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노동자의 절망과 희망

중국 신노동자의 절망과 희망

2021년 1월 11일

[동아시아]중국대륙중국, 페미니즘, 여성노동자, 교육, 농민공, 동아시아

이 글은 베이징 노동자의 집(北京工友之家) 연구활동가 뤼투(吕途)가 2018년에 한 대중 강연 「품팔이 노동자 이야기(打工者的故事)」를 번역한 것이다. 원제의 ‘打工者’는 사전상으로 ‘품팔이꾼’이나 ‘품팔이 노동자’로 번역되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혁개방 이후 물밀 듯이 도시로 몰려든 농촌 출신 노동자, 즉 농민공을 말한다. 뤼투는 이들이 “도시를 떠날 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고 규정하고, 현대 중국의 주요한 집단이 된 그들을 ‘신노동자’라고 부르길 제안한 바 있다. 2017년 기준 2억 8~9천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본 번역문에서는 경우에 따라 신노동자, 노동자, 농민공을 혼용했다.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중국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중국 사회 자체에 대한 혐오를 구분하지 못한다. 잘못되거나 과정된 이야기가 남발되고 있고, 이는 오히려 날카로운 비판을 방해하며, 동시에 한국의 국가주의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동시에 대중 이데올로기에도 고스란히 이전되고 있다. 이 강연은 오늘날 중국 사회 현실에 대해 비교적 현장감 있게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2019년에 번역 소개한 영화 <흉년지반>, 2020년에 소개한 다큐멘터리 <싼허에는 사람이 있다>와 더불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소개하고자 한다. 해당 강연 영상은 유튜브 상에도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 업로드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품팔이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03년 제가 막 박사 학위를 딴 지 얼마 안 됐을 때, 저는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요. 한 국제 연구 프로젝트의 요청을 받고, 베이징에 돌아와서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베이징에서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한 공익단체를 찾아갔죠. ‘베이징노동자의집’이란 곳이었는데요. 당시에는 하이뎬구(海淀区)의 샤오쟈허(肖家河)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신노동자예술단(新工人艺术团)과 함께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에 갔었죠.

베이징노동자의집은 나중에 베이징 피촌(皮村)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요. 그곳에 동심실험학교(同心实验学校)를 개교하고, ‘유동아동’(流动儿童;농민공 보육자와 함께 도시로 온 어린이들)들에게 교육을 제공했죠. 운 좋게도 이곳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1만 명이 넘는 유동아동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2005년 겨울, 저는 동심실험학교에 가서 그 기구의 책임자 중 한 명인 왕더즈(王德志)를 찾아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손에 화염방사기를 들고 온열기를 달구고 있었어요. 너무 추운 나머지 온열기가 얼어버렸던 거죠. 만약 제때에 내부의 얼음들을 녹이지 않으면, 온열기는 바로 동파되었을 것이고, 아이들은 추위에 시달렸겠죠. 저는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채, 고개를 숙여 제 손의 길고 긴 질문지를 봤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왕더쯔 손 안에 쥐어있던 화염방사기를 봤죠.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설령 제 연구를 제대로 해낸다고 한들, 책을 출판한다고 한들, 논문을 국제회의에서 발표한다고 한들, 제 연구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죠. 그렇다면 제 연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단체의 다른 책임자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연구자가 우리를 연구하는 것은 곧 카메라를 가져와서 우리 사진을 찍어가는 것이죠. 여러분이 본 우리는 단지 액자 속의 장면이지만, 그건 필시 진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말은 저를 바꾼 하나의 계기가 됐습니다. 저는 진짜 유용한 연구를 하고 싶다면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필요하단 것을 깨달았죠. 2008년 1월, 저는 베이징노동자의집의 활동가가 됐고, 피촌에서 살게 됐습니다. 우리 단체의 동료들은 피촌 노동자의 거주 조건과 같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몇 평방미터의 셋집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이었죠. 방 안에는 밥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고, 바깥에 세워둔 천막에서 해야 했어요. 잠자는 곳도 아래에 벽돌을 쌓고, 위에는 매트리스를 깔았습니다.

이와 같은 고된 조건에서, 주먹구구로 대처하며 사는 걸 여러분은 얼마나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여러분은 (농민공들이) 피촌에서 체류하는 것은, 어느날엔가는 떠나야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정말 ‘잠시’ 머무는 건가? 만약 떠나야 한다면 어디로 가지?

