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전환의 정치 : 그릇된 믿음에서 벗어나기

* 존 윅스는 기후위기에 맞서는 운동을 건설하고,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정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그릇된 믿음/주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기후 담론 전반에 퍼져있는 세대 간 대립이라는 믿음, 좌우파 정치가 똑같다는 믿음, 위협적인 경고가 효과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비판 대상이다.

존 윅스(John Weeks)

2019년 12월 <소셜 유럽>(Social Europe)이 지속가능하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유럽연합의 달성에 관한 논쟁과 토론을 변화시킨 정의로운 전환 시리즈의 연재를 시작했다. 첫 번째 글과 그 뒤에 나온 글들은 현재의 환경 파괴적인 생산과 분배 방식에서 벗어나, 공평한 사회 체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과제를 밝혀주었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들이 있었고, 또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운동을 약화시키는 잘못된 믿음을 버려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가장 취약한 것은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투쟁에는 세대 간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주장이다.

그릇된 추론

이 가설은 두 가지 그릇된 추론에 근거한다. 첫째, 무대책 환경 정책으로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의 “미래를 빼앗았다”고 주장한다. 둘째, 앞선 주장이 환경위기의 책임이 기성세대에게 있는 반면, 청년세대는 희생자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세대 간 갈등은 일반적으로 부의 집중과 같은 정책 이슈를 탈정치화하는 데 이용된다. 그러한 주장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데,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노인들은 한때는 젊었고, 젊은이들은 늙어갈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회가 연령대별로 영구적으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은 정적인 사고방식이다. 또한 이는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악명 높은 주장의 변주이다.

환경 문제가 노인보다 젊은이들과 더 관련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오염이 노인들에게 미치는 즉각적인 건강 영향은 적어도 어린이와 청소년 못지않게 심각하다. 또한 호흡기 질환은 명백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세대 간 분할이라는 믿음은 환경 보호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연합 형성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허구일 뿐이다.

정의로운 전환에 관해서는 세대보다 계급적 요소가 훨씬 더 타당해 보인다. 효과적인 전환은 자동차 생산과 같은 보수가 좋고 숙련된 많은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일자리를 생산적인 녹색 일자리로 대체하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모으기 위해 필수적이다.

게다가, 환경 위기가 젊은이들의 미래를 빼앗는다는 주장은 매우 중산층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불평등과 가난이 전 세계의 수백만 젊은이들의 미래를 앗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의 테레사 리베라 부총리의 주장처럼,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각국의 투쟁에는 괜찮은 소득 창출을 포함하는 정의로운 전환이 요구된다. 또한 국제주의에 따라 탄화수소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저소득 국가에 정의로운 전환 프로세스를 확장해야 한다.

특수 이익집단

세대 간 갈등이라는 잘못된 믿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우리 지도자들은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두 번째의 광범위한 비난이다. 이는 정치인들이 수십 년 동안 활동해 왔지만 환경 악화를 막지 못했다는 그릇된 추론에서 비롯된다. 환경을 위한 효과적인 조치는 시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특수 이익집단에 맞서고 그들의 반대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환경 정의를 위해 싸워온 유럽연합의 정치인들은 진보층의 지지를 받았고 앞으로도 지지를 필요로 한다. 우리 동맹군들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질책하기보다는, 우리는 더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연합을 건설해야 한다. 여기엔 ‘녹색 뉴딜을 위한 노동당’이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한 것처럼, 정치인들의 입장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일도 포함된다.

유럽연합은 보다 과감한 조치를 해야 하며, 유럽연합의 녹색 강령이 그 기초가 될 것이다. 녹색 강령을 통해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전국적인 연합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의 문제는, 세 번째 그릇된 믿음으로 나를 인도한다.

 

끔찍한 경고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국민투표에서 재앙의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은 “잔류”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이는 환경을 성공적으로 구할 수 있는 공식도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끔찍한 경고를 과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안 좋은 것은 파국의 전망을 믿고 절망과 낙담에 빠지는 일이다.

국제노총 정의로운 전환 센터의 책임자인 사만다 스미스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에 대한 해독제를 제시했다.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미래의 희망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어야 한다. 대부분의 성공한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두려움보다는 희망에 반응한다는 점을 안다. 미국에서 4번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알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 나선 1932년 가을, 미국 노동자의 3분의 1이 실업 상태였다. 그는 “행복한 날이 다시 온다”(Happy Days are Here Again)는 예상 밖의 노래를 선거운동곡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표차로 선거에서 이겼다.

정의로운 전환은 루즈벨트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미래에 대한 약속을 고무하기 위해 1926년 어빙 벌린의 히트곡 “푸른 하늘이 미소짓네”(Blue Skies Smiling at Me)를 고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더 유럽적이고 섬세한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1악장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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