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위기와 자본 ② | 미래는 미얀마 민중에게 달려있다

미얀마 위기와 자본 ② | 미래는 미얀마 민중에게 달려있다

미얀마 군부에 타격을 준 것은 '국제사회'나 자본이 아니라 미얀마 민중들의 저항이다.

2021년 4월 2일

[동아시아]미얀마미얀마, 동아시아, 시민불복종운동

이 글은 지난 2월 20일 스펙터저널(Spectre Journal)에 실린 Keep the Streets: Coup, Crisis, and Capital in Myanmar를 번역한 것으로, 스펙터저널과의 협의를 통해 두 번에 나누어 플랫폼c에 소개하고 있다. 조프리 아웅의 주장은 쟁점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오늘날 미얀마 사회(운동), 나아가 전 세계 좌파가 마주한 모순을 숙고할 수 있다. ①편을 읽지 않았다면, 먼저 읽은 후 이어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자카리 르벤슨(Zachary Levenson 이하 ‘르벤슨’) : 미얀마는 쿠데타 및 군정과 관련된 기나긴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듣는 서사는 잇따른 군벌 정치 과정에서 1988년 NLD(민주주의민족동맹)가 형성되는 1988년 대중 봉기의 흐름입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더 복잡할 것이라는 의심이 드는데요. 미얀마에는 유구한 좌파 전통이 있죠. 몇 가지 예를 들면 아웅산수치의 아버지이자 버마공산당 창립의 주역인 반식민지 영웅(아웅산 장군)이 있었고, 그의 암살 이후 식민지 이후 시대 초반에 우누(U Nu) 중심의 통치정당 AFPFL(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도 있었죠. 또, 네윈(Ne Win) 장군은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라는 기치로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만들어 수십년 간의 통치했고, 1988년에 비로소 사회주의계획당에서국가평화발전평의회(SLORC)로 알려진 군부 정권으로 전환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얀마를 포스트 사회주의 국가로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장기 독재로 이해해야 할까요? 이 역사를 어떻게 특성지어야 할까요?

조프리 아웅(Geoffrey Aung; 이하 ‘아웅’) : 여기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테제를 변주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항상 역사화하라(Always Historicize!)”고 했죠. 2011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 기구나 지식인들이 경솔한 방식으로 지난 50년을 “정체된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캐리커쳐화해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제스처는 아주 정치적인 것이었죠. 전면적인 자유주의화 의제, 금융기관에 대한 약탈적인 수용, 해외 자본에 대한 수동적인 순응을 정당화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가렛 대처식(Thatcheresque) “대안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 술책과 같습니다. 마치 이 일차원적인 과거를 고려할 때, 탐욕스럽고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말고는 대안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미얀마의 정치적 미래를 재사유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과거의 이런 이미지를 재가공하는 것에 달려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논할 필요도 없이 미얀마의 과거는 일차원적이지 않습니다. 독립(1948년) 이후 1962년까지 우 누 정권 시기의 국가사회주의는 독립을 쟁취한 다른 사회주의 개발국가와 크게 상통했죠. 이 사회주의는 또한 특히 반공적이었는데, 중앙정부가 버마공산당(CPB, Communist Party of Burma)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민들의 정서와 이해를 사로잡으려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버마의 식민주의적 정치경제를 급진적으로 뒤집기 위한 시도로써 이 개발국가는 경제의 버마화, 국영화, 산업화 등 세 가지 축을 시도했죠. 그렇게 함으로써 1차 상품[농산물,수산물,임산물,축산물] 수출에 의존하거나 인도나 중국 무역상들로부터 지배당하는 걸 거부하려 했던 겁니다.

