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①
2021년 7월 2일
이 글은 일본에서 발간되는 노동ㆍ빈곤 문제 전문 잡지인 『POSSE』 28호 (2015/10)에 실린 케빈 B. 앤더슨의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일본어판 출판 기념 좌담회 「마르크스 연구의 최전선에서 현대자본주의를 읽어낸다 – 케빈 B. 앤더슨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가 닦는 새로운 지평 : 고토 미치오 × 다이라코 도모나가 × 기노시타 다케오 × 사사키 류지」를 번역한 글이다.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는 한국에서도 경상대학교 정성진ㆍ정구현 두 연구자에 의해 2020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의 내용에 대해 일본 마르크스학계가 수용하고 있는 시각을 알 수 있다. 또한 근래 일본 마르크스연구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말년의 마르크스의 연구노트를 기반으로 한 연구의 함의점들과, 최근 사이토 코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新人世の「資本論」』)이 30만부 넘게 팔리는 등 일본에서 마르크스가 주목받고 있는 맥락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글의 분량을 고려하여 이 글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실음을 밝힌다.
- 고토 미치오(後藤道夫) 쓰루문과대학 명예교수
- 기노시타 다케오(木下武男) 전 쇼와여자대학 특임교수
- 다이라코 도모나가(平子友長) 히토쓰바시대학 특임교수
- 사사키 류지(佐々木隆治) 릿쿄대학 준교수
사사키 : 오늘 케빈 B. 앤더슨의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의 좌담회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 2월 번역본이 발간되었는데요, 번역자이기도 한 다이라코 도모나가 선생님께서 먼저 간 단하게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국 마르크스 연구의 도달점
다이라코 : 처음에 제가 이 책을 번역하기로 한 문제의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문에도 있는 것처럼 본서는 미국의 마르크스 연구의 축적과 현재의 도달점을 명확히 하려는 취지로 쓰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조류에 있어 소위 말해 경제주의적 혹은 생산력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서양중심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계급문제를 특히 중시한 노동자중심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러한 경향성을 체현한 전통적 혹은 소련형 마르크스주의와 대비해 본서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조류의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별화된 조류의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먼저 생산력주의 혹은 계급환원주의 등의 입장을 취하지 않고, 역사발전에 대해서 굉장히 복합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계급문제뿐만이 아닌 특히 미국의 맥락 속에서 인종과 젠더의 문제가 노동자계급의 운동에 부과하는 큰 역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앤더슨은 계급, 인종, 젠더를 고려한 보다 복합적인 마르크스주의를 구성하는 조류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크스주의를 미국에 정착시키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큰 역할을 한 이가 라야 두나예프스카야(Raya Dunayevskaya)라는 러시아 출신의 망명 미국인입니다. 그녀는 한 때 트로츠키의 비서로 일한 경력도 있습니다만 이후 트로츠키와는 선을 긋고 독자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앤더슨과 피터 휴디스(Peter Hudis)와 같은 연구자가 중심 연구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배경설명이 됩니다만, 두나예프스카야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 연구에 있어서 헤겔 연구의 중요성입니다. 그녀는 엥겔스가 강조한 바와 같이, 체계와 방법을 구별한 뒤 체계적 측면의 헤겔을 거부하지 않고, 헤겔의 저작 그 자체가 마르크스의 계급, 인종, 젠더 분석에 있어서 매우 풍부한 철학적 원천이라고 사고합니다. 앤더슨도 이 책에서는 역사연구자의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저작에서는 레닌의 『철학노트』나 헤겔의 변증법,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의 관계 등을 논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두나예프스카야는 계급과 인종 그리고 젠더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방법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경지식으로, 미국에서는 이를테면 『뉴욕 데일리 트리뷴』 등의 잡지에 발표된 마르크스의 여러 논문을 편집·정리하고 그것을 마르크스 연구에 살려내는 방법이 1920년대 이래로 확립되어 왔습니다. 앤더슨의 연구도 그 축적 위에 성립되어 있지만, 매우 새로운 논점으로서 MEGA 제4부에 수록된 마르크스의 생애 최후반기인 1879년부터 1882년에 걸쳐 쓰여진 미공간(未公刊)의 발췌노트를 연구하여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가 마르크스 연구에 고유하게 공헌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의 개요와 그 획기성
