 인근 주요 도로는 모두 군인들에 의해 봉쇄됐다. 시위대 일부는 퇴각했고, 장갑자 10여대가 최소 6발의 물대포와 함께 이 지역의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미얀마 군의 인권침해’에 대해 국제사회가 강력히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2월 1일 이후 최소 150명이 체포됐고, 그밖에 많은 민간정부 구성원들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미얀마의 시위 분위기는 2020년 가을 뜨겁게 일어났던 태국 방콕의 저항과 유사했다. 양곤의 많은 시위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세 손가락을 들어 인사했다. 이는 방콕에서도 저항의 상징적 기표였다. 그리고 두 운동 모두 2019년 홍콩항쟁이 그랬듯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를 막던 경찰들이 시위대 편에 서기 시작했다. 동부 로이카우 시에서는 4명의 경관이 탈주해 반쿠데타 시위에 가담했다. 일반적으로 대중 시위가 벌어졌을 때 경찰이 권력에서 갈라져나와 시위대와 함께 서느냐의 여부는 봉기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게다가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지역 정당들마저 군사 정부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만달레이에서는 최루탄이 쏟아졌다. NLD 소속 정치인을 비롯해 방송사 DVB 소속 저널리스트 등 30명이 이날 시위에서 체포됐다. 

 

10일차 : 슬픔과 분노

미얀마 군부가 미얀마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미얀마 군부의 시위 금지에 항의하며 수만 명이 5일 연속 거리로 나섰다.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아대며 시민들을 해산시키려 노력했다. 

네피도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는 경찰관들이 실탄 사격을 했고, 머리에 총을 맞은 여성 1명을 포함해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시민이 총에 맞은 직후의 사진이 시위 현수막에 등장했고, 슬픔과 분노의 표정과 함께 인터넷에서 널리 공유됐다.

대규모의 시위대는 양곤 거리로 장악한 후, 아웅산수치의 가택을 향해 전진했다. 아웅산수치의 집 근처에 물대포 트럭들이 나란히 배치됐다.

군부는 전면적인 통행금지를 공포하고, NLD 본부를 급습했다. 당사의 문은 부서졌고, 컴퓨터와 서버 장비들이 죄다 털렸다. 

의료진과 항공 관제사, 교사들이 파업을 벌였고, 다른 노동자들도 작업복에 빨간 리본을 단 채 출근했다. 

미얀마의 관영 매체 글로벌 뉴라이트(Global New Light)는 주말부터 시작된 시위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난하며 경찰의 부상만을 언급했다. 

 

11일차 : 아세안의 모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정상은 ASEAN 회원국인 미얀마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특별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세안 정상들이 의미있는 행동을 취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아세안은 오랫동안 가맹 국가의 내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아주 원론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수준의 우려 표명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브루나이, 싱가포르, 태국 정부도 제각각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군부에게 시간을 벌어줄 뿐이었다.

 

12일차 : 가짜 뉴스

시위가 계속될수록 체포자도 늘었다. 2월 12일, 군부의 계엄적 진압에 저항하며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졌고, 경찰과의 충돌도 격화됐다. 이날 각지에서 일어난 시위는 대부분 평화로웠지만 쿠데타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조직됐다. 유엔 인권사무소는 쿠데타 이후 미얀마에서 정부 관료와 활동가, 승려 등 350여 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남동부 마블라미네에서는 수만명이 결집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고무탄을 발사했다. 3명의 시민들이 크게 다쳤고, 그중 1명은 경찰에게 붙잡혀 폭행당했다. 시민들은 체포된 동료 시민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까지 행진했고,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연행자들을 풀어주었다.

양곤에서는 하얀 코트를 입은 수백 명의 의사들이 불교 유적지 슈웨다곤탑까지 행진했다. 한편 열성적인 축구 팬들도 군부를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네피도와 카친주 북부의 수도 미잇키나에서도 젊은 남성들이 힙합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시위를 벌였다. 

유엔이 파견한 미얀마 인권조사관은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특별회의에서 군부가 국제법을 위반해가며 시위대에 실탄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이에 해당 회의는 민선 정부의 회복과 아웅산수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페이스북 본사는 미얀마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다”며 군부가 운영하는 페이지의 콘텐츠 가시성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14일차 : 총격

북부의 한 발전소에서 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경찰은 기자 5명을 체포했다.