1962년 군사 쿠데타 이후, 혁명평의회(이후 사회주의계획당)는 세 아젠다를 더욱 급진화하고자 했습니다. 장군들은 여전히 극심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처음에는 서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개발주의 정권을 공고화하고자 했죠. 그리고 동시에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 주변국들을 파괴하고 있던 냉전 정치에 휩싸여 파괴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이 되어서는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산업화 패러다임(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적용하고자 했던 수입대체산업화의 극단적 모델)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1988년 민중 봉기는 사회주의계획당을 끌어내렸고, 이후 새롭게 구성된 군부 정권인 국가평화발전평의회는 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기존의 사회주의를 해체하는 국가주도 시장자유화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이런 도식적인 역사에서도 정체된 권위주의적 과거로 묶이는 1990년대와 2000년대가 실제로 포스트 2011년 시기 개혁에 대한 예비조치가 이뤄지는 결정적인 경제 변화의 시기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1988년 봉기라는 형태(다시 말하지만 이 봉기는 단순히 학생들만의 봉기가 아니었습니다)를 취한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죠. 또 1962년부터 1988년에 이르는 시기에도 초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들도 있습니다. 가령 한때 미얀마가 두드러지게 참여했던 비동맹운동(NAM, Non-Aligned Movement)의 붕괴, 버마공산당 반란의 소멸, 그리고 버마의 사회주의 개발정권의 중핵이 될 외화가 점차 부족해짐에 따라 필요한 원료와 기계를 더 이상 수입할 수 없게 되는 상황 등 말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미얀마는 포스트-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저는 이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미얀마의 BSPP 시기에 대한 수 많은 분석들과 다르게 저는 장군들이 “이름 뿐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또한 BSPP의 최고이데올로그가 결국 (음울하게) 인정하듯 미얀마가 ‘국가자본주의’였다고 하는 규정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미얀마의 사회주의는 다른 곳의 현실사회주의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넘어서는데 실패한 프로그램에 입각한 이행 시도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의 착취와 억압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니 말이죠.

사회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정치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더 낫고 순수한 사회주의에 대한 관념을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역시 사회주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회주의 정권들의 붕괴를 일으킨 역사적 조건을 똑같이 적용받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고요. 그 역사적 조건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연구는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중 하나가 이것인데, 탈식민지 미얀마에 관한 확장된 경제사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급진적인 정치적 전망 역시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일차원적 역사에 종언을 고하며 죽은 자들이 죽을 자를 묻게 해줘야 합니다.

르벤슨 : 미얀마의 좌파 전통에서 되살릴만한(worth salvaging) 것이 있나요? 혹시 반파시스트 시기와 아웅산의 투쟁이 그러한 역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마저 [역사의] 휴지통에 남겨두면 될까요?

아웅 : 저는 “구조(salvage)”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요. 과거로부터, 현재를 위해 미리 만들어진 혁명적 기획을 발굴하여 먼지만 털어내고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 좌파적 기획들에 대한 낭만적인 호소가 그닥 효용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역사적 분기점에서 가능성의 개폐를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좌파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면 유의미하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오늘날 무엇이 불가능한지 알고자 하는 것(그럼으로써 오늘날 여전히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일 뿐일 지라도 말이죠. 따라서 당연하게도 미얀마에서 “우리는 좌파적이고자 했지만 우리와 맞지 않더라”고 통용되는 관념을 거부합니다. 아닙니다. 한동안 강요된 형태의 사회주의가 지배적이었지만, 붕괴될 때 쯤엔 너무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했습니다. 미얀마에서 좌파 사상을 기각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정직하며 지적으로 불성실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입장은 미얀마의 정치사상에 대한 우파들의 역사편찬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죠.

사실, 식민지 말기부터 탈식민지 초기인 1962년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수십년 동안 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좌파 정치비전들이 번성했습니다. 미얀마 독립투쟁에서 좌파들이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해준 석유 노동자 파업을 이끈 전투적인 조직가 “도깨비[The Ogre]” 타킨 포 할라 기[Thakin Po Hla Gyi]를 떠올려보죠. 이 파업은 도시의 학생 민족주의자들을 토지, 노동, 자원을 둘러싼 농촌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결시켰습니다. 도깨비의 유명한 팜플렛인 “파업 전쟁[The Strike War]”은 식민국가에 대항하여 인종 구분을 초월한 혁명적 투쟁을 선동했습니다.

혹은 작가 반모우 틴 아웅[Banmaw Tin Aung]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의 대중적 서사는 독립 이후의 시기 동안 미얀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조직한 투쟁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서발턴 정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다른 공산주의 운동처럼 버마공산당 역시 발전된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텔로스[telos, 궁극적 목적]가 아니라 압도적인 농경 사회 내 노동자와 농민(후자가 현저히 두드러짐)의 사회적 세계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버마어로 ပစ္စည်းမဲ့လူတန်းစား = pyitsimé lutansà)에 기초한 혁명적 투쟁의 형태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발굴하면 종종 프롤레타리아 자기조직의 형태에 기반하여 국가에 대항한 전투적 좌파들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인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사회주의를 한참 넘어야 이런 역사에서 재고하고 되찾아야할 것이 많겠죠. (다만 낭만적인 회수작업이 되지 않도록 조십스럼게 진행해야 합니다.)

