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위기, 우리에게 필요한 게 ‘기본소득’인가?

방향을 잘못 잡은 ‘뉴노멀’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다. 무서운 전파력을 가진 신종 감염병의 출현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일상’은 끝났고, 이제 우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세상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들 한다. 인류문명의 지속불가능한 생태계 파괴가 코로나19를 발생시켰고, 지구화와 도시화라는 이 세계의 조건이 코로나19를 확산시키는 주된 원인이었다는 점이 이론의 여지없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좋든 싫든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계의 조건을 재검토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진지하게 대비해야만 한다.

현재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논의하는 지배적 담론의 핵심에는 ‘비대면’(untact)이 자리잡고 있다.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긴급하게 도입된 대책인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예외상태가 이제는 일상생활에서의 기준까지 바꾸고 있다.

그러나 흔히 ‘뉴노멀’(new normal)이라 불리는 이러한 사태는 단어 자체에 모순이 있다. 비대면 화상회의,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 등 ‘노멀’의 현상 자체는 새로운 것일지 몰라도, ‘노멀’이 지키고자 하는 것의 실내용은 그리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일은 계속해야 하고, 등교하지 않더라도 입시는 준비해야 한다. 달라진 것은 ‘노멀’한 것들을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다. ‘뉴노멀’은 우리에게 타인과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하면서도 스마트 기기를 통해 어디에서나 접속되어, 기존처럼 생산과 소비의 바퀴를 굴리는 ‘유비쿼터스적 인간’으로의 개조를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대비해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고유하게 유지하고 있던 삶과 노동의 방식이지, 무제한의 생산과 소비를 부추겼던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뉴노멀’은 사실 익숙한 ‘노멀’을 지키기 위한 ‘리노멀’(re-normal)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Pete Ryan for Vox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비대면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원칙인가? 이 원칙이 누군가의 삶을 더욱 위기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이에 대한 답안을 우리는 매일같이 확인하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적절한 의료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정신병원 수용자들이 제일 먼저 코로나19의 타격을 입었다. 이어 코로나19는 요양병원‧장애인거주시설 등 취약한 고리를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열악한 시설 생활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대구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가장 매서웠던 3월 초,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들이 대거 자가격리 통보를 받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적 지원체계는 부재했고, 장애인단체의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방호복을 입고 ‘동행 격리’를 자청함으로써 급한 불을 꺼야 했다.* 비대면이라는 ‘뉴노멀’이 누군가에게는 사망선고가 될 수 있음을 예시해 준 사태였다. 콜센터나 물류센터처럼 직장감염의 사례 역시 비대면이 과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터로 나가야 하는 노동자들이었고, 우리 사회는 그들의 노동 없이는 하루도 유지될 수 없다. 정부는 직장 내 감염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유연근무·재택근무 활성화를 강조하지만, 이들 불안정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헛구호일 뿐이었다.

* 「자가격리된 장애인 위해 ‘동행 격리’ 자원한 사람들」, JTBC, 2020.03.03.

애초에 우리 인간의 몸은 사이버 공간의 아이디‧패스워드로 추상화 될 수 없다. 비대면이 ‘노멀’이 된다는 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뉴노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즉, 일상생활을 혼자서 지낼 수 없는 중증환자‧노인‧장애인 등 “어떤 인구 집단에 대해선 국가가 거리를 의도적으로 좁혀야”**하며, 물리적 방역 강화가 해고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는 노동자들이 국가적 지원의 제1순위가 되어야 한다.

** 김승섭, 「누가 더 아픈지, 누가 더 희생되는지 물어야」 , 경향신문, 2020.04.24.

 

경기부양책으로 등장한 기본소득
복지 구조조정으로 향하나?

코로나19가 수개월째 지속되고 있음에도, 이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뛰어드는 정치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정치권의 논의는 ‘기본소득’이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가 엉뚱한 방향이라는 주장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형태의 준-기본소득을 체험한 바 있고, 실제 이것이 코로나 이후 얼어붙은 지역경제에 일시적이나마 도움이 됐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긴급재난지원금이 도움이 되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국민 10명 중 7명 “긴급재난지원금, 도움 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2020.05.20.