방금 막 말한 이 의문에 근거해 연구를 시작하게 됐죠. 품팔이 노동자의 거주 항황과 미래 발전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당시 우리가 인터뷰한 것은 학교의 가장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들이 우리 베이징노동자의집 활동가들을 매우 신뢰하고 있었고, 그러니 조사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높았죠. 그게 2009년입니다. 당시 가장들의 평균 연령은 이미 38세였고, 지금 10년이 지났으니 48세가 됐겠네요. 그건 곧 그들이 농민공 1세대이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시 조사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베이징에 이미 평균적으로 7년 간 살았고, 피촌에서도 4년 넘게 살아왔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이미 피촌에서 5년, 심지어 10년 간 살고 있었습니다. 한 곳에서 4년, 5년, 10년을 사는 것은 ‘체류’라고 말할 순 없겠죠.

우리는 다시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후에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65퍼센트의 노동자들이 고향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이후 계획이 어떻게 되십니까?” 단지 9퍼센트의 노동자들만이 고향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건 곧, 도시에서 살며 일하는 것은 하나의 적극적 선택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피동적 선택이란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의문이 들었습니다. 당초에 우리가 농촌에서 도시로 왔던 이유는 농촌 농업이 생계를 유지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렇다면 이후 언젠가 도시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되면 옛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때 고향으로 여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의문은 제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추동했습니다. 저는 도시와 향촌을 대비하는 연구를 했는데, 도시에서 일군의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고향으로 가서 그들의 가족들과 인터뷰하는 것이었죠.

제가 인터뷰했던 한 산재 노동자가 있는데요. 그는 아내와 함께 선전에서 일하고 있고, 부부는 모두 선전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월세방 안에는 단지 1인용 침대 하나가 있는데요. 왜냐하면 한 명은 주간조이고, 다른 한 명은 야간조거든요.

제는 광저우 판위에서 아주 작은 셋방에 머물렀었는데요. 저는 키가 큰 편이지만, 말랐거든요. 그래서 간신히 안으로 들어가서, 안에 있는 책상을 써서 밥을 했죠. 그 바로 옆에는 볼 일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요.

이와 같은 공간을 보고나니 제 마음은 너무 비참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작은 공간 안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똥도 싸고 오줌도 싸는 등 기본적인 생리 기능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삶의 목적은 단지 하나였어요. 다음 날 공장 안으로 출근해서 기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었죠.

도시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농촌은 또 어떤가요? 다들 아시겠지만, 농촌 생산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과거 몇 십 년 동안, 곡물 가격은 단지 3배 오른데 반해, 집의 가격은 1천 배 이상 올랐죠. 곡물 생산, 농업 생산은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땐 손해를 봐야 하죠. 왜냐하면 현재 자연환경은 엄청난 파괴에 직면해 있고, 분전단간(分田單干; 밭을 나누어서 개인 책임으로 생산하는 체계. 1978년에 개시.) 이후 수리 시설은 유지 보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전 우리 노동자학교 학생이 사진 몇 장을 보냈어요. 그의 어머니는 논두렁에서 울고 있고, 곡식은 한 톨도 거두지 못 했죠.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고향에서 이런 집을 짓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결혼을 하고 싶은 어떤 젊은 남자의 입장에서 이런 집 한 채 없다면, 맞선을 볼 자격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은 저희 노동자학교 학생의 것인데요. 그에겐 형이 둘 있는데, 두 형은 돈을 모아서 이런 집을 지었죠. 근데 비록 집은 이렇게 지었어도, 그들은 현재 여전히 결혼을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집 안의 상황이 오래된 쥐굴과 같이 됐으니까요. 이 아름다운 집 안에 한 80세의 늙은 할머니와 8살 난 손녀가 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 중에는 만약 모든 아이들을 곁에 두기 어려울 경우에는, 아들은 곁에 두고 반대로 딸은 유수 아동(留守儿童;부모가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난 후 농촌에 홀로 남아있는 아동)이 되고마는 것이죠. 농촌의 노인들은 어떨까요? 구이저우 쭌이(贵州省遵义市)에서 이 70세 노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요. 그에겐 4명의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명은 연락이 끊겼고, 둘은 남방에서 일을 하고 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한 명은 구이저우에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가 집에 오려면 3시간이 넘게 걸리죠.

