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여성에게 빗장 걸어 잠근 여성들

트랜스 여성에게 빗장 걸어 잠근 여성들

여대 밖의 수많은 여성들과 여대 안의 자신들이 ‘위협’으로부터의 안전도가 다르다고 진단했다면,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세계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더 많은, 더 놓은 담장 쌓기로 안전은 보장되는가?

2020년 2월 20일

[읽을거리]페미니즘퀴어, 대학, 성소수자, 페미니즘

숙명여대에 입학 예정이었던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논란 속에서 스스로 입학을 포기했다. 그는 “대학을 가고자 하는 목표, 꿈조차 의심의 대상이자, 조사 대상이 되어야 했”던 좌절 속에서 “그 누구도 항상 다수자인 것도, 항상 소수자인 것도 아니”라고 덤덤히 성찰했다. (관련 기사: 숙대 트랜스젠더 합격생 결국 입학 포기 “신상유출 등 무서움 컸다”)

누군가의 ‘포기’에 ‘환영’을 표하는 것은 승패를 겨루는 싸움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이다. 한데 위협이 두려워 ‘포기’를 택한 한 사람의 결정에 대해 ‘환영’ 메시지가 등장했다. ‘위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위협’적 존재로 과잉대표됐지만, 그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모욕과 등골이 서늘한 협박을 경험한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연서명을 받아 그를 막아섰던 사람들은 한 사람의 좌절을 축하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빗장 걸어 잠근 여성여성ⓒ의 권리 담론, 여성™*

빗장 걸어 잠근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표방했다는 이유만으로, 말 많은 이들은 “이것이 페미니즘의 현주소”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페미니즘 운동이 이분화된 세계를 깨고 전복과 해방을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그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 빗장을 걸어 잠그며 여성여성ⓒ이 되길 택했나? 그리하여 여성™이라는 권리 담론에 스스로를 가두나?

  • 🎈도나 해러웨이는 남성=인간(man) 등식을 넘어 여성을 기준으로 인간 개념을 설정한 ‘여성인간ⓒ’과,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결합으로 탄생한 새로운 생명종인 의료실험쥐 앙코마우스™를 통해 사고 전환을 꾀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착안해 ‘여성여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동질성에 기반한 폐쇄성으로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는 여성의 규율집단을 설명하려 한다. 이들은 셀럽 교리와 SNS 상호 감시 시스템을 통해 억압적 규율을 전파, 유지하는 새로운 인간 종 여성들이다. 이들의 권리 담론은 ‘여성™’이라 표현될 수 있는데, 특허와 저작권이라는 배타적 상품성을 내세우는 것이 특징이며, 혼종의 사이보그 신생 종이지만 스스로를 자연적인 것, 순수 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나 해러웨이(민경숙 옮김), 『겸손한 목격자@제2의 밀레니엄. 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_만나다』, 갈무리 참조

이들은 “법적·의학적 성별 정정 이후에도 생물학적 성은 바뀌지 않는다”며,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성별 정정 자체를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남성’이었던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자대학이라는 공간에 합류하는 것을 위협으로 규정했다. 무엇에 대한 공포와 불안, 어떤 피해의 경험이 이들을 허약한 동질성에 기대어 담장을 둘러치도록 하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달리 존재 조건의 극적인 변화를 꾀하는 선택에는 선택을 통한 더 나은 삶에 대한 확신이나 그것을 감행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인 개인들의 선택이다. 성별 정정을 선택하는 이들의 삶은 함부로 규정지을 수도 없으며, 선택 이후의 삶의 전망을 단정하기도 어렵다. 성별 정정의 과정도 지난하지만 의심과 심문에 대응하는 일상은 끝없는 싸움과도 같을 것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여성들은 이들이 내세우는 ‘여성성’이 왜곡된 인식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특정 성별성을 증명하도록 강요받는 가운데 트랜스 여성들 스스로 고정된 성 역할과 규범을 강조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하기도 하며, 그러한 성향을 강조해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성 역할과 규범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트랜스 여성의 성 역할과 규범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여성’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배제될수록, 의심받으면 받을수록 그런 딜레마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나’라는 사람은 여러 정체성과 소속으로 구성된다. 특정한 정체성은 속박의 사슬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세계에서 자리를 부여받는 속하기(소속)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속하기의 안정성은 다른 가능성과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자, 안정된 일상을 위한 생존조건이다.

