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90년대생’이란 이유로? 『K를 생각한다』 서평

『K를 생각한다』는 최근 ‘90년대생’들에 관한 담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책들 중 하나다. 서문에서 저자 임명묵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부상한 점을 강조하며, 세계화와 정보화를 중심으로 한국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다섯 가지 주제로 비평한다. 90년대생, 방역, 민족주의, 386세대, 교육이 그것이다. 이런 전제에 기반해 크게 세대론에 기반한 능력주의 담론으로 이어지는 1·4·5장과 국가 행정시스템 및 민족국가를 말하는 2·3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90년대생이 왜 ‘공정’에 집착하는 정서를 가지게 됐으며 거기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설명하고(1장), 원인으로 ‘586이 주도한 계층화와 세계화로 인한 이중경제체제’를 지목한다(4장). 나아가 불평등 문제의 해법으로 능력에 따른 계층 상승이 용이하도록 교육과 노동의 유연화를 제시한다(5장).

586 원죄론

저자는 ‘586세대’라는 개념이 하나로 묶이기엔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 주관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586세대를 “60년대생이며 80년대에 대학에 진학해 학생운동에 참여했거나 그와 관련된 정서에 강하게 동조하는 이들”이라고 정의한다(4장). 그러면서 교육 인프라의 혜택을 받은 586세대가 젊은 시절 ‘혁명’을 말했음에도 현재 사회의 기득권이 되었고, 계층화(불평등)의 주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인하여 586세대가 주도한 계층화의 피해를 60년대생의 자녀들인 90년대생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90년대생들의 전반적 정서인 ‘투쟁심’이 세계화와 이중경제체제로 인한 계층상승의 욕망과 피로가 결합된 산물이라고 본다. 정보화로 인터넷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투쟁심을 현실 대신 넷상에 투사하는데, 그럼으로써 인터넷에서의 갈등과 여론이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투쟁심이 반영된 넷상의 치열한 경쟁과 콘텐츠 플랫폼의 상호작용으로 현재 한국의 ‘세련된 대중문화’가 생성됐다며 계층 상승 경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90년대생에게 유일한 지위 상승의 사다리는 국가의 능력주의에 기반한 평가 시스템이기 때문에, 최근의 ‘공정성 담론’이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계층 상승 규칙을 건드린 것에 대한 분노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90년대생이 바라는 것은 “노력하면 미래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교육과 고용 시스템을 유연하게 바꿔야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형성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대안이 ‘고용 유연화’와 같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주장에서 기이한 논리적 비약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모호한 잣대

저자는 계층 세습의 주요 요인인 교육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며, 교육이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의 고도성장과 높은 교육 수준, 선진국 진입 비결 중 하나는 계층상승 욕망이 반영된 경쟁적 교육이기 때문에, 경쟁을 기반으로 한 사회는 문제가 없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는 진짜 문제는 교육이 세대 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고 학벌이 역전 불가능한 카스트처럼 작용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대안은 진정한 능력주의, 즉 개인의 능력이 지속적으로 측정되고 그에 맞춰 보상이 유연히 분배될 수 있도록 ‘유연한‘ 사회를 만드는 것에 있다.

문제는 세대 불평등을 강조하며 계층 세습을 비판하지만, 계층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역사적으로 계층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적은 없었다며 당연시한다는 점이다. 586세대가 계층화를 주도했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계층(분)화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계층 분화에 이견이 없다면, 586세대가 계층화를 주도했다고 비판할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닌가?

계층화에 대한 모호한 판단은 스스로 반박의 근거를 제공한다. 계층화가 양극화와 세습에서 비롯되며 이를 586세대가 주도했다고 해도, 저자는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인 ‘세계화로 인한 이중경제체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의 대안은 그저 상층 노동으로 향하는 통로를 교육과 고용 시스템 개선을 통해 좀 더 넓히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대 경제 시스템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 위주로 교육을 재편한다고 해서, 상층 노동으로 진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국가 차원에서 고학력 직종을 늘려도 지금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 진입 가능한 인원은 한정되어 있다. 계층 세습을 막고 계층 상승이 용이하도록 유연한 고용을 제시하지만, 이는 불평등 자체를 해결하는 구조적 대안은 아니다. 노동자를 언제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위험한 방향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런 식의 대안은 과거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도 일관되게 제시해온 빈껍데기 대안에 불과하다.

저자는 586세대를 “60년대생이며 80년대에 대학에 진학해 학생운동에 참여했거나 그와 관련된 정서에 강하게 동조하는 이들”, 즉 교육 받을 기회가 있었던 당시의 중산층이라고 정의하고, 당시 대학에 갈 기회가 없었던 이들과 구별짓는다. 1960~80년대의 계급대립 구도를 그들의 자녀인 90년대생의 대결 구도로 바꿈으로써, 계급 대립의 구도를 세대간 대립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이다.

계급 대신 세대?