여러분은 농촌의 소학교가 사라지고 있고, 치료소와 설비가, 농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농촌으로 돌아가 노인을 돌보려 한다면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지난 1년의 연구를 거치면서 그 결과로서 저의 연구가 발견한 것은 “도시에 머무를 수도 없고, 농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죠.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수는 오히려 매우 크게 늘었습니다.

중국 통계국이 발표한 2018년 4월치 통계 보고에 따르면, 2017년 농촌 호적이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이전한 숫자는 2억 8700만 명이었는데요. 이중에서 8600만 명 이상은 제조업 노동자였습니다.

2011년에 제가 충칭의 폭스콘(Foxconn) 공장에서 한 여성노동자를 인터뷰했었는데요. 그는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고, 간호실업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병 들어 있었죠. 본래는 휴학하고 싶어 했지만, 나중에 중퇴를 했고, 중퇴한 이후엔 폭스콘 공장에 와서 일을 했죠. 제가 그를 인터뷰했을 때에는 이미 그곳에서 일한지 9개월이나 지났을 때였죠.

그 여성노동자는 저에게 이번 달에 자기가 쉴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고 말해줬어요. 이미 100시간 이상의 연장근무를 했다고 했죠. 제가 그에게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믈었더니, 아마도 폭스콘에는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죠. 왜냐하면 그곳은 인간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5400여 명의 건설 노동자들도 만났습니다. 역시 2011년에 저는 허난성의 농촌에서 한 건설 노동자의 부인을 인터뷰했죠. 그는 농촌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농삿일을 하고 있었죠. 그는 제게 말했어요. “1년에 남편을 가장 많이 만나면 한 번 봐요. 전 이미 목석 같은 인간이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5400만 명이 넘는 건설 노동자라면, 우리는 곧 5000만 명의 만날 수 없는 부인과 가정이기도 한 거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 사이에는 또 2500여만 명의 가사 노동자들이 있죠. 그들은 매일 다른 사람의 아이와 노인을 돌보지만, 반대로 자신의 아이와 노인은 만나지도 못해요.

중국은 현재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고, 이런 부를 만든 노동자들은 거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그 대가 중의 하나는 바로 6877만 명의 유수아동, 그리고 다소 운이 좋아 부모를 따라 도시에 온 유동아동이라 불리는 3426만 명의 아이들입니다. 그럼 그들은 정말 다소 운이 좋은 것일까요?

저는 여러분께 하나의 진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피촌의 동심실험학교 6학년반의 선생님은 어느날 한 학생이 이틀 동안 학교에 오지 않은 걸 발견합니다. 그리곤 그 아이의 친한 친구들과 함께 그를 찾으러 갔죠. 결국 피촌 거리의 시장 안에서 그를 찾았는데요. 그는 이미 그곳에 출근해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만약 자기가 소학교를 끝까지 다녀서 졸업하게 되면, 베이징에 호적도 없게 되고 아빠 엄마는 반드시 그를 고향 마을로 보내 공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혼자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 아이는 스스로 학교 자퇴를 선택했던 겁니다.

우리는 좀 전에 농민공 1세대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그들 중 이미 50세가 넘은 이들은 5천만 명이 넘었죠. 당시에 그들은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그건 곧 도시에서 일을 하고, 어느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 5천만 명의 1세대 농민공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나요?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현재를 제대로 건설해내지 못 한다면 우리는 나중에라도 돌아갈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많이 든 노동자들은 공장에 들어가는 게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그럼 그들은 건설 현장에서 넝마를 줍거나 어떤 다른 생계를 위한 일을 맡아야 하죠. 가령 이처럼 방대한 숫자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청춘과 피땀을 바치고 있고, 게다가 상당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생명을 대가로 일하고 있는데요. 바로 산재와 직업병 피해자들입니다.

또 하나의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피촌에서 생긴 일인데요. 현재 저희는 인터넷상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서, 노동자들은 인터넷상에서 우리와 함께 공부를 할 수가 있죠. 노동자학교의 이 회원인 이 노동자는 목수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인터넷상에서 주간 회의를 시작했고, 마땅히 그도 발언을 했죠. 그가 바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선생님, 전 오늘 학습의 내용에 대해 얘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 저의 한 동료의 손가락이 대패에 잘렸거든요.”