그러나 우리는 이 정책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주노동자‧홈리스 등이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빠진 것은 이 제도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가구를 기준으로 지급되면서 가족의 테두리 내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가정폭력 피해자‧탈가정 청소년 등도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다시 말해 재난지원금은 코로나 사태로 위기에 빠진 집단을 지원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 아닌 것이다. 그저 경기부양책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최근 발언이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기본소득은 수요부족에 따른 수요공급 불균형으로 생기는 구조적 경제침체를 정부의 재정조정기능으로 수요역량을 보완해 경제선순환과 지속적 경제성장을 담보하는 경제정책”이라고 밝혔다. 물론 국가적 필요에 따라서는 이러한 경기부양책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필자는 경제정책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의 타당성을 따지고 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기본소득 논의가 전개되는 맥락은 이와 별개로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다.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의는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일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며 발언을 내놓은 후 불이 붙었다. 소득보장에 가장 소극적일 것이라 예상되던 보수정당에서 이런 발언을 내놓자 여당에서도 화답하듯 말이 쏟아졌다. 대선주자 1위의 이낙연 의원도 8일 언론을 통해 “기본소득제의 취지를 이해한다”면서 “찬반 논의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이 덧붙였는데, 이 말에 앞으로 전개될 기본소득 논의의 방향과 문제점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

 

“기본소득제의 개념은 무엇인지, 우리가 추진해온 복지 체제를 대체하자는 것인지, 보완하자는 것인지, 그 재원 확보 방안과 지속 가능한 실천 방안은 무엇인지 등의 논의와 점검이 이뤄지길 바란다.”
**** 대선주자 1위 이낙연 “기본소득제 취지 이해…찬반 논의 환영”, 서울신문, 2020.06.08

 

이재명 지사는 기본소득은 경제 정책이므로 다른 복지 정책과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제한된 조건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세계에선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소득보장이다. 이것은 노동을 대가로 받는 임금도 아니고, 은행 이자도 아니며, 건물주가 세입자한테 받는 임대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구학적 기준에 따라 지급되는 수당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 지급하는 공공부조도 아니다. 기존에 있던 어떤 제도로도 설명이 안 되니 유토피아적 상상이 버무려져 소개되기도 한다. 심지어 기독교적인 희년(禧年, jubilee)사상으로 기본소득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성경 속의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사바세계의 중생들이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 어디에 돈을 쓸지 계산기를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낙연 의원의 말처럼 기본소득이 논의되는 순간 기존의 복지정책 등과의 관계 재설정 문제가 세트로 논의될 수밖에 없다. 이건 단지 재정 확보 방안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 가지 예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는 ‘보충성의 원칙’라는 것이 있다. 빈곤층에게 지급되는 생계급여는 노동소득이나 여타의 다른 제도적 지원이 먼저 있고 난 후 그것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할 경우 보충적으로만 지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초생활 수급자는 쉽사리 취업도 하지 못해 수급 상태에 묶여버리기 일쑤이고, 65세 이상 노인이라도 기초연금과 중복해서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

만약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런 ‘보충성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기초수급자에게도 기본소득이 지급될 수 있을 것인가? 긴급재난지원금이야 재난상황에 일회성으로 지급되는 것이니 이 원칙과의 충돌이 큰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매달 수십 만 원을 월급처럼 주겠다는 기본소득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초수급자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 지급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수년째 합의를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이 문제가 깔끔히 해결될 수 있을까?

결국 이 논의는 ‘기본소득과 복지정책은 별개’라고 말하는 기본소득론자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복지정책에 대한 구조조정 논의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생명정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론자들은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모두 무시하고, 기본소득을 한국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 쯤으로 제시한다. 도깨비 방망이를 원하는 그들의 심리에도 나름의 논리적 구조가 있긴 하다. 생산의 영역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도깨비 방망이가 부를 무한히 창출하고 있는데, 이를 적절히 분배할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따라서 분배 영역의 도깨비 방망이가 국민들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주고, ‘피할 수 없는 대세’인 4차 산업혁명에 적응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일자리 감소는 피할 수 없다’를 기본전제로 상정한다. 지난해 말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 농성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가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느냐”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발언이 하루하루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와 자존을 유지해 나가는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감각하지 못하는 태도가 몹시 불쾌하지만, 현재의 산업구조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이 사실에 공감한다면 우리가 시급히 논의해야 할 주제는 현재의 산업구조를 생태적으로 전환하고 ‘노동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노동’으로의 이행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기존 고용관계로부터 탈락되어 위기에 처하게 될 이들을 위한 안전장치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전장치는 새로운 노동체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단기적·중기적 처방이어야지, 그것 자체가 미래 비전일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의 기본소득론은 산업·노동·생태에 대한 구조개혁 논의를 앞질러,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리한대로 논의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정치인들은 기본소득을 어떻게든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남기기 위한 포퓰리즘에 매몰되어 ‘현금 지급’이라는 전달방식에만 집착하게 된다. 정치권의 논의가 벌써 30만원이냐 60만원이냐 등 지급 액수 논쟁으로 과열된 것만 봐도 그렇다.