집단 내부의 다양성과 여러 사회적 요인을 지워버리는 이런 경향은 90년대생을 묘사할 때도 드러난다. 저자는 청년세대의 ‘공정’에 대해 분석할 때, 청년세대 내에서 누가 공정을 주장하고, 한국 언론이 어떤 청년들에게 발언권을 주는지에 대한 정치적 지형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주의적 시각은 세대라는 범주를 계급, 젠더, 인종 등 다른 사회학적 범주에 비해 우선적인 것으로 상정하면서 세대를 실제에 비해 강조하고 다른 요인들은 은폐한다. 내재된 계급 격차에 대한 논의 없이 불평등을 세대의 틀 안으로 넣는 방법은 근본적 처방 대신 엘리트 중산층 확대라는 또 다른 위계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경쟁을 강화하고 위계를 나누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고속 성장을 유발한다는 저자의 시각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가령 한국의 고도성장과 높은 교육 수준, 세련된 문화 컨텐츠 등이 계층상승 경쟁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하면서, 경쟁 시스템을 높이 평가한다.

과연 계층상승 경쟁이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뤘는지에 대한 토론은 차치하더라도, 자본의 끝없는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작금의 기후위기와 사회불평등 심화를 유발했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는 고려하지 않는다. 또, 경제성장에 누적된 노동 착취와 지역 불균형,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부작용 등이 현재까지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세련된 문화 컨텐츠” 생산 배경 뒤의 국내 문화산업 자본 독점 구조 및 불공정한 유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성장이 단순히 계층 상승 경쟁으로 가능했다는 얄팍한 결론은 여러 사회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성급한 일반화이자, 신자유주의 논리의 또 다른 현현일 뿐이다.

진정한 능력주의?

현실에서 무한경쟁으로 완성되는 ‘진정한 능력주의의 실현’은 모든 노동자들을 수시로 해고당할 위험에 노출시킨다. 계속해서 사용자가 요구하는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경쟁으로 인해 파편화되고 구조적 불평등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것을 강요받는다. 젠더, 연령, 학력, 업종, 직위 등 ‘역량’이라는 미명하에 다양한 경계로 직종을 구별짓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효과적인 노동자 통제(혹은 착취) 방식이다. 능력주의의 이러한 여파는 기업 내 위계에 의한 폭력에 노동자들이 대항하기 어렵도록 만들고, 이들의 정치적 저항 가능성을 축소한다.

참고 : 어떻게 해야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박상은

저자는 현재의 교육이 계층세습을 고착화하는 수단이라 비판하면서도, 교육이 계층상승의 도구로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자원의 격차가 극심한 현재의 지형에서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평등만으로 양극화 없이 계층 간 적절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능력주의』의 저자 마이클 영은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양극화를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방식의 ‘능력 세습’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K-를 생각한다』는 이런 비판들에 대해 아무 검토가 없다.

즉, 이 책에서 저자는 세대를 기준으로 한국 사회를 해석하고,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지대 추구와 계층 세습을 타파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일지 모르나, 능력의 위계를 제시함으로써 여전히 출생과 부, 재능에 따라 차별적으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가 문제되는 이유는 능력이란 사회·환경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평가의 기준도 사회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한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임에도 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 경제’가 필요로 하는 지식이란 자본과 사용자가 요구하는 능력이며, 고숙련 노동과 저숙련 노동의 위계는 자본 축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저자는 능력의 중요성과 능력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누구에 의해 결정되는지와 같은 모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이는 세대 집단 내부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를 분석하는 세대주의적 시각과 연결되는데, 모든 사회 현상은 ‘세대’라는 하나의 범주로만 나타날 수 없으며 여러 사회적 맥락이 교차하는 장이다.

K-방역에 대한 겉핥기 분석

저자는 K-방역 분석과 코로나로 떠오른 국가 행정에 관해 논의하면서(2장), K-방역의 성공 요인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한다. ① 저부가가치 말단 제조업의 방역 물자 생산 역량, ② 권위적 행정동원 체제, ③ 동선 공개로 인한 사회적 낙인 효과가 그것이다. 그는 방역의 성공은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적인 국가 행정 시스템으로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K-방역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닌 위기를 보여준다고 진단한다. 세계화로 인한 국가권력의 약화와 초국적 주체들의 부상은 오히려 위기를 가져왔으나, 바이러스로 국가의 힘이 다시 돌아오고 국민들은 강압적 통치를 묵인하는 대신 안정을 택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예상이다. 그러면서 권위주의 국가의 재부상에 대해 경고한다.

저자가 K-방역에 대해 겉핥기식으로 분석하며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면, K-방역은 ① 취약계층일수록 방역의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점, ② 공공 의료병원의 병상 부족, 그리고 ③ 현실에 비해 인원이 매우 적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동과 사명감에만 의지하는 위태로운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보건의료노조 총파업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차원에서 펼치고 있는 간호사 인력 확충 캠페인 등은 방역의 최전선에 선 간호사들이 한계에 몰려있음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권위적 행정동원체제를 방역의 성공 요소로 꼽으면서도, 정권에 반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쓰였던 과거와 지역사회 지배구조 고착화 등의 부정적인 면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동선 공개로 인한 사회적 낙인에 따른 확진자 혐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부재하다. 묘사가 있을 뿐, 비판적 시각이 비어있다는 것은 이 책의 단점이다.