그때 우리는 재빨리 가서 그 손가락 마디를 찾으려 했죠.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미 대패기계로 분쇄되어버렸습니다. 톱밥과 함께 뒤섞여서 말이죠. 어떤 조각조차도 찾을 수 없었어요. 땅바닥에는 핏자국만 뚝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고작 스무살이었습니다. 산재 배상도 받아내지 못 했죠. 왜냐하면 우리 피촌 노동자들은 거의 모두 노동계약이 없었고, 산업재해 보험는 더더욱 없었으니까요.

사실 3억 명에 근접하는 농민공들 중에서 3분의1 정도만이 산재 보험에 가입돼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은 산업 재해를 당하게 되면 아주 길고 지루한 법률 과정을 거쳐 산재 배상을 받아야 하죠. 어떨 땐 1년, 심지어 더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최종적으로 만약 당신이 정말 운이 좋다면 배상을 받게 되죠. 제가 알던 한 노동자의 잘린 손가락에 대한 배상은 2만 위안(340만 원)이었습니다.

유수아동이 꼭 중국 특유의 현상만은 아닙니다. 2012년에 제가 루마니아에 가서 그곳의 유수아동을 인터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우리들과 달리 농촌에서 도시로 온 게 아니었는데요. 루마니아에선 도시 역시 취업 기회를 찾기 어려워서, 그들은 유럽의 다른 지방에 일을 하러 갑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같은 곳이죠. 중국의 아빠 엄마들과 같은 점은 그들 역시 자신의 한평생을 바쳐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심지어 자신의 수입을 미리 지불받아서 농촌 마을의 집에 안이 텅 빈 큰 집을 짓는 것에 써버리죠.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오늘날 우리는 충분할 만큼 견뎌내고 있습니다. 희망을 억지로 꿈꾸면서, 가짜 상상을 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현재를 영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조차 영유하지 못하죠.

하지만 이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든 걸까요? 바로 자본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 깊게 옭아매져 있죠.

비버리 실버의 『노동의 힘』이란 책을 본 적 있습니다. 1870년에서 1990년까지 120년 동안 자본이 어떻게 세계를 옮겨다녔는지 설명하고 있죠. 1910년 자동차 자본은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동차산업과 노동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노동자들의 수가 크게 늘었고, 노동자들의 힘도 그만큼 강해졌죠.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노동자들의 임금도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자본은 도망가버렸습니다.

자본은 서유럽으로 갔고, 같은 이야기가 서유럽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런 후에 자본은 다시 떠나버렸죠. 남아프리카로 갔고, 남한으로 갔습니다. 1990년대 이후엔 중국에 왔죠.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바로 이윤만 추구하는 거죠. 그것은 이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하지 않습니다. 자본이 사회 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착취한 후에는 바로 개의치 않고 가버리죠. 폐허를 남겨놓을 뿐입니다. 그게 바로 미국의 디트로이트(Detroit)죠.

중국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중국은 땅이 넓고 생산물도 풍부합니다. 우리의 자본이 옮겨가는 것은 갑자기 국외로 가지 않습니다. 연해에서 내륙 쪽으로 옮겨가죠. 현재 광저우와 선전, 톈진에 있는 자본들이 공장을 빼버리고 나간 후에 남는 것은 텅 빈 공장과 건물 뿐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보다 크고 거시적인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단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을 뿐이죠. 저의 연구 역시 이런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저는 노동자들에게 가서 더 분명하게 현실을 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는지 사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후 제 책이 세상에 나간 거죠. 하지만 저의 예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시간이 없고, 책을 읽는 습관도 없기 때문이죠. 설령 이럴지라도 저는 여전히 그들로부터 피드백을 듣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그들에게 보내주었죠.

이게 바로 2012년에 쑤저우 노동자의 집에서 함께 열었던 독서회입니다. 당시 현장에는 2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의 피드백은 저에게 아주 큰 충격을 줬습니다. 20여 명에서 16명은 이렇게 말했죠.

“이 사회는 꽤 공평하지 않나요?”

그런 후 그들은 말했어요.

“설령 불공평하다고 하더라도, 합리적이잖아요. 설령 비합리적이라 해도 정상적이잖아요. 왜냐하면 이 사회는 원래 그냥 이런 거니까요.”

