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국양제는 이미 끝났다 … 중국 정부는 이제 스스로를 제약하지 않는다

[역주] 홍콩의 상황이 다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 정부가 ‘국가안전법’ 통과를 밀어붙이겠다고 발표하면서 부터다. 홍콩 시민들은 바로 항쟁에 나섰다. 지난 5월 24일엔 180명의 시민들이 체포됐고, 27일엔 300명 이상이 체포됐다. 현 상황은 매우 암울하다. 연대도 필요하고, 이해도 필요하다. 중국 정부의 속내와 전후 상황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을 발췌 번역하여 소개한다. 지난 4월 말 홍콩의 정치평론가 Johnny Y.S. Lau 劉銳紹이 발표한 글 《北京不再自我制約,“一國兩制”已半死不生》이다. 필자의 슬픈 예측은 실현되고 있고, 벼랑 끝에 선 홍콩 민주파의 저항은 가속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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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홍콩과 내지(홍콩·마카오를 제외한 중국 대륙) 간 발생한 많은 대형 사건들은 사람들로하여금 ‘일국양제’의 미래를 우려케 한다. 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낙관적인 관점은 중앙정부가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잡아 정상상태를 회복하고, 정확하고도 무오류의 ‘일국양제’를 실행해나간다는 것으로, 작금의 곤란스러운 상황은 ‘마지막 진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비관적인 예측은 최근 연달아 발생하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국양제’가 정식으로 사망했음을 선고하는 것이며, 이후 모두가 보고 싶지 않은 ‘초토화 작전(揽炒)’이 나타날 것이란 전망이다. (중략)

 

4월 셋째주의 빈번한 움직임

홍콩 반환(1997년) 이후 2014년까지 홍콩인들은 비록 관방(중국 중앙정부)의 압력이 끊이지 않고 증가해왔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그것엔 여전히 제약이 있었고, 점차적이며, 진전과 후퇴가 있었다. 하지만 우산운동 이후 공개적인 탄압과 저류에 흐르는 전략 안배의 템포가 명확하게 빨라졌다. 급기야 최근에 이르러서는, 각종 탄압이 더욱 폭풍우처럼 나타나고 있다.

지난 한 주(4월 17일~4월 24일), 홍콩 경찰은 15명의 민주파 인사들을 체포했다.(참고 : 홍콩 경찰, 민주화 인사 무더기 체포) 비록 정치적인 죄명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정치적 요구를 표현해온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단지 형사법상의 명목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밖에도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과 홍콩주재 연락판공실은 입법회의 범민주파 의원들을 포격하고 있고, 그들이 내무위원회 주석 선출을 지연시키는 것을 가리켜 Dennis Kwok(郭荣铿; 공민당 소속 입법회 의원)의 이름을 거명하며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의원 자격을 취소시킬 수 있음을 가리킨다.)

‘양판’(역주 :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과 중앙인민정부 홍콩주재 연락판공실)은 계속해서 감독 역할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기본법’ 제22조가 꼭 ‘양판’의 관할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오히려 ‘양판’이 기본법을 왜곡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국인대로하여금 기본법의 해석권을 강탈할 한다고 여기고 있다. 나아가, 홍콩 정부의 고위관료들을 대폭 물갈이하려 한다. 정상적인 과정에 따르면 이는 케리 람이 중앙 비준을 건의 및 보고해야 하지만, 바깥에선 잇따른 사건들로부터 베이징(중앙정부)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중략) 

  • 역주 : ①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国务院港澳事务办公室)은 중국의 행정부 격인 국무원 산하 조직으로, 특별행정구인 홍콩과 마카오 사회에 관한 연구, 홍콩·마카오와 중국 대륙의 경제·과학·교육등 협력 및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 홍콩·마카오와 중앙정부 간 연락의 감독 등을 담당한다. ②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판공실(中央人民政府駐香港聯絡辦公室)은 중국공산당이 홍콩에 세운 최상급 기관으로, 홍콩특별행정구정부와 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에 관련된 사무를 담당한다. 또한 선전·광저우·베이징에도 사무실이 있는데, 홍콩행 대륙 유학생 선발 등 업무를 맡는다.