르벤슨 : 쿠데타는 흥미롭게도 서구 시각에서 아웅산수치의 위상이 만델라와 같은 것에서 추락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아웅산수치는 로힝야 주민들에 대한 학살에 대해 변명을 일삼는다는 불명예를 떠안고 있죠. 이것만 아니었다면 쿠데타에 대한 더 강력한 국제적 비판과 수치에 대한 결연한 방어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시나요? 그러니까 이것 때문에 서구 제국의 개입이 이뤄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웅 : 수치가 서구열강들의 눈 밖으로 떨어졌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의미에서 화가 날만한 일인데, 그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 열강들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무슬림 세계에 전쟁을 수십년 간 벌여왔다는 점에서 그들의 위선을 증명해주기 때문이죠. 이는 수치에 대한 옹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죠. 자유주의를 역사적 기획으로 이해한다면 원주민 학살, 농원(plantation) 노예제, 제국주의적 약탈 등이 그 기획의 절대적인 내면이며 흑인 및 원주민 학자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오늘날 자유주의에 있어서도 필수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수치가 자유주의자가 아님이 드러났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의 흔들리는 지위가 쿠데타에 대한 서구 반응을 설명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서구 열강들이 1988년 봉기 이후 일어난 이전 쿠데타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가 아웅산수치의 지위와 상관없이, 예컨대 UN 산하 기관들과 협력해 빈말이나 제재같은 대강의 제스처 이상의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른 말로 하자면 서구의 비판이 음소거되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음소거”가 뭔가 더 해야하거나 할 수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면 말이죠. 사실 저는 이 이상 뭔가 한다면 전략적 가치가 그다지 없는 곳에 절대 할리 없는 조율된 개입(concerted intervention), 즉 군사 개입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아웅산수치 정부에게 권력을 되돌려주기 위해 외국 정부나 UN이 중재협상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도 수치의 지위가 수치의 상태를 돌려놓기 위한 시도에 꼭 방해가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르벤슨 : 최근 수십 년 동안 중국은 서로 다른 핵심적인 순간에 흥미로운 역할을 했는데, 때로는 군부를, 때로는 반군을, 때로는 NLD(민주주의민족동맹)를 지원했죠. 최근 추앙[Chuang]에 실린 글에서 선생님은 중국이 계속 중심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는데요. 중국은 [이 쿠데타에서] 누구를 지원할 것 같나요? 미·중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지원이] 미국의 개입을 자극할까요? 아니면 중국은 관여하지 않을까요?

아웅 : 적지 않은 수의 미얀마 사람들이 중국이 어떠한 의미에서 “쿠데타”의 배후에 있거나(이를 지탱하는 근거는 없습니다) 적어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중국의 외교관은 심지어 흔치않은 인터뷰에 응해 쿠데타는 "중국이 원하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중국과 미얀마의 군대가 확고한 동맹관계라는 생각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중국 정부는 다른 나라의 정치적 동요에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내정”이라는 단어로 일축합니다. 중국은 이러한 노선에 따라 안보리에서 UN의 조치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미얀마의 장군들이 전혀 좋아할 리 없는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미얀마의 중국 근접 국경지대의 반란을 수십 년 동안 지원해왔습니다. 버마공산당 반란에서부터 공산당 붕괴 이후에 등장한 무장단체들까지. NLD 정부 역시 중국과 매우 강력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이는 군부의 우려를 불러 일으킬 정도였죠.

따라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복잡한 것만도 아닙니다. 중국 정부, 국영기업, 그리고 [일반] 기업들은 미얀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그 누구하고도 일하고자 합니다. 특히 [미얀마의] 인프라에 대규모 중국 투자가 일어났다는 점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들은 이런 프로젝트를 무슨 일이 있어도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고 제 생각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쿠데타는 미얀마를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 중국 진영에 두지 않습니다. 더욱이나 확실하게 (중국은) 미국의 개입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두지도 않을 겁니다. 미국이 행사할 수 있는 주된 무기는 경제제재이고, 이는 중국 견제용이라기보다는 안타깝게도 군부체제에 반대한다는 무디고 자기과시적인[self-aggrandizing] 성격의 입장일 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국제 사회’(라고 쓰고 ‘서구 열강과 UN’이라고 읽죠)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는 해야하는지 물어봅니다. 제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합니다. 새 정권에 대한 어떤 심각한 타격이 가해진다면 이는 소위 ‘국제 사회’의 오만함이 아니라 미얀마의 대중적 저항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르벤슨 : 미얀마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지금 어느 수준에 와 있나요? 2011년은 분명 소수민족의 엘리트를 지배세력의 연합에 포함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 동맹은 무너졌나요? 자본 유출을 예상할 수 있나요(아니면 이미 일어나고 있나요)? 이제 국내 자본과 해외 자본은 뭘 할까요?