많은 이들이 보다 나은 자리로 도약하길 꿈꾸며 살지만, 도약을 위해서라도 지금 발 딛고 선 자리가 필요함을 안다. 설 자리가 좁혀지거나 경계선상에 처한 약자에게 왜 더 나은 길로 가지 않고 여기 속하려고 하냐, 왜 이미 있는 자리에 주저앉아 푸념하느냐고 함부로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어진 성별 구분으로 고통 받았다며 왜 굳이 다시 성별 구분된 자리에 끼어들려 하느냐는 물음은 폭력적이다. 트렌스 여성에게 굳이 왜 ‘여자 옷’?, 굳이 왜 ‘여자 화장실’?, 굳이 왜 ‘여자대학’?이라 묻는 것은 굳이 왜 ‘여성?’이냐는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날 때부터 여성으로 분류되어온 사람에게 “너는 왜 굳이 여자로 태어났느냐”고 물을 수는 없듯이 말이다. 이런 물음들의 속내에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경계 그 자체에 머물러야 한다는 보수적인 태도가 자리한다. 이 사회의 구획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사람은 존재의 불안을 홀로 감당하라는 배제의 태도다. 성별이 구분되는 수많은 순간을 불안과 초조로 거듭 넘겨야만 하는 이들에게 안정된 일상과 그를 바탕으로 한 건강한 관계맺음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여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여대의 특수한 성격을 강조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원하기 만들어진 특화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다만 구시대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성별 고정관념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학문과 공동체 활동의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여대의 효용은 분명 존재한다. 이에 더해 여대는 남성들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공간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대 역시 수많은 일상 속 선택지 중 하나다. 대학 선택에 학업 전공 지망뿐만 아니라 성적, 간판 등 여러 조건들이 저울질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누구나 그런 판단에 의해 대학을 선택하듯(또는 선택하지 못하듯), 트랜스젠더 여성에게도 대학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여대 진학은 여성(이라고 인정된 사람)들의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다.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의 선택지 중 하나다.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수많은 대학 중 일부로서 존재하는 여대는 선택 가능한 대학의 한 형태다.

여대의 ‘침입자’를 추방했다며 ‘축하’ 메시지를 발표한 이들은 성별정정을 거친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다양한 삶의 양식을 가진 여성들 중 누가 ‘진짜’ 여성인지 골라낼 수 없듯이 ‘남성’이었다가 ‘여성’이 된 사람이 ‘남성’에 가깝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남성으로 살아온 사회적 남성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은 없다. 이들은 타자에 대해 알기를 거부하는 고의적 무지를 선택하고, 배제와 혐오를 가리는 이중잣대를 사용했다. 생물학적, 외적 조건에 따라 타인의 본성과 성향을 재단하고 배척하였으며, 존중은커녕, 존재 자체를 모욕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라 여긴 트랜스젠더를 추방한 곳은 어디인가? 여대 밖의 수많은 여성들과 여대 안의 자신들이 ‘위협’으로부터의 안전도가 다르다고 진단했다면,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세계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더 많은, 더 놓은 담장 쌓기로 안전은 보장되는가?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1969)이라는 소설 속 게센 행성인들은 잠재된 남녀양성을 지녔다. 성별 구분 없는 일상을 살다가 케머라는 특정 시기에 성과 임신, 출산 등을 선택하게 되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성으로 성별이 고정된 다른 행성인이 ‘성도착증’ 환자로 여겨질 뿐이다. 래리 브래드버리의 <화성연대기>(1950)에서는 사뭇 다른 사회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화성인들이 지구 서구 핵가족모델의 성역할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화성인은 지구인과 교류가 없었음에도, 고정된 성 역할을 전제한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는 화성에 최초 정착한 인류도, 최후에 남는 인간도 모두 남성일 뿐이다.

어떤 상상력을 갖느냐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또한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종 성별 구분 속에 살아간다. 신체 외양, 유전자, 염색체, 호르몬 등에 따른 둘 중 하나의 성별 구분(섹슈얼리티)은 개인의 선택과 무관한 것이지만 이를 기준으로 성역할과 지위 등이 좌우되는 사회적 성별 구분(젠더)이 이루어진다. 생물학적 성별 구분은 확고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우리는 서로의 유전자, 염색체를 들여다본 적이 없으며, 나이에 따라 호르몬과 신체 외양은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인간 종을 넘어) 생명체로서 대부분의 특질을 공유하는 동질성을 가진 동시에, 아주 작은 차이들로 이루어진 특이성을 가진 서로 다른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성에 속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인간 사회에서 성차를 비롯한 여러 차이는 차별과 지배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강자 혹은 다수자들은 상대적 약자·소수자의 위치에 선 이들을 집단적으로 특질화하면서 상대화했다. 여성들은 그런 방식으로 타자화되어 왔다. 이에 대한 저항의 방식은 종종 ‘동질성’을 매개로 집단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질적 집단화가 모두 억압과 착취의 종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자에서 다수자로, 약자에서 강자로 자리 이동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상대적 약자, 상대적 소수자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질성은 일시적이며 필연적인 균열을 낳는다.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이지 않다.’ 동질성에만 기대어 자격을 강조하는 것은 개개인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연대’라는 개념이 강조되는 이유다. 연대는 서로의 차이를 깎는 고통의 과정이라기보다, 나와 같지만 똑같지는 않은 숱한 타자들을 발견하는 과정, 즉 차이의 발견과 각기 다른 존재들의 마주침과 공존의 방법이다. 서로의 안정된 기반을 지지하는 가운데,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로의 위치성을 만들어가는 창발의 과정이다.