작년 11월 초에는 중국공산당 19차 4중전회가 열렸다. 당시 제출된 내용은 인사 임명제도와 상황보고 및 업무보고 제도, 중앙 발언권, 국가안전보장 등을 완비하는 것을 포함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참고 : 중 공산당 19기 4중전회 폐막…현안 해법 없이 ‘시진핑 체제’ 강조) 당시 명확하지 않았던 ‘기본법 제23조’ 역시 은밀하게 실체를 드러내고 있고,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주임을 맡고 있었던 장샤오밍(张晓明)은 “이번 입법의 핵심 요체는 폐지할 것은 폐지하고, 보충할 것은 보충하는 것”이라고 암시했다. 현임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뤄후이닝(骆惠宁)의 최근 발언들 역시 일치한다. 이로 미뤄봤을 때 4중전회가 명령을 내린 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의 행동은 단지 점차적으로 이를 적용한 결과일 뿐이다.

  • 역주 :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 제23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콩특별행정구는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배반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며 반동을 선동하고 중앙 인민정부를 전복하며 국가기밀을 절취하는 행위를 금지하여야 하며 외국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가 홍콩특별행정구에서 정치 활동을 진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홍콩특별행정구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가 외국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금지하여야 한다.”

 

중앙정부의 두 심리상태

첫째. 중앙정부는 많은 일들을 진작 실현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성사시킬 수 없었고,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여기고 있다. 논의를 해도 결정을 못하고, 결정을 해도 실행하지 못하는 상황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콩 반환 이후를 떠올려보면, 많은 일들이 ‘양제(两制)’의 차이 때문에 빠르게 성사시킬 수 없었다.

사실 장쩌민(江泽民)과 후진타오(胡锦涛) 시대(역주 : 전자는 1993년~2003년, 후자는 2003년~2013년)에는 비교적 순리에 의존하며 “점차적으로 조건을 만들고자 했”다. 조건이 성숙하였을 때에서야 비로소 일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당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은 “성숙하면, 바로 추진한다(成熟一项就推一项)”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장쩌민-후진타오는 비교적 인내심이 있었고, 시간을 써 공간을 바꾸는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진핑은 2012년 취임하여 권력이 안정화된 후, 2014년에 “확실하게 전면적인 통치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출했다. 그렇기에 홍콩·마카오 공작을 맡은 한 관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홍콩 반환 이후 수년이 지났지만, 홍콩인의 두뇌는 아직도 회귀하지 않았다. 반드시 속히 정해진 사실을 만들어, 홍콩인들로하여금 반환에 적응케 해야 한다.”

‘우산운동’ 이후 또다른 관료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홍콩 3대인을 포기한다. 막 졸업한 대학생들, 여전히 대학에 다니는 이들, 그리고 청소년들.” 왜 이렇게 말하는걸까?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운동의 골수분자들이고, 이미 “백약이 무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 가속화에 대한 생각은 이미 바람을 타게 된 것이다.

둘째. 베이징(중앙정부)는 ‘우산운동’ 이후 외국 세력과 외부 세력이 나날이 두드러지고 있고, 심지어 ‘홍콩독립’과 ‘색깔혁명’의 조짐이 출현하여 국가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봤다.(참고 :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탄압받는다고?) 관방의 눈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기본법 23조’를 가능한한 빠르게 통과시키는 것은 베이징의 염원이 됐다.

하지만 베이징의 생각과 홍콩 엘리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베이징의 염원에 대해 많은 홍콩인들은 ‘악’으로 여긴다. 베이징은 홍콩이 마땅히 국가안전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홍콩 엘리트의 여론 역시 이를 반대하진 않지만, 국가안전이 정권안전과 반드시 같진 않다고 분명히 한다. 동시에 ‘국가(정권)안전’을 이용해 민주·자유를 탄압하는 것을 반대하며, 더구나 정치체제 개혁을 멈추어선 안 된다고 본다. 오랜 시일이 지나 이와 같은 불일치는 더욱 커졌고, 관방이 최근들어 압력을 강화하는 것을 야기하고 있다.

 

변화된 정책

베이징은 ‘일국’을 강조하고, 홍콩인들은 ‘양제’를 강조해 요구가 다르니,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베이징은 “기 결정한 것을 사실로 만들”고자 했다.