여기서 미래 국민의 삶은 새로운 생명정치적 전망으로 그려진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의 최근 인터뷰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일단 전 국민 30만원 지급으로 기본소득을 시작해 보자고 하는데, 그간의 계산에 따르면 이 30만원은 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이 “자살을 멈추고 새로운 희망을 생각해 볼 수 있을 정도의 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논의의 궁극적 목표는 새로운 성장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밑바탕을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 경제와 복지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특히 복지 쪽에서는 “장기적으로 봐서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가 양립할 순 없”으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수십 수백가지 복지를 둘로 나눠야”한다고 말한다. 즉, 이 복지를 빼면 사람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는 복지와 특정 정책을 달성하기 위한 죽고 사는 문제와는 관련 없는 복지(가령, 저출산 대책)를 나눠 후자는 기본소득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논의에서 복지의 의미는 국민이 ‘가까스로’ 생존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으로 국한되고, 이를 초과하는 국가적 지원은 새로운 성장을 뒷받침할 자원으로 전부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름 객관적인 과정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죽고 사는 문제’에 해당하고 또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선별하는 매우 폭력적인 권력 작용을 수반한다. 따라서 그의 논리는 표면적인 ‘보편적 복지’의 수사와는 달리, 영국 구빈법이 공적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deserving poor)’과 ‘자격이 없는 빈민(undeserving poor)’을 분할한 ‘선별적 복지’의 원칙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기본소득의 생명정치적 특성은 그 지급방식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소득 수준 및 인구학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 무조건적 지급의 방향으로 가게 되면, 기존 복지체제가 수급자 선별과정에서 소모했던 절차적 복잡성을 축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주 간단한 본인 확인만 거치면 급여가 지급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간단한’ 본인확인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많은 기본소득론자들이 제시하는 방법은 지문인식 또는 홍채 인식과 같은 생체기술의 도입이다. 국민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현금지급기 앞에서 지문이나 홍채 인식을 통해 급여를 가져가고 그저 이달에 급여를 받아갔는지 만을 대답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말처럼 간단하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과정일까? 이미 여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생체기술을 통한 급여지급 방식은 불필요한 개인정보 수집과 이를 통한 수급자의 감시·인권침해 등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인도에서 각종 복지 혜택과 보조금 수령 등을 위해 활용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생체인식 시스템 아드하르(Aadhaar)가 보여준 사례는 끔찍한 수준이다. 50세 남성 모트카 만지(Motka Manjhi)는 식료품 배급소의 지원자격을 연장하기 위해서 생체 정보를 갱신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센터 방문을 하려면 하루 일당벌이를 포기하고 가야했다. 설령 일당을 포기하고 센터를 방문한다고 해도 수시로 네트워크 오류가 발생하는 등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결국 지문 갱신을 하지 못한 만지는 배급소에서 매번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고, 결국엔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인도 정부는 이 시스템이 복지급여를 빼돌리는 부정수급자를 찾아내 빈민에게 더 많은 지원이 돌아가게끔 하는 혁신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 제임스 퍼거슨 저, 조문영 역, 『분배정치의 시대 – 기본소득과 현금지급이라는 혁명적 실험』, 여문책
****** 빈곤사회연대 정책위원회, 「디지털 복지 디스토피아: 경향성과 대응 과제」, 반빈곤 프리즘
******* Rebecca Ratcliff, 「How a glitch in India’s biometric welfare system can be lethal」, The Guardian

 