이런 피드백은 저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이 저를 계속해서 연구하게 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왜 우리는 고분고분하게 관리되는 걸까? 그렇게 복종하는 걸까? 공장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전 그게 자본 문화와 공장 문화가 함께 작동되면서 이런 상황을 만든다고 생각했죠. 그럼 그 공장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그래서 전 공장 문화라는 문제를 연구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첫 번째 책과 같이 생각하면서, 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했죠. 저는 노동자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기록할 수 있었어요. 물었죠. 공장 안은 어떤 모습이니? 주말이 되면 우리는 바로 만났어요. 하지만 저는 뭘 물어봐야할지 몰랐어요. 왜냐하면 저는 공장 안을 다녀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역시 내가 뭘 묻는지 몰랐고, 제가 뜬금없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그래서 대체 뭘 알고 싶은 거예요?”
“그냥 너희 공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
“발생하긴 뭐가 발생해요. 그냥 그런 모습이죠.”

이로 인해 저는 명확해졌어요. 문화는 인터뷰를 통해서는 연구해낼 수 없다고요. 문화는 오직 체험을 통해야 한다고. 그래서 저는 바로 공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됐어요.

공장 안에서 핸드폰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진이 흐릿하게 찍혔는데요. 2012년 5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전 쑤저우의 한 타이완 기업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했죠. 공장 안엔 4개의 조립라인이 있었는데요. 이건 제가 일한 라인입니다.

우리 라인에는 대략 13명의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앞쪽에 저 파란색이 첫 번째 자리이고요. 그의 자리는 프린트입니다. 4개의 라인 중 첫 번째 자리는 모두 아주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맡았죠. 그의 작업대에는 냄새가 매우 코를 찌르는 병들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요. 우리는 모두 그 병의 약품이 아주 유해한 것이란 걸 알았어요.

4개의 조립라인은 모두 하나같이 중년 여성들이 맡았죠. 그의 작업대 위에 아주 자극적인 약품이 있었고, 그는 그 약물을 묻혀 컴퓨터 앞부분에 묻은 기름 얼룩을 지웠어요. 아마도, 매우 이런 약품들도 난임을 야기하는 그런 거였을 거에요. 만약 아주 젊은 남성과 이미 아이를 낳은 여성노동자라면 여기서 산재를 입어도 도저히 알아낼 수 없겠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 우리는 항상 많은 산재와 직업병을 얻고 있고, 사실은 모두 고의적인 상해가 아닌가 싶어요.

제 자리는 바로 스티커를 붙이는 자리에요. 전 야간조였는데, 12시간 동안 일했죠. 앉는 게 허락되지 않았고, 의자도 없었어요. 쉬는 시간에도 앉을 수 없었죠. 세어보면, 8시간 안에 저는 2,620개의 스티커를 붙였어요. 평균 11초에 1개를 붙인 거죠.

출근 전과 퇴근 후에는 모두 정연하게 줄을 섰어요. 공장 안에서 주임이 훈계를 했죠. 말할 권리는 없었고, 질문할 권리도 없었어요. 모든 이런 일들이 무척이나 심플한 것들이었고, 당신의 사지가 건강하기만 하면 다 할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털 끝만큼의 가치도 없었어요. 아무 때나 대체될 수 있었고, 혼나는 것도 마찬가지였죠. 모든 것들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일러주고 있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평가절하 당하고 나면 결국 우리 스스로도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무의미하게 여기게 됩니다.

아까 문화 얘기했는데, 문화란 뭔가요? 문화는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우리의 일뿐 아니라 삶의 이모저모를 포함하죠. 우리는 내가 돌아가지 않는 것,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선 알고, 빈 집을 짓게 됩니다. 우리는 왜 결혼했죠? 왜 아이를 낳죠? 우리의 소비문화와 여가는 어떻죠? 이 모든 게 우리의 삶이에요.

제가 공장에 다닐 때 여공 기숙사에서 지냈거든요. 그 공장엔 휴일이 없었는데, 주말 동안 여공들이 어떻게 보냈는지 알기 위해 일요일에 출근을 안 했어요. 제 아래 침대 여성노동자는 평일에는 6시가 안 되어 일어나서 출근해야 했는데, 일요일 아침이 되니까 8시 전에도 일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오늘 쉬는 거 아니었어요?” 그가 말했어요. “쉬어도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어요. 가는 게 차라리 나아요. 그렇게 지루할 것도 없어요.”