처음에는 수뇌부를 교체했다. 홍콩 사무를 처리해온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과 연락판공실 관료들은 대부분 오랜 기간 홍콩·마카오 공작을 맡아온 이들이었다.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은 업무 시작부터 홍콩·마카오와의 접촉을 해왔다. 일부는 그들 스스로를 ‘지항파’(知港派; 홍콩에 대해 잘 아는 엘리트정치인들)라고 여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홍콩·마카오 판공실의 전 주임 장샤오밍은 1985년 대학 졸업 이후부터 바로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에서 일했다. 홍콩주재 연락판공실 전 주임 왕쯔민(王志民) 역시 기층 위원회로부터 주임에 오르기 까지 홍콩과 내지를 여러 차례 오갔다. 다른 전임 주임들, 가령 랴오후이(廖晖)도 부친인 랴오청쯔(廖承志)의 적지 않은 관계를 계승했다. 또 왕광야(王光亚)의 경우, 2003년부터 외교부 부부장 신분으로서 중앙정부 홍콩마카오 공작협조 소조에 들어갔었다. 이와 같은 관료들은 비록 중앙의 이익을 대표하지만, 사업을 실행할 때에는 홍콩의 실제 상황을 고려해왔다. 

하지만 시진핑 취임 이후 이와 같은 관료들은 “우유부단하고 중앙 지시의 집행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효과를 못 보고 있다”고 인식됐다. 그래서 장샤오밍은 부주임에서 내려와야 했고, 왕쯔민 역시 면직 처리됐다. 그 지위에 들어온 이들은 각각 샤바오롱(夏宝龙)과 뤄후닝(骆惠宁)이었다. 이들은 모두 2선으로 물러나 있던 성급 간부들이다. 샤바오롱은 전국정협 부주석 겸 비서장에 배치됐었고, 뤄후닝은 전국인대 재정위원회 부주임에 배치됐었다. 하지만 둘은 갑자기 다시 최전선에 나서게 됐다. 게다가 매우 민감하고도 중요한 홍콩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홍콩 사업과 교집합이 아주 적다. 일반적으로 홍콩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기본법’의 전사(前史)에 대해선 더욱 모르는데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알고 있듯, 시진핑만이 이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다. 이는 샤바오롱과 뤄후닝 두 사람이 시진핑과 관계가 좋고 신임을 얻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두 가지 오묘한 지점이 있다. ① 먼저, 두 사람은 모두 시진핑에 의해 2선에서 다시 1선으로 돌아옴으로써 정치일생의 두번째 봄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시진핑이 그들을 알아준 것에 대해 은혜를 느끼며, 반드시 온 힘을 다 하여 ‘지한파’에 비해 더 큰 충심으로 뜻을 실현함으로써 시진핑의 지시를 집행하려 할 것이다. ② 다음으로, 두 사람은 모두 홍콩·마카오에 익숙하지 않다. ‘지항파’처럼 “이것저것 걱정이 많아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하(畏首畏尾)”거나, “절충해버리(中间落墨)”거나, “진퇴양난에 빠지(进退失据)”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과 시진핑은 더욱 수직적으로 홍콩 사무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하면 효율이 높아진다.

여기에 주목해야할 부분이 또 있다. 현재 중앙 홍콩마카오 공작협조소조 조장은 한정(韩正)이다. 하지만 한정의 역할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적어도 홍콩마카오 공작에 있어선 언론 노출빈도가 줄고 있다. 한정은 시진핑 못지 않은 주목받는 인물이다. 지난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수출엑스포’의 사례에서, 케리 람은 갑자기 시진핑 주석 접견을 통지받았었다. 이와 같은 임시적인 안배는 중국 관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접견 당시 공안부 부장 자오커즈(赵克志)가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자오커즈가 이 소조의 다섯번째 부조장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1정4부(一正四副)”의 규격을 갖기 때문이다. 

본래 당시 소견(召見)은 공작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 전에 관방은 이미 한정이 2~3일 후 케리람을 소견할 것이라고 공포했었다. 시진핑은 왜 캐리 람을 더 먼저 만나려고 했던 걸까? 한정으로하여금 먼저 캐리 람을 만나게 할 수 없었던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걸까? 바깥에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 이와 같은 소견은 일종의 정치 화학의 원소로, 시진핑이 홍콩마카오 사무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련 있는 포석은 이외에도 매우 많다. 예를 들어 홍콩 경찰과 내지 공안은 평소에 이미 중앙정부 연락판공실 산하의 경련부를 통해 소통한다. 하지만 ‘범죄인 인도조례 반대운동’ 과정에서는 경찰이 선전시 법원 사이에 인터넷 전용선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드러났다. 경찰은 이에 대해 “불법 월경 사건에 대한 증명을 위한 용도”라면서,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건을 마무리짓고 전용선은 바로 없앤다”고 해명했다. 이와 같은 해석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이 전용선이 언론 노출 이후에야 부인할 수 있는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른 연계들이 있진 않은지”, “전용선이 진짜 사건 마무리 이후에 취소되는지”에 대해 물었다. 