쿠데타 이후 수천만의 미얀마인들이 파업을 통해 항의하거나 거리로 뛰쳐나왔다. 신문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최소 400명이 구속됐다. 체포는 주로 주말과 야간에 이뤄졌다. 반대파 활동가들이 체포 영장을 발부받았고, 군은 토요일에 24시간 넘게 구금된 뒤 사재를 수색한 사람을 한 차례 법 집행정지를 했다. 

정부나 군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거나 국가안정을 위한 보안군 활동을 저해하면 징역 20년, 안전을 저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도 발표했다. 부대의 직무수행에는 징역 7년이, 공포심이나 가짜뉴스를 퍼뜨리거나 정부 종업원을 선동하는 행위는 징역 3년이 구형됐다.

 

15일차 : 다시 끊긴 인터넷

현지시간 새벽 1시, 군부는 세 번째로 인터넷 접속을 중단했고, 오전 9시에 복구했다. 양곤과 밀지나, 와카이주 푸앵카 등 대도시의 상업 중심지에 장갑차가 배치됐고, 군인들이 거리를 장악했다.

쿠데타 이후 초기부터 파업에 돌입했던 국영 미얀마내셔널항공의 노동자들이 군부 당국의 탄압에 직면했다. 2월 3일 파업 이래 항공 노동자들은 현재 지상 직원과 객실 승무원, 정비 엔지니어어 등을 막론하고 전체 노동자의 약 60%가 업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자 군부에서 파견한 이들은 매일 저녁 항공사 노동자들의 주거단지에 나타나 당장 파업을 철회하고 복귀하지 않으면 모조리 체포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더구나 군부는 갑자기 2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을 석방했고, 정치범에 대한 구속은 지속됐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동시에 군부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려는 조치로 인식됐다.

 

16일차 : 계속된 파업

총파업을 지속 중인 공무원, 교사, 의사, 변호사, 공장 노동자들이 한데 모였다. 양곤 도심에 모인 이들은 쿠데타 철회, 구속된 이들에 대한 석방,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했다. 

지속되는 저항의 열기에 양곤에서는 수백 명의 경찰들이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평화 시위 기조는 전반적으로 이어졌다.

 

17일차 :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철도가 멈추었다. 철도 노동자들은 철로 위에 드러누워 스스로 철도 운송의 중단을 밀어붙였다. 경찰은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아댔다.

한편 익명을 띤 국외 해커들이 미얀마 중앙은행, 군부에서 운영하는 언론대응팀, 국영 방송국 MRTV 등 웹사이트를 공격했다. 그 결과 평소 연결 수준의 21퍼센트까지 접속률이 하락했다.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군부의 강력한 진압 시도와 실탄 사용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멈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 군부는 왜 쿠데타를 일으켰나? 