건너편 침대의 그 여성은 토요일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옆 사람에게 물었죠. “그는 어디 간 걸까요?” 그들은 곧 제에게 그가 댄스 뽐내기(跳炫舞)를 하러 갔다고 했어요.

“아 그래요? 정말 멋있네요. 몸도 단련할 수 있고요.” 그러자 그가 말했어요. “아뇨. ‘QQ쉔우’라는 건 컴퓨터 게임이에요.” 그리고 기숙사 안의 두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 드라마를 봤죠.

이런 여성노동자 기숙사의 풍경을 보고, 다들 무력감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많은 역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방향도 없을 때에는 바로 무력해지죠.

쑤저우에서 한 남성 노동자와 인터뷰했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저는 소학교 때에도 두 번이나 유급돼서 8년이나 다녔어요. 병음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지를 못해서죠. 나중에 공장에 나와 일하게 됐고요. 근데 제가 모바일 게임을 하기 위해선 병음을 쳐야 했거든요. 그랬더니 전 1주일만에 바로 배웠어요.”

나중에 그가 말했어요. 현재 바깥의 품팔이 노동자들의 임금은 너무 낮다고. 하지만 한 업종의 임금은 조금 높대요. 바로 주형 숙련공이었죠. 하지만 여러분이 주형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도면을 그릴 수 있어야 해요. 그는 제게 중학교 시절 기하학 기초를 합격하지 못했다고 했죠. 하지만 임금이 조금이라도 높은 일을 찾기 위해서 그는 기하학 책을 가져와서 혼자 공부했고, 공부를 다 하고난 후에는 도면을 그릴 수 있게 됐어요. 제가 그를 인터뷰 할 때 그는 이미 주형 숙련공이 된 후였죠.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변화는 매우 가능한 일이에요. 단지 그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게만 된다면, 그는 그걸 위해서 해야 하죠. 전 노동자들의 사상과 문화의 변화가 일정하게 이와 같은 논리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이 여성노동자의 이름은 자쥔(佳俊)인데요. 1986년 후난성 변두리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나지 얼마 안 된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광저우에 가서 일용직 노동을 했죠. 3년 이후에 그의 남동생이 태어났는데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동생을 광저우로 데려갔고 유동 아동이 됐어요. 그리고 그는 계속 유수아동으로 남게 됐죠.

나중에 중학교에 갈 때 그는 학교 기숙사에 살았어요. 중3이 되자 부모님이 그를 광저우로 데려가서 함께 모여 살게 됐죠. 춘절을 보낸 후 그는 돌아가서 공부를 해야 했어요. 부모님은 그에게 기차표를 사주었고요, 학비도 내줬어요. 하지만 그는 침대에 이틀 간 누워있다가 일어나지 않았고,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해서 자쥔은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게 됐죠.

15세의 여자 아이가 뭘 하겠어요? 그는 가짜 신분증을 하나 만들어 몇 살을 더 높였죠. 그런 후에 공장으로 갔어요. 한 봉제공장이었는데,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대요. 매일 연장 근무를 자정까지 했고, 노동절이나 국경절에도 쉬지 못했죠. 15~16세의 여자 아이로서는 일한 지 반년만에 일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사직을 했죠.

당시는 2002~3년 즈음이었어요. 한 번 일을 그만두면 힘들어지니 계속 일을 못 찾았대요. 반년 이후에 마침내 다른 봉제공장에서 일을 얻었는데요. 매일 성실하게 출근했습니다. 이 공장 일은 훨씬 더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때로는 자정을 넘어 새벽2시까지 일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2년 이상을 계속 일한 후에 자쥔은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뒀죠. 하지만 한 번 요령을 배우게 돼서인지 일을 그만 두기 전에 다른 일을 또 찾았습니다. 그건 농기구 공장이었어요. 이 공장은 노동법을 중시하는 곳이었죠. 연장근무는 저녁 9시를 넘지 않았고, 주말 이틀도 쉬었어요. 게다가 임금 역시도 예전보다 낮지 않았죠. 자쥔은 너무 기뻐서 자기가 천국에 온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해요. 하지만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난 후 자쥔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일평생 무미건조하게 보내야 하는 걸까? 이런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게다가 자쥔에게 있어서 곤혹스러운 일은 주말이 되든, 심지어 주말 이틀 내내 쉬든, 갑작스레 큰 휴식 시간이 생기긴 했지만, 이 시간 동안 뭘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죠.