저자는 강압적 행정 질서가 방역 성공의 핵심이었다며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신 권위주의 국가가 제공하는 안정을 택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권위주의 대 자유민주주의 도식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에 대한 대안을 이분법적으로 제시하는, 하나의 오래된 틀에 불과하다. 코로나 팬데믹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위기를 너무 협소하게 살핀다는 점에서 아쉽다. 권위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의 이분법적 도식은 자본주의가 유발한 기후위기와 사회의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위기 징후들을 국가 부재·약화의 위기로 축소할 뿐이다.

한국식 다문화가 대안이다?

민족국가와 한국의 다문화 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저자는 민족이 비록 배제성을 가지고 있어도 계층을 넘을 수 있는 협력 공동체이며, 민족국가는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5장). 예를 들어, 민족국가의 대안으로 제시되던 유럽연합과 같은 시스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평하고, 오늘날 민족주의가 협력의 기능은 상실하고 증오 표출과 대리만족 기제로만 활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다름 아닌 한국의 하층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한 ‘다문화’다. 예멘 난민 논쟁에서 발생한 혐오 정서와 다르게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이주노동자들과 접점이 많은 두 한국인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국은 생각만큼 차별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말하는 한국식 다문화의 핵심은 한국의 선별과정, 즉 ‘한국화’와 생산성 중심주의만 받아들인다면 누구든 한국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외국인들도 한국인과 ‘같은’ 역경을 거치기 때문에 차별은 없다고 말하며, 한국식 다문화는 향후 경쟁력 있는 사회 기제가 될 수 있다고 섣부르게 주장한다. 또, 상층의 세계화와 하층의 세계화는 다르다면서, 서구적 의미의 ‘정치적 올바름’ 논의 하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한국식 ‘다문화’에 대한 호평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오늘날 동아시아 권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노동의 이주가 ‘바닥을 향한 경주’를 촉진하면서 만들어진 체계라는 점, 그리고 국내 이주노동자들이 오랫동안 외쳐온 사업장 이동의 자유나, 무수한 노동 착취 사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민족주의를 설명할 때 인간 본성을 강조하거나, 학계에서의 다양한 민족주의 비판 담론들을 단순히 ‘서구의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묶는 등의 논의 전개(3장)는 지나치게 헐겁고 두루뭉술하다. 저자는 민족주의가 외집단에게는 비록 배타성을 지니지만 내집단에게는 계층을 막론하는 단결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최적의 협력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종적 정체성의 디아스포라를 포용하기 힘들고, 본질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민족주의는 국경을 경계로 나누어 계급적 단결을 저해하고, 자본의 착취를 정당화한다. 더구나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부장적 관행과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끊임없이 여성을 타자화해왔다.

저자는 국가 단위를 뛰어넘는 초국적 주체들의 부상이 세계의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들은 민족국가만큼 강력하고 효율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위기에 대한 정치·경제·사회적 분석 대신 위기를 정치시스템 안으로만 한정시킨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민족국가의 통치 논리는 그 국가의 지배계급과 자본가들에게는 효율적인지 모르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다.

다문화에 대한 논의에 있어 저자는 이주노동자 당사자의 경험도 아닌, 자신과 이주노동자를 주변에서 ‘지켜본’ 한국인의 주관적 경험을 나열해 “차별은 없다”고 손쉽게 단정해버린다. 타자를 해석하는 일의 근본적 한계는 번역가와 타자 간 권력 관계에 있으며, 번역은 결코 순수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저자와 인터뷰이들은 그러한 권력 관계와 자신들의 한국인으로서의 상대적 지위를 간과한다. 즉, 자본으로 매겨지는 국가간 서열에 따른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제조업 영세사업장과 농업 등 3D 직종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해왔다. 오늘날 이주노동자들의 존재는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의 “산업예비군”이자 착취율을 높이는 수단이다. 이주노동은 노동력이 부족한 북반구 선진국가의 노동력을 남반구에서 온 저렴한 이주노동자로 보충한다. 이런 이주노동자들이 억압적인 일터와 한국식 위계질서에 적응하며 ‘한국화’되는 것, 또 다른 능력주의인 성과만능주의를 만족해야 비로소 ‘시민’으로서 대우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다. 이들의 경험 전반에 깔려있는 동화주의는 실재하는 차별을 은폐하고 위계를 낭만화할 뿐이다.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

이렇듯 저자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에 따른 위계를 보지 못하고, 경쟁으로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가 ‘효율적’이고 ‘성장’을 도와주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섣불리 주장하며, 국가와 세대 구분에 한정해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수십년 간 우리가 지겹도록 들어온 주류 담론의 일부이다.

문제는 인상비평에 기댄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이 단지 “청년(엘리트)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검증없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자의 의견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지만, 그저 ‘청년’이란 이유만으로 조명 받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언론이 저자를 조명하는 방식은 어찌보면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으로 집단의 목소리를 과잉대표하는 동시에, ‘청년’을 타자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글 : 김현빈 (90년대생, 플랫폼c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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