현금은 시민권이 될 수 없다

이처럼 기본소득 논의에는 많은 맹점이 존재하지만, 경청할 만한 지점이 전혀 없지는 않다. 남아공의 기본소득 실험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의 주장도 그 중 하나다. 그는 기존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충분한 고용유지와 핵가족 체계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고, 복지국가의 사회적 개입의 기본 원리는 보험합리성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남아공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서 보험합리성의 사회적 토대는 무너졌고, ‘포디즘적 산업 노동계급으로 통합’될 가능성을 상실한 잉여 인구들이 대거 쏟아지고 있다. 그는 이처럼 사라지고 있는 복지국가의 전망을 “멋진 미래가 담지 했어야 할 유일무이한 해답이 아니라 그러한 미래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관한 여러 그림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설계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즉, 이제는 임금노동을 포함하지 않는 토착적 생존방식들에 대한 새로운 통치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다양한 종류의 경제활동을 촉진할 수 있는 유연한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판잣집의 주거 개선을 위해 한 NGO가 주최한 주민대상 워크숍에서 일어난 일이다. NGO실무자들이 몇 시간에 걸쳐 주거권의 역사와 권리의 중요성을 강의했다. 그런데 강의 말미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는 아무래도 뭔가 실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내가 들은 얘기는 내가 집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거고, 그 점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집에 대한 권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 나는 집을 원합니다.”

퍼거슨은 이 노인의 말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요구를 한다는 이유로 ‘미성숙한 종류의 정치’로 이해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서구식 사회운동은 ‘동등한 자로서의 인정’에만 집중하였을 뿐, 물질적 재화가 결핍된 사람들에게 마땅한 몫을 분배하는 데에는 소홀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 노인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몫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몫 그 자체’, 즉 ‘집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집’이라는 것이다.

퍼거슨의 말대로 이 사례는 세심하게 탐구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사례에 퍼거슨의 ‘현금지급’이라는 주장을 대입하면 상당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 노인은 지금 당장 ‘적절한 주거’라는 자신의 필요(need)를 해결할 ‘집’을 원한다고 했지, ‘현금’을 원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퍼거슨의 주장은 ‘기-승-전-현금’으로 이어진다.

이 논리가 왜 문제인지 우리나라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자. 정부에서는 주거취약계층을 지원한다면서 월세 명목의 현금인 ‘주거급여’를 지급한다. 그러나 이는 고스란히 집주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정부가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주거 급여액을 늘리면, 덩달아 월세도 오른다. 이 때문에 많은 반빈곤운동 단체들이 주거 지원의 방향을 ‘공공임대주택 확대’로 잡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오로지 ‘현금’에만 매달린다. 그로 인해 정부가 아무리 주거취약계층 지원 강화를 외쳐도 결국엔 집주인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기본소득론의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현금 지급을 시민권 부여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금만 주어지면 권리는 자동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것일까?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는 지난 5월 20일 페이스북을 통해 “장애인 거주시설에 살거나, 정신병원에 장기입원 중인 장애인의 정부 및 지자체의 재난지원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고 계신 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라는 공지 글을 띄웠다. 시설에서 거주인들에게 지급되는 재난지원금 유용사례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지고 취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 근거 없이 괜히 한 번 찔러보는 게 아니다. 장애인 거주자에게 지급되는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 횡령은 그동안 사회복지시설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고질적 범죄였다. 현금이 거주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는커녕 시설의 장애인 착취를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즉, 한 개인이 어떤 사회적 관계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서 돈의 처분권, 시민권의 행사력도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빈곤·취약계층의 삶이 품고 있는 이러한 세세한 맥락들을 모두 건너뛰고, 30만원이니 60만원이니 가격을 붙여 시민권을 분배한다고 이들의 삶이 달라질까? 오히려 이 제도의 상상 속에는 매달 급여를 받기 위해 현금지급기 앞에 무기력하게 줄 서 있는 수급자의 행렬만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대체 뭣이 중헌가?

“(기본소득은) 완전히 다른 경제적 패러다임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많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의 말이다. 다른 경제적 패러다임 만들자는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문하고 싶다. 그렇게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할 만큼, 한국 사회가 그렇게 한가한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여파가 산업 현장에는 구조조정으로, 각 가정에는 사회적 돌봄 공백으로 인한 위기 가구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방역의 위기가 노동의 위기, 일상의 위기로 빠르게 번져가고 있다. 지금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해고의 위협을 차단하는 것, 설령 일자리를 잃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기존의 사회보장을 튼튼히 하는 것, 그리고 감염병에 취약한 계층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기본소득이라는 ‘신문물’이 아니다.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제도들 안에 있다. 고용보험 혜택을 전국민으로 확대하고, 고용보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실업부조를 도입해야 한다. 또한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된 가구를 지원하기 위해 긴급복지지원제도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상생활에 지속적인 타인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장애인활동지원‧노인요양서비스 등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 공약으로 설립된 사회서비스원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지점이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최대한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경제 패러다임 전환은 기본소득이라는 신문물을 통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우리의 노동·복지·일상을 지켜나가려는 부단한 실천의 과정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하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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