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정치, 하나의 소명인가 두 가지 소명인가?
2021년 6월 4일
이 글은 2021년 3월 9일 프랑스 매체 리베라시옹에 “Le conflit fait partie des lieux de savoir.”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본고는 프랑스 교육부 장관 프레드리크 비달(Frédérique Vidal)의 2021년 2월 16일 국회 발표로 유발된 논쟁과 관련되는데, 당시 장관은 프랑스 대학들에 ‘이슬람 좌파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연구 프로그램이 존재하는지에 관해 공식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표명하였다. 이 성명을 CNRS(프랑스 및 유럽에서 최대 연구기관인 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 및 여러 단체가 즉시 거부하였고, 미국 기관과 연계된 200명의 연구자 집단은 2021년 3월 4일 르몽드에 게재한 사설을 통해, 장관의 표현이 소름끼치게도 “유대-볼셰비즘”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하였지만, 프랑스 정부나 대통령 모두 이 문구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부가 그 표현을 승인했다고 의심해볼 법하다. ( 편집자 : 이 국역본은 이 국역본은 b2o에 실린 토마소 만프레디니Tommaso Manfredini의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지만, 불어 원문 역시 부분적으로 참고하였다.
혹자는 교육부 장관이 상부로부터의 장려를 받고 프랑스 학계의 숙청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밑바닥에서 불길한 울림을 주는 멸칭을 파냈다는 사실을 걱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혹자는 재정 긴축과 표적형 및 감시형 펀드의 광범위한 사용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는 독립 연구가 해체되는 속도에 대해 우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혹자는 “프랑스 연구의 우수성”을 자처하는 대변인들이 우리 학생들이 혁신과 비판적 사고의 주요한 국제적 조류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공화주의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 이를 막고, 따라서 우리를 우월주의적 편협함으로 고립 시키는 것을 보며 낙담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혹자는 인종, 젠더, 계급, 탈식민주의 그리고 이들의 그 모든 교차점에 대한 연구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도 학계 주위에 지나치게 단순하고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과 종파적 검열이 존재함을 깨닫고 이를 규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불평등 및 사회적.국민적 배제 형태를 비판하는 획기적인 연구를 해놓고 난 뒤 독살스럽게 돌아서서 지적 보수주의와 조합주의 진영에 합류한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을 보며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념들은 사안의 중심에 있는 인식론적 질문을 다루지 못합니다. 앞서 말한 인간과학 및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당파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유일한 지식 형태인) 지식을 위한 지식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막스 베버가 1919년 강연에서 제시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과학의 ‘소명’은 무엇인가? 이는 정치의 ‘소명’과 어떻게 다른가? *1 그가 당시에 제시한 해답, [즉] 윤리를 신념과 책임 두 차원으로 분리하는 가치중립성은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이유는 네 가지이고 이들은 일종의 대립물의 통일을 형성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긴급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진로를 그려봐야 합니다.
첫째, 대학과 연구센터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과거보다 더더욱 이 기관들은 나머지 사회, 혹은 가능하다면 정치체에게까지 문과 귀를 열어야 합니다. 검증되고 검증가능한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하고 합리적인 논증을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교실에서 일어납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의 대상이 교실 밖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필연적으로 갈등적이라는 점인데,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도 그러한 사회에 조만간 살 수 있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갈등을 포착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멀리서 연구하고 탐구할 수 없습니다. 이 갈등은 우리의 배움과 지식의 공간에 당사자들로 들어와야 합니다. 연구자들이 (예를 들어 “정글”이나 “동네”에서) [갈등 당사자들을] 찾기 위해 과감히 나서지 않는 한 말이죠. *2 푸코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은데, 우리는 교사들, 학생들, 그리고 연구자들을 [거리로] 데리고 나와 조끼의 유무와 상관없이 시위자들, 활동가들 또는 활동적[운동적] 시민들을 [학문의 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야 합니다. 시위자, 활동가, 그리고 활동적 시민들로 하여금 여지껏 권위있는 학문적 담론을 위해서만 남겨져 있던 공간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든,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실험해봐야 합니다.