보안 공작 이외에도 홍콩 정부 부문은 내지의 관련 부문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과거에 홍콩과 내지 정부 부문의 소통은 대부분 연락판공실을 거쳐 이루어졌다. 하지만 캐리 람이 정무사장(총리격)으로 재임하던 때 홍콩정부가 내지의 유관 부문과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직접적인 교류 업무를 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하게 됐다. 효율로 말하면 확실히 개선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치 역시 ‘양제’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교류 업무가 매우 용이해지면 ‘블랙홀이 빨아들이는 힘(黑洞引力)’의 효응도 발생한다. 내지의 관련 부문 대부분은 중앙부문이며, 홍콩의 정책국은 단지 국급의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 교류는 왕왕 지시로 바뀐다. 예컨대 국가교육부가 홍콩교육에 대해 끼치는 영향은 이미 점점 커지고 있다.

 

왜 지금 움직이기로 했을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고, 많은 나라들이 이에 정신이 팔려 홍콩을 더 이상 상대할 여유가 없다. 그 때문에 이런 혼란을 틈타 민주파를 단속하고 관방과 건제파(홍콩 내 친중파)의 실력을 다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앞서 서술한 부분과 인사 배치는 장기적이고 소리 없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앙정부는 왜 현 타이밍에 활을 당겼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올해 9월에 홍콩 입법회 선거가 예정돼 있다. 이 선거에서 민주파는 지난해 구의회 선거의 대승 기세를 타고 35석(50%) 이상의 의석을 노리고 있다. 민주파의 기세를 막고, 건제파가 중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을 도우려는 것이다. 심지어 죄목까지 만들어 필요시 출마 자격을 취소시킬 수도 있다.

둘째. 베이징은 민주파가 차기 입법회 선거에서 과반의 우위를 점할 경우 더 심각한 후폭풍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홍콩정부 시정이 어려워지고 차기 행정장관 선거위원회 구성(1600명)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더 큰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싹을 잘라 압력들을 가속화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래의 장기적 안정을 위해 길을 만들려는 것이다. 따라서 전해지는 말들에 따르면, 오히려 현재 입법회가 여전히 건제파의 주도 하에 있는 틈을 타는 것보다 못하여, 7월 이전에 ‘기본법 23조’를 강행 통과시킴으로써 나머지 문제도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셋째.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나라들이 바빠 홍콩을 더 이상 상대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런 혼란을 틈타 민주파를 단속하고 관방과 건제파의 실력을 다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범죄인 인도조례 반대 운동’ 이후, 베이징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홍콩에 더 개입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한 차례 관찰 후, 오히려 겁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설령 미국은 베이징이 홍콩의 민주·자유를 억압할 경우 홍콩의 독립관세구 지위를 취소하겠다고 공언했더라도 말이다. 그 때문에  중국은 무역전쟁 협상에서 미국 경제에 이익을 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세 차례에 걸쳐 이익을 본 뒤, 홍콩의 민주적 자유를 거론하지 않았다. 베이징은 미국이 홍콩 인권민주법을 통과시켰지만 그럼에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미국은 홍콩에 1,300개 기업과 85,000명의 교민을 두고 있다. 이런 이해관계를 평가하자, 베이징은 홍콩에 대해 더욱 강경해졌다.

이처럼 베이징은 강세와 투쟁 심리에 기반하여 상향식의 권력강화 정책을 강화하고, 홍콩정부 관리들은 ‘일국’ 경향을 높이고, ‘양제’를 포기할 것이다. 홍콩 반환 이후 대륙은 홍콩 경제와 언론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를 높이고 있으며, 지금까지 스스로를 제약하고 있었던 것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현재 ‘일국양제(一国两制)’는 이미 반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글 : 조니 라우
번역 : 홍명교

 

조니 라우 劉銳紹 Johnny Y.S. Lau

1954년 홍콩 출생 저널리스트.  어린 시절 영국 식민통치에 불만을 느끼고 스스로 좌익이 되어 1967년 폭동에 동참했다. 당시 『모택동 어록』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고 한다. 1972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문회보 文汇报》의 전임 베이징주재 기자였다. 하지만 당시 톈안먼 항쟁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후, 1991년 신문사를 떠났다. 지난해인 2019년, 1989년 베이징 체류 당시를 회상한 『나를 깨운 ‘6·4’ (炸醒我的「六四」)』를 집필했다. 현재는 홍콩의 정치시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문회보》는 1938년 상하이에서 창간됐고, 홍콩판은 1948년 창간. 현재는 비교적 친중국적 색채를 띄는 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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