1962년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무려 49년 간 군부 독재 경험한 바 있다. 이후 미얀마 내 민중들의 지속적인 투쟁과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인해 2011년에 이르러 점차 형식적인 민주화의 틀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수치가 이끄는 NLD가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민선 정권이 탄생한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아웅산수치가 이끄는 NLD는 상원에서 138석, 하원 인민원에서 258석을 얻었다. 군부가 지원하는 연방단결개발당은 각각 7석과 26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러자 지난 1월 하순 군 대변인이 ‘부정선거’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해당 선거에서 860만 건의 선거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게 군부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선거인 명부 공개를 요구했고, 그러자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를 거부했다. 심지어 미얀마군은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부인하지 않겠다”며 은근한 뉘앙스를 풍기고, 그러면서도 “헌법에 의거한 시스템을 해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샨족민주당이나 카렌인민당을 비롯한 소수민족 기반의 지역 정당들 역시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했고, 친군부 성격의 연방단결개발당 역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얀마 정치의 복잡한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가령 소수민족들이 위치한 여러 지역에서는 선거가 치뤄지지 않았는데, 몇 년 전 있었던 내전 이후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그 빌미였다. 하지만 쿠데타가 일어나자 소수민족 공동체들은 군부에 반대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함께 내고 있기도 하다.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미얀마 사회가 민족을 경계로 분열했다면, 쿠데타 이후로는 다시 군부라는 모순을 둘러싼 전선으로 갈음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이래 오랜 시간동안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던 아웅산수치는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고, 2010년에 이르러서야 연금 조치에서 풀려났다. 이때부터 미얀마 군사 정권은 표면적인 민주화 개혁을 개시하고, 2015년에 총선을 실시한다. 이 선거에서 아웅산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연맹(NLD)은 대승을 이뤄 수권에 성공하고, 이듬해 아웅산수치는 미얀마 국가고문에 취임함으로써 국제적으로는 수상의 지위를 누린다. 하지만 미얀마 내정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새 헌법이 규정한 군부의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과 상대적으로 미약한 중앙정부의 권한 등 기이한 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로힝야족 문제에 대한 아웅산수치의 대처는 인권단체, 국제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판받았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군부가 다시 등극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NLD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방조했다는 식의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2019년 아웅산수치 스스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을 옹호했다는 점을 볼 때, 이런 옹호론은 설득력을 갖기 어려워 보인다. 실제 해당 지역에서 군부가 이 학살을 이끈 것이고, 중앙정부가 아무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반대로 중앙정부가 외교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얀마 서남부 라카인주에 집단 거주해온 250만 명 가량의 이슬람계 소수민족. 현재 95만 명 가량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설치된 난민 캠프와 인근 지역으로 이주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50만 명 이주, 라카인 현지에는 40만 명 정도만 남음.)

군부의 2선 후퇴로 제정된 새 헌법은 여전히 군부의 권력을 강하게 유지했다. 2015~2020년 사이 군부는 상원과 하원에서 의석 1/4 가량 유지하며, 친군부 성격의 보수파 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 역시 일부 의석을 점유했다. 동시에 군부는 국방안전위원회라는 추밀원 성격의 기관을 차지하고, 계엄권을 갖고 있어 의회 해산 등의 조치를 할 수 있었다. 또, 국방·내정·접경 등 주요 부문 장관은 오직 군부 측이 지명하는 후보 중에서 선택할 수 있고, 거꾸로 대통령이 참모총장 지명하면 군부가 비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구나 군부는 미얀마 각 지방 정부의 권력을 잡고 있는데, 한국 영토의 6.7배에 다다르는 넓은 땅에서 군부의 권력이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개헌을 위해서는 의회 3/4이 동의해야 하는데, 미얀마 정치 구조에서는 불가능. 사실상 중앙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외교권 뿐이다.

하지만 아웅산수치가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 침묵하고 방조했다는 이유로 군부 쿠데타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더구나 로힝야족 스스로 군부 쿠데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쿠데타 직후 로힝야족 지도자 딜 모하메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제사회가 나서서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회복시켜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얀마 내 버마족이 아닌 여러 소수민족들(카렌족, 샨족 등)도 군부 쿠데타에 대해 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고, 북부 지역의 대중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나아가 미얀마 내의 노동조합 및 좌파 세력도 군부 쿠데타에 맞선 파업 등의 방식으로 대중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미얀마 내의 반군부쿠데타 시위에는 지역별, 민족별 온도차가 존재한다. 가령 카렌족 사람들은 버마족 사람들의 불복종 운동이 쿠데타에 반대하고 구속된 NLD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본다. 만약 군부가 물러나고 아웅산수치 정부가 회복된다고 해도 소수민족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가 될 수 없다. 소수민족들의 오랜 요구는 ‘진정한 연방제’다. 소수민족 거주 지역의 자치권을 충분히 인정받아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47년, 아웅산 장군이 소수민족들과 함께 맺은 팡롱 협정이 그 역사적 근거다. 

버마족만이 아니라 소수민족들 전반이 함께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가운데 무늬만 ‘연방제’가 아닌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공존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 때 미얀마의 새로운 미래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미얀마에서 그것을 주도적으로 일구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이들은 NLD도, 아웅산수치도, 군부도, 지역별로 산개한 우익민족주의자들도 아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그리고 ‘Z세대’라 불리는 저항하는 청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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