다이라코 : 말이 좀 길어졌으니 책의 내용 요약은 최대한 간단히 하겠습니다. 큰 흐름으로 말씀드리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부터 1853년의 인도평론까지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갖고 있는 모종의 진보적 역할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는 영국에 의한 인도 식민지 지배가 아무리 인도의 전통적 사회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도 인도에 지금까지 결여되어 있었던 진보나 역사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요강』의 표현으로는 소위 ‘자본의 문명화 작용’을 인정하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1856년의 애로우 호 사건, 1857년의 세포이 항쟁 등 인도인이나 중국인의 저항을 분석해 나가면서, 말하자면 영국 자본주의가 중심이 되어 세계사를 바꿔나간다는 기존의 관점을 수정합니다. 그 결과 1860년대에는 폴란드혁명에 대한 지지, 남북전쟁에 대해서는 노예해방문제에 대한 지지를 통해서 제1인터내셔널이 형성되어 갑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이론적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이라고 하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일견 그것과 무관하게 보이는 폴란드의 독립문제나 흑인노예의 해방문제와 관련되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이고, 이것이 바로 앤더슨이 강조하고 있는 지점입니다. 이것이 인종과 계급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변증법이 되어 앤더슨은 『자본』도 그러한 변증법으로 엮여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앤더슨은 60년대 후반에 아일랜드 독립문제에 대한 태도를 계기로 『공산주의 선언』 이래의 [마르크스의] 입장이 명확히 역전되어가는 점도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산주의 선언』을 쓸 당시에 마르크스는 아일랜드나 폴란드는 영국에 의해, 다시 말해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해방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이 되면 지배적 민족의 노동자 계급이 피지배 민족에 대한 지배를 묵인하는 한, 자국의 자본가 계급에 의한 지배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즉 아일랜드의 독립이 오히려 영국 노동자 계급의 해방의 전제가 된다는 형태로, 그 우열관계가 명확하게 역전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70년대 전반에 프랑스어판 『자본』을 출판할 때에는 『자본』 제1권에서 그려진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서유럽’에 한정된다는 꽤 역동적인 입장의 전환이 마르크스에게 생겨납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부가 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주변부적 분야의 연구에 상당히 몰두합니다. 고대사회 그리고 중세사회의 연구, 소위 자본주의의 외부의 역사와 사회관계의 연구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이 연구들은 논문의 형태를 취하지 못한 채 마르크스는 생을 끝내고 맙니다. 하지만 앤더슨 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마르크스에 있어서 자본주의 체계론이라는 것은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협의의 자본주의 체계론은 『자본』을 원리론 삼아 자본이 지배적인 시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자본주의 체계론입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계가 비자본주의적인 역사적 관계와 충돌하는 순간 자본의 논리만으로도, 전통적 사회의 측면에서의 저항 논리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양자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과 법칙성 등을 분석하는 새로운 광의의 자본주의 시스템론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앤더슨의 생각입니다. 앤더슨은 단선적 역사관에서 복합적 역사관에의 전환이라고 나름 추상적으로 말하지만, 저 나름대로 살을 붙여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이상입니다.
왜 일본의 마르크스 연구에서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가 태어나지 못했는가
사사키 : 다음으로, 고토 선생님으로부터 이 책을 읽고 난 감상이나 특히 주목한 점에 대해 듣고자 합니다.