어느 휴일에 그는 거리에 나가서 하릴없이 돌아다녔대요. 그러다 머리를 들어 간판을 봤대요. 한 공익도서관이었죠. 그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어요. 원래 이곳은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 공익단체였어요. 그리고 다양한 문화오락 활동도 기획했죠.

자쥔이 처음 시작할 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어머니의 날 활동에서 자쥔은 너무 감동받았대요. 그로 인해 그는 이 기구의 골간 활동가가 됐습니다. 1년 이후 그는 이 기구의 상근 활동가가 됐죠. 2012년에 자쥔은 여성노동자 사구활동센터를 설립했어요. 2015년에는 유동아동들을 위한 사구(社区)활동센터를 만들었고요.

※ 역주 : 사구는 현대 중국 도시주민들의 가장 기초적인 생활 및 거주지역이자 행정단위를 가리킨다. 주민들은 사구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관련 조직을 통해 국가와 관계를 맺는다. 1930년대 사회학자들이 영어 community를 번역해 만든 조어이다.

저는 자쥔의 이야기를 기록해 『우리들은 정당하다』(뤼투 저, 고재원·고윤실 역, 나름북스; 원제는 《中国新工人:女工传记》)라는 책에 실었어요. 이 책은 모두 34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죠. 제가 뭘 위해 이 책을 썼을까요? 그들은 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제 인터뷰 요청을 모두 받아줬죠. 하지만 항상 저에게 물었어요.

“제 이야기가 뭔 말할 거리라도 되나요?”
“제 이야기를 글로 내는 게 무슨 의의가 있어요?”
“누가 그걸 보길 원할까요?”
“저 자신도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만약 우리가 해결책을 찾기를 원한다면, 우선은 현실을 똑똑히 알아야 하고,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도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의 삶의 과정에는 사실 사회 역사가 굴절되어 있어요. 이 여성 노동자들의 모든 삶의 여정 역시도 사실 근 70년에 달하는 신중국의 역사를 뛰어넘고 있죠.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하는데요. 바로 주주(珠珠)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88년 광동성 차오산지구(차오저우, 산터우 등 객가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가부장적 문화가 유독 심하다)에서 태어났죠. 만약 여러분이 그곳에서 태어났고, 공교롭게도 여성이었고, 가족 중 맞이였다면, 조심해야 할 텐데요. 공부를 그만 두어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주주가 그랬죠. 그는 소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런 후 동생들을 돌봐야 했죠. 14살이 됐을 땐 일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10년 넘는 시간동안 그는 많은 곳에 갔고, 다양한 일들을 했어요. 훗날 어느 날 그는 길거리에서 1장의 전단지를 주웠죠. 앞면에는 한 공익단체의 활동이 적혀 있었어요. 주주는 꽤 대담한 사람이에요. 바로 그 기구에 갔대요. 사람들은 그에게 말해줬죠. 베이징에도 이런 단체가 있다고. 거기엔 꽤 괜찮은 교육을 무료로 제공해준다고. 그래서 주주는 바로 우리 노동자대학의 2기 학생이 됐어요. 졸업 이후에는 동심실험학교에서 일했죠. 우리 학교에서 3년을 일했어요. 주주는 저에게 말했어요.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 오래 머무른 적은 없었다고요. 자기가 찾고자 했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고.

저는 한 사람이 일단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간을 거치고 난 후라도, 만약 약간의 희망과 빛을 보게 된다면, 반드시 그 빛을 향해 성장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자쥔과 주주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주주는 우리 학교에서 3년을 일한 후에 2014년 춘절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춘절 전에 그의 할아버지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셨기 때문이죠.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를 키워주셨기 때문에, 주주는 다시는 할머니를 돌볼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했어요.

그리고 주주는 베이징에서 얻은 교육 이념과 방법을 고향으로 가져가고 싶어해요. 고향의 여자 아이들이 다시는 자신처럼 어려서부터 학업을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바로 그래서 주주는 고향에 가서 작은 도서관을 열었어요. 현재는 4년이 지났고, 이 작은 도서관은 3개의 작은 도서관으로 확대 발전했죠. 나중에 또 그는 여성 야학을 세웠어요.

자쥔은 도시의 유동아동과 품팔이 어머니,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고, 주주는 농촌의 유수 아동과 유수 여성, 농민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죠. 저는 우리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으로 낮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미약한 힘이나마 공헌할 수 있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