아웅 : 아직 드라마틱한 자본 유출은 목격되지 않습니다. 주로 군부의 지원을 받는 회사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움직임 정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맥주 회사인 기린(Kirin)은 1990년대에 결성된 2대 군부 지주회사 중 하나인 미얀마경제홀딩스(MEH)와 합작 법인에서 손을 뗐습니다. 그러나 군부가 미얀마 지배층 중 자유주의적 분파와의 동맹을 박살낸 이상 미얀마와 서구 자본의 연결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해졌습니다. 적어도 몇몇 회사들이 철수하고 몇몇 투자자들이 투자를 철회할 것임을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항상 반복할 필요가 있는 점은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Total]을 제외하고, 미얀마의 장기 자본주의 이행(1990년대 초부터 오늘날까지 30년 가량) 동안 해외자본의 가장 큰 출처는 일관되게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였지, 유럽·미국·일본(일본의 경우 최근에 비교적 제한된 방식으로 투자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도 아니었습니다. 중국·태국·싱가포르의 비중이 가장 큽니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까지, 그리고 미얀마의 저지대에서 국경지대의 자본주의적 개척까지요. 쿠데타 때문에 아시아간 자본 유출이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한다면 놀라운 일일 겁니다. 자본 축적의 핵심 조건들은 건재할 겁니다. 또한 국경지대의 자본주의적 개척이 다른 아시아 국가 자본에 의해 추동되었기 때문에 소수민족 엘리트를 이러한 자본주의 이행에 포섭하는 과정 역시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국경지대의 대중들이 쿠데타에 대한 불만이 급증하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죠.

다른 한편으로 미얀마의 자본주의적 이행은 미얀마의 광활한 농촌 지역의 반(半)자급자족 농업을, 토지의 대규모 강탈 등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도심에서 저임금, 비공식, 불안정한 고용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많은 농촌과 도시 빈곤 노동자들이 주변국, 특히 태국에 취직하는데요. 이주노동자로서 과잉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자본의 드라마틱한 유출이 없는 이상(다시 말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이러한 축적 조건으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하리라 기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얀마 노동자계급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농촌 노동자들은 땅이 필요하지만 농촌이 그들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크게 보면 미얀마의 자본주의 이행은 이 잉여인구의 등장에 대한 서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과잉개발된 세계 전반에 걸친 탈산업화는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산업 고용의 점유율이 하락하는 점과 연관되어 있죠.

르벤슨 : 가까운 미래에 민주화를 할 기회가 생길 전망이 있나요? 아웅산수치[의 정치 생명]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NLD가 그 역할을 다할 것 같나요? 아니면 우리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보고 있는 것인가요? 

아웅 : 저는, 좋든 나쁘든, 아웅산수치가 끝났다고 보기에 너무 이르다고 봅니다. NLD는 여전히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NLD의 현상 유지로 되돌아가고자하는 생각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비록 아웅산수치의 복귀가 대중 투쟁의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죠). 전국 도시와 마을에서 새롭게 구성된 세력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점만으로 이 세력이 수치와 NLD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상하는 것은 항상 어렵죠.

혹자는 저항이 워낙 강해서 이 군부 체제뿐만 아니라 미래의 군사 쿠데타 발생 가능성까지 끝장낼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정도의 낙관은 떠올릴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군부가 당연히 이길텐데, 대량의 유혈사태를 일으켜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시위가 끝나길 기다리며 야간 급습을 통해 주요 활동가를 제거하고 이러한 급습을 엄호하고 도심 주변에 부대를 더 잘 위치시키기 위해 야간에 인터넷을 중단시키는 것을 지속하는 전략을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가능합니다.

두 예상은 서로 상반되지만, 두 입장 모두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유일한 지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세력 균형이 거리에서 쿠데타에 대항하는 대규모 저항에 달려있다는 것, 그것이 도시 내 점거로 이루어지든, 물류 취약점을 붙잡는 것이든, 우리가 아직 보지도 못한 전략을 하는 것이든 말이죠. 이 저항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계속 거리에 있을 수 있도록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힘을 유지하고 다른 정치적 미래를 쟁취할 수 있을까요? 매일 전국에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를 살피며 이러한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그들의 대답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이 무엇이 될 지] 두고 보게 될 것입니다. 함께 말이죠.

번역: 보리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