성별 구분이 강할수록 차별도 강력해진다. 성별에 따라 있어야 할 자리를 나누고 역할을 고정하는 사회는 억압적인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자유에는 제약이 가해진다. 엄격한 이분법적 성별 구분이 여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는 어렵다. 소위 ‘여성적’ 특질은 차별과 억압의 명분이 되곤 한다. 성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딜레마를 오간다. 성별 구분을 전면 부정하거나 무관한 삶을 선언하는 것이 당장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담장을 더 높이 쌓아 올려 적대로 치닫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운신의 폭을 좁힌다. 주어진 경계선에 균열을 내기 위해 노력하거나 스스로 균열이 되는 소중한 존재들을 지지하며 연대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한 적 없지만 존엄을 존중받기 위해 여성들은 여성임을 긍정해왔다. 여기서 ‘진짜’ 여성이 누구인가 묻는 것은 소모적이며,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생물학적 특성이나 사회적 경험이 사람의 본성을 절대적으로 규정한다는 사고는 종래의 불평등한 성별 구분을 강화하고 인종주의적 편견과 공명한다. 폐쇄적인 동질성과 집단성을 강조하는 것은 상호 감시라는 억압을 불러온다. 트랜스 여성 한 명의 ‘유입’으로 ‘여성’ 공동체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한마디 말이지만, 낙인찍힌 한 사람의 일상은 실질적인 위협에 직면한다. 의심과 심문, 배제와 혐오는 공동체의 성원 자격을 비좁게 만들어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타자의 존재를 부정할 권리는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 ‘안전’은 달성될 수 없다. 구획 짓기, 담장 쌓기를 통한 ‘안전’한 세계는 누군가의 배제를 부른다.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변화하는 존재이며, ‘되기’의 존재이다.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억압당하는 착취의 구조를 벗어나려면 서로 연결되는 수밖에 없다.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에게 곁을 내주기,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자를 긍정하기, 마주침의 깨달음 속에서 상호 변화의 가능성 열기, 그렇게 나와 다른 소중한 타자들과 공존하기, 그것이 이 좁고 뜨거워지는 세계를 살아나갈 방법이 아닐까. “이 사회가 모든 사람의 일상을 보호해주길, 다양한 가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랐던 한 사람을 위태로운 경계 위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와 다른 이들을 밀쳐내고 차이를 깎아내 좁은 세계 안에 웅크리다 보면, 결국 안전하다고 가슴 쓸어내릴 땅이 몇 뙈기나 남을까. 다른 누군가를 억누르고 지배하는 황량한 땅 위에 좁고 높게 쌓아올린 담벼락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우리가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 꿈꾸는 세계는 적어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들을 규정 짓고 세력을 분류하는 것보다, 긴 호흡의 이론적, 실천적 기획이 모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성들 스스로 자신을 가두고 빗장을 걸어 잠그기까지 이 사회는 지금껏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는 성찰을 포함해서 말이다. 아래 책이 도움이 될 듯해 소개를 덧붙인다.

저자는 들뢰즈-가따리와 로지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풀어 소개하며 ‘여성-되기’라는 개념으로 차이의 생성, 연결성과 연대를 강조하며 페미니즘의 지향점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숱한 차이를 간직하고 생성하는 주체-되기를 통해 타자에게 개방적으로 열린 연대 가능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타자의 영향에 열려 있는 것, 상호의존적 관계망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적대의 세계는 억압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트렌스 신체, 퀴어한 신체는 담론적인 젠더 너머 물질적인 신체의 차이의 생산을 드러내면서 젠더에 개입해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트랜스젠더의 역사는 곧 젠더가 생산된 과정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166쪽)
“연대는 각기 다른 차이들의 서로 다른 위치 이동을 꾀하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이 지닌 위치에서 위치-변이(transposition)하는 것이다.”(208쪽)

글 : 최예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