고토 : 매우 지적인 흥분을 돋구는 책입니다. 양이 상당히 많지만 열중해서 읽었습니다. 처음에 다이라코씨가 말씀하진 계급환원론과 역사의 단선적 발전론의 문제는 일본에서도 꽤 논의되어 온 느낍이 있습니다만, 논의되어온 장소나 측면이 꽤 다르고, 또한 일본인이 영어로 글을 잘 쓰지 않는다는 것도 있어서 일본에서 논의되어 온 것과 미국에서 축적되어온 것과의 교류가 상당히 없었다고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일본의 경우, 계급환원론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시민과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민족성이나 인종이 주요한 문제로서 제출된 적이 없고, 최근에 와서 젠더 문제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사실은 젠더와 계급과의 관계에 내재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냐고 하면, 단순한 마르크스주의비판은 존재하지만 극히 불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국에서 축적되어온 것과는 각도가 다르지만 프랑스 내전 3부작이나 『독일 이데올로기』, 『경철수고』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연구가 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계급에 환원하는 논의는 일본 내에서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운동과의 관계에서는 사정이 달라서, 운동상의 문제와 이론적 축적의 문제는 일본의 경우는 분리 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단선론의 문제는 역시 시민과 계급이라는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히라타 기요아키(平田淸明)씨가 불어판 『자본』을 굉장히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어판 『자본』이나 『요강』의 「제형태」가 충분히 읽혀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단선적 발전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도 이론적으로는 연구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계급환원론과 단선론 문제에서 실천적ㆍ이론적으로도 꽤 영향을 준 것은 결국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레닌 자신이 역사의 순서가 역전한 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들의 혁명은 서양의 단선적 발전과는 다른 혁명이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혁명과 유럽에서의 혁명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지만, 큰 사회변혁의 축은 아마 서양에 있을 것이라는 취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러시아혁명의 의미는 사회주의의 횃불을 들고, 그 불꽃을 사회주의혁명의 본래 흐름에 계속 제공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앤더슨의 문장을 읽으면서 레닌의 논의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받은 지점이 몇군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이론의 짜임새 그 자체에 대해서는 처음 본 느낌은 아니었지만, 마르크스 자신이 남북전쟁이나 아일랜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고대 게르만 공동체 등에 대해, 어느 정도 내용있는 발언을 해왔는가에 대해 이 정도로 정리한 설득력있는 글을 읽은 것은 처음이라 정말 놀랐습니다. 역시 앤더슨이 말하는 바대로 남북전쟁, 아일랜드 등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논의를 따라 잘 정리하는 작업이 일본에서는 그다지 되어오지 않았고 저 자신의 공부도 그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사회과학자로서의 마르크스 – 「주변부」에의 관점
사사키 : 그러면 기노시타 선생은 어떻습니까
기노시타 : 이 중에서 저만 마르크스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에 좀 입장이 다릅니다만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아직 제가 젋었을 시절엔 마르크스주의가 흔히 말하는 세 분야, 즉 철학ㆍ경제학ㆍ정치학(혁명론)으로 나눠져서 그에 맞춰 각 문헌이 배치되고 학습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세 분야에 수렴되지 않는 마르크스를 재발견할 수 있어서 정말 신선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학자라고 할까, 사회구조분석을 하는 마르크스를 만난 것이죠. 마르크스가 공동체론, 젠더론, 흑인문제 등에 대한 사회구조분석을 수행함으로써 여러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정말 놀라운 지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사회과학자로서 굉장히 아카데미즘을 중시하고 그야말로 꿋꿋이 실증연구부터 역사적 사실까지를 왕성하게 섭취해 메모하고 있었습니다. 또 이런 사회구조분석을 현실과 연결시켜서 변혁의 지렛대를 제기하는, 즉 사회과학자로서 사회구조분석과 지렛대나 저항의 거점을 제기하는 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의 상이 아주 잘 이 책에 서술되어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전인수이지만, 하층이나 주변부에서 변혁의 계기를 보고자 한 점이 60년대 후반 이후의 마르크스의 자세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잉글랜드의 노동자에 대해서도 조직되어는 있지만 무력하다고 평가하며 아일랜드 문제를 제기한다든가, 또는 미국의 백인노동자와 흑인노예와의 관계라든가, 확실히 하층ㆍ주변부에게서, (중추라는 표현은 쓰고 있지 않습니디만), 하층과 주변부에서 변혁의 계기를 찾아내고자 하는 점에서 매우 감명받았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 일본의 노동운동을 변혁하려는 관점에서도 역시 하층이나 주변부에게서 변혁의 계기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제가 자주 말하는 것입니다. 