갈등과 함께 이데올로기가 들어옵니다. 이는 명백합니다.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바깥에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고 이미 내부에 다소 지배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경제학적 지식이 시장행위자의 합리적 선택에 기반을 둔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학적 지식이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유기적 연대의 지 속적인 상호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심리학과 교육학이 공통적으로 주체의 적응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근대성의 궤도가 종교의 세속화로 경향짓는다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주어진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며 이는 권력 관계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분명히 윤곽을 그린 것과 다른 대안적 입장들도 시대에 따라 다소 보이거나 보이지 않겠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배움과 관련된 기관이 살아있다고 하고자 한다면 모르는 것을 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가평가위원회에서마저 모든 “부정할 수 없는” 패러다임들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질문하기를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위기 한 가운데서 여전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CNU(국가대학위원회)에서 ‘경제와 사회’ 항목이 삭제된 참담한 에피소드를 잊지 않도록 합시다. *3
그러나 캉길렘이 “과학적 이데올로기”라고 불렀고 알튀세르가 “과학자들의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던 것의 갈등이 문제의 핵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혹자는 분쟁이 대상 안에만 머물 것이라고, 지식의 실천자들의 사익과 책무가 침투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지, 지식의 핵심인 개념에는 분쟁이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장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식이 개념에 도달하는 것은 갈등성에서 스스로를 보호함으로써가 아니라, 갈등성을 첨예화함으로써, 거대한 존재론적 양자택일을 둘러싼 갈등성을 격화시킴으로써, 사물이나 존재의 본성에 관한 양립불가능한 구상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제할 때입니다. 진리의 역사는, 잠 정적이라 할지라도, 종합에 있지 않고 이론의 이단점[points of heresy]을 향한 논쟁적인 상승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많은 분야에서 분명한데, 인문학에서 경제학 및 환경과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 너머까지, 예컨대 생명과학에서 진화에 관한 이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더 깊이, 우리는 지식이 주체(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됩니다. 이는 과학적 탐구의 약점이 아니라 가능조건 그 자체입니다. 적어도 인간학적 차원을 포함하는 과학에서는 그렇고 어쩌면 다른 과학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이미 위치지어진 장에 주체적으로 ‘[경솔하게] 전진해야’ 합니다. (역사적 및 사회적 구성 과정을 통해)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드는 모든 “품성”(칸트가 말했듯이)이라는 짐을 떠안고 말이죠. 과학적 지식의 “선험적 주체”는 없습니다. 더 낫게 말하자면, 우리는 주체가 자리잡는 정체성에 “곤란함”을 야기하는 지점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소 어려울지라도, 그 “차이”와 함께/내부로, 그것이 남성성, 여성성, 또는 다른 “젠더”일지라도; 백인다움[whiteness], 흑인성[blackness], 또는 다른 “색”일지라도; 지적 능력 또는 무능력, “종교적” 믿음 또는 불신을 다룰 지라도. 이렇게 함으로써 그 지점을 가지고 우리를 붙잡아두고 배제하고 이끄는 사회적 힘을 읽어낼 수 있는 분석적 렌즈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넘나드는 권력 관계로 인해 그 누구도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 않지만, 그 어떤 자리도 한 번 할당되면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닙 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인간학적 차이를 그 모든 불확정성을 아울러 우리의 집합적 정치체를 해부하는 도구로 바꾸어, 정치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기제에 대한 분석을 기제들의 규범화 효과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 탐구의 왕도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저는 여기서 주체 자신의 자리를 포함하는 지식, 즉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이 말한 “강한 객관성”을 떠올리며 실증주의가 이러한 지점을 얼마나 놓치는지 떠올립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험난합니다. 돌이켜 보면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에 저는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때로 갈등이 폭력적으로 치닫기도 했지만, 냉전기의 금지와 제도적 제약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과학의 가치”는 거의 논쟁거리가 아니었죠. 68년 5월과 아카데미즘[academicism]의 근간을 흔들고 장벽을 허물고자 했던 욕망은 그 여파로 널리 퍼진 실망감을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중 절반이 단기계약 하루살이로 살고 있는 오늘날 젊은 학자들을 훈련시킨 프로그램들을 대거 길러낸 열정과 열기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제서야 깨닫지만 오늘날 지배계급은 더 이상 역사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지가 아닙니다. 지적 헤게모니에 대한 기획도 없고 예술에서 명예를 걸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비용-편익 분석, “인지적”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만을 필요로 합니다(또는 이것만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코로나 전염병과 인터넷 혁명의 도움으로 이 지배계급은 사회과학, 인문학, 그리고 심지어 이론적 과학의 죽음을 준비하 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희생자를 범인(“이슬람 좌파주의”, “운동권”, “이데올로기”)으로 삼는 것은 어떻겠어요? 일이 쉬워질테니 말이죠.
우리는 시민이자 지식인으로서 온 힘을 다해 이렇게 지식 및 문화의 도구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학계가 필요로 하는 혁명을 인지해야 하고, 숨기거나 전제하지 않은 채 우리들 사이에서 토론을 벌여야 합니다.
각주
- *1 막스 베버(Max Weber),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 (1917)과 『직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 (1919) 참조
- *2 “정글”과 “쿼티어”에 대응하는 불어 원단어는 겉보기에 단순한 민족지적인 의미와 더불어 사회적 및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정글”은 칼레 시와 같은 여러 도시 주변에 주기적으로 세워진 다음 경찰에 의해 철거되는 캠프를 말하며 서류 없이 해협을 건넌 이들이 피난처나 인도주의적 도움을 찾다가 정착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쿼티어”는 파리시나 다른 대도시의 방리유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를 일컬으며 청년의 대다수가 아프리카 및 북아프리카 출신이며 대개 실업자이다. [영문번역자 주]
- *3 2015년 프랑스 국가대학위원회(CNU)는 ‘경제와 사회’라는 이름의 특별 부문을 만들어 ‘주류’ 신고전학파가 아닌 경제학자들이 대학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기획은 기득권, 특히 2014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장 티롤이 로비를 하여 정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다.
글 : 에티엔 발리바르 Étienne Balibar | 파리 10-낭테르 대학 도덕ㆍ정치철학 명예교수, 캘리포니아 대학 어바인 캠퍼스 인문학 석좌교수, 컬럼비아대학 프랑스어문학과 초빙교수이다. 그의 주요 저서는 『우리 유럽의 시민들?(2003)』, 『마르크스의 철학(2017 개정)』, 『역사유물론 연구(1974)』 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번역 : 보리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