민간대기업의 기업별노조와 별개로 그 외부에 새로운 노동조합을 구축한다는 외부구축론을 저는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하층이나 주변부로부터 변혁의 계기를 찾아낸다는 관점에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사사키 : 기노시타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신 것처럼 지금까지 철학ㆍ경제학ㆍ철학(혁명론)이라는 3분법으로 마르크스가 읽혀 왔습니다만 그와 다른 사회학, 관점에 따라서는 역사학이기도 한 굉장히 확장된 논의를 진행한 점이 이 책에서 더욱 명확히 밝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연구와 현대자본주의의 이해에 대한 영향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 책의 의의에 대해서 다이라코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다이라코 : 철학·경제학·정치학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레닌이 말한 마르크스주의의 세 구성부분(독일 철학, 프랑스 사회주의, 영국 정치경제학)을 염두에 두고 이를 최대한 교과서에 들어가기 쉬운 형태로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를 테면 마르크스는 철학의 기본적인 명제로서, 진리는 철학의 장에서는 진리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발언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철학의 추상적 개념분석의 틀을 넘어서서 그 밖에서 작업을 할 때에야 비로소 본래의 철학에 걸맞는 알찬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학문은 전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경제학이라면 경제학 본래의 영역 외부까지 일단 내려가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의의가 발휘되며, 정치학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의 3분야는 본래 논점으로서는 겹쳐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겹쳐지면서도 역점을 두는 방식이 매우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철학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주체성이나 실천이 어떤 의미를 갖냐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실존주의처럼 자신이 결의하면 미래가 열린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결의해서 실천하는 그 장소라는 것은 사회관계의 틀, 예를 들면 자본의 틀, 국민국가의 틀 같은 것이 몇겹이고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얽힌 구조를 부수는 것은 앞서 기노시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왜 마르크스는 하층이나 기층에서 변혁의 힘을 찾아내는가 라는 질문과 연관됩니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하자면 생명의 한계에 부딪힐 때,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에너지가 멈출래야 멈출 수 없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런 극한상태에 있지 않은 인간의 경우에는 일상적으로 모종의 계급적인 사회관계와의 타협이 이루어져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소위 재생산가능한 생활이 성립하고 있는 것이죠. 그 지점이 계급사회가 성립하는 기반입니다만, 가장 기층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즉 재생산이 불가능한 죽음에 달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 전형적 사례로서 제게 지금 떠오르는 것은 오랜 기간의 내전이나 극한상태의 빈곤을 벗어나 헝가리를 경유해 독일을 향하고 있는 수만의 난민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상성, 혹은 기존의 사회관계 속에서 이미 살아갈 수 없게 되어 목숨을 건 행동에까지 내몰린 것입니다. 즉, 마르크스는 그런 에너지가 하층이나 주변부 사람들에게는 있다는 점에 착목합니다. 마르크스는 그런 사실 자체가 곧 철학의 중심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추상적 언설로서의 철학의 외부로 일단 나가보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경우 철학은 가장 구체적인 ‘모순’에 착안함을 의미합니다. 그 모순을 한 몸에 받아내는 사람들은 역시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인식이 마르크스의 사상이자 이론의 근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앤더슨도 제가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모순의 집약점으로서 그 장에 세워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일종의 철학적 개념을 포함한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예를 들어 인도나 중국에서 영국 자본주의와 싸우는 민중을 서술하고, 1970년대에는 알제리나 남미에서 민중과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지배에 저항한다는 이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내용은 그의 다른 저작이나 앤더슨의 친구이자 철학자인 피터 휴디스의 저작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국 두나예프스카야학파는 헤겔을 매개로 주체형성의 논리를 전개하려는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휴디스는 앤더슨과 같은 풍부한 역사분석을 약간 추상화해서 얼마간 논리학적인 전개로 끝맺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소위 추상적인 철학주의로도 보입니다만, 둘 다 오늘날 두나예프스카야의 계승자를 자임하고 있으므로 양자의 논의를 오가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본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下]에 이어서]
번역 : 임현창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