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변두리엔 왜 철거된 마을이 많을까

대도시에서 쫓겨나는 중국의 ‘하층민’들

“정말이지 이 세상은 사람을 살 수 없도록 몰아붙이고 있어요.”

 

ⓒ중국노공통신(中国劳工通讯)

경고장이 붙은 후 시홍먼(西红门) 구역 17만 5천 거주자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쫓겨났는지 정확한 숫자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에스엔에스에 게시된 영상들에 따르면, 수천 명의 주민들이 짐을 이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 이런 퇴거 고지는 펑타이나 창핑, 하이디안 등 베이징 내 135개 지역에서 벌어졌었다.

퇴거 기한인 11월 22일 에스엔에스와 언론에는 철거 대상 지역의 주민들이 소지품을 모아 이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담겨있다. 영상은 가방을 메고 이동하는 모습, 빈 상점과 공장, 대기 중인 경찰과 철거 장비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강제 철거 조치가 이뤄지고 있는 주거지역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당시 베이징일보 보도에 따르면, 차이치 시장은 안전 문제에 대한 정부 회의에서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대해 강제 퇴거 조치하며, “‘회색 코뿔소’를 우리에 가두겠다”고 약속했었다. 무슨 말일까. 회색 코뿔소는 덩치가 커서 달려오면 땅이 흔들릴 정도이고, 코뿔소가 달려온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부딪히면 위험하다는 것도 안다. 이처럼 예상 가능하고 사고가 나면 파급력도 크지만, 쉽게 무시하다가 통제 불능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회색 코뿔소’라고 일컫는다. 물론 화재 위험이 큰 낙후된 주거지를 그대로 둘 순 없다. 안전 점검도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다시 안전하게 짓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위한 대책도 있어야 한다. 며칠 안에 집을 비우라는 명령에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도시빈민은 아무도 없다.

물론 당시 차이치 시장은 “퇴거 조치가 지나치게 성급해선 안 된다며, 인도주의적 보호 아래 주민들의 어려움을 도우며 진행해야 한다”고도 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말과 반대로 전개됐다. 베이징시의 퇴거 조치는 강력하고 조급했으며, 주민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며칠 후, 차이 시장이 “기층 민중을 대하는 데는 진짜 총칼을 빼 들고 총검으로 피를 보듯 강경하게 대응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발언한 사실이 드러났고, 걱정스레 사태를 지켜보던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촉발했다.

이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런민대학(人民大学), 칭화대학(清华大学), 베이징대학(北京大学) 등 베이징 내 몇 개 대학 대학생들이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베이징시가 “디돤런커우(低端人口·하층민) 정리작업”이라고 명명한 ‘강제 퇴거’에 반발하며 “잔혹한 디돤런커우 퇴출 즉각 정지”를 호소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시 정부의 하층민 퇴거를 강하게 비판하고 차이 시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서한도 발표했다. 서한에서 학생들은 “이번 강제퇴거는 베이징이 세워진 후 3천 62년을 통틀어 가장 악랄한 행정 조치이며, 중국 공산당의 당헌과 헌법, 관련 법규에 어긋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국가행정학원 왕위카이(汪玉凱) 교수도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 기고문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하층민 강제퇴거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국은 ‘디돤런커우’를 에스엔에스(SNS) 금지어로 지정하고 관련 게시물을 모두 삭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퇴거에 내몰린 주민들의 산발적인 시위도 벌어졌다. 당시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세계 인권의 날이었던 12월 10일 베이징 동북부 페이자마을에서는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일방적 강제퇴거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다. 이 마을 역시 강제퇴거 대상 지역 중 하나였다. 추운 겨울에 갑자기 갈 곳도 없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주민들은 “폭력 퇴거는 인권 침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전단을 뿌리며 거리를 행진했다. 이런 시위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에 시 당국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철거 지역 사진들을 보면 그곳의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네티즌은, “예전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다가 이제는 그들을 쫓아내고 있다”며, “이건 누구 잘못이죠? 세입자들은 아무 잘못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쫓겨날 위기에 처한 베이징 페이자마을 사람들의 항의 시위 (SNS)

결국 대다수는 베이징을 떠났다. 철거는 아주 말끔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베이징 외곽으로 향하다보면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물어져 있는 텅 빈 땅을 마주치게 된다. 서쪽과 북쪽은 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동쪽과 남쪽엔 허다하다. 피촌과 같거나 좀 작은 거주지역이 135개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중국의 사회학자 쑨리핑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비극적인 화재가 안전이란 이름으로 신노동자들을 도시에서 퇴거시키기 위한 구실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은 급격하게 도시화되어 농촌 출신 이주민들의 어마어마한 유입이 이어졌다”며, 이것이 “발전의 불균형과 몇몇 도시들에의 자원 집중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농촌 사람들이 소도시로 가고, 소도시 사람들이 더 큰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쑨은 초대형 도시에서 신노동자를 추방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럼 2선 도시로 쫓겨난 후 그 도시들도 이들을 몰아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들은 어디로 가죠?”

관영언론《환구시보》의 대외판인 《글로벌타임즈》의 편집자 후시진은 웨이보 포스트를 통해 “철거된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지” 묻기도 했다. 그는 “농민공이 떠난 후 벌어질 경기 침체와 생활의 불편 등을 걱정하는 게 시민 여론”이라고 주장했다. 퇴거 사유가 뭐든 시민들은 영하의 날씨에 일어난 이 퇴거가 어떻게 ‘조화사회’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어떤 중산층 시민은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타오바오에서 산 물건을 항상 배달하고, 정수기 물을 갈아주던 배달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강제 철거된 지역의 한 노인 ⓒ케빈 프레이어(게티이미지)

 

강제 철거로 사라진 집을 떠나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SNS)

물론 베이징시가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여론이 악화되자 퇴거된 이들을 위한 ‘긴급 취업박람회’를 열었다. 또한 집을 잃은 이들에게 임시 숙소나 귀향 열차표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나 충분히 제공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더구나 한겨울에 쫓겨나 잘 곳도, 먹고 살 돈도 없는 와중에 취업박람회에 갈 수 있는 노동자는 얼마나 될까?

그 폐허 위를 지배하는 건 부동산 개발의 물결이다. 기차를 타고 중국 어디를 가든 곳곳이 아파트를 짓고 있다. 그리고 지방도시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은 여지없이 텅텅 비어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중국에선 주택 공급이 결코 부족하지 않음에도, 버블은 계속되고 있고, 부동산 가격은 이미 천정부지로 솟아 있다. 2017년도 기준 70개 도시 부동산 가격은 전년 대비 무려 10.3퍼센트 상승했다. 중국에서 농촌 토지는 농민 집체의 소유지만, 도시의 토지는 국가 소유다. 개혁개방 이후 대도시들은 농촌 토지를 수용해 국유화함으로써 도시를 확대해왔다. 단, 토지관리법상 토지 수용 목적은 ‘공익’에 한정되고 있어 사회 인프라 건설이나 공공시설을 위해서만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급속한 도시화는 ‘공익’의 의미를 퇴색시켜왔다. 개발은 상업 목적이 주를 이루며, 수용된 땅은 시장가에 의해 매매가 이뤄진다. 도시 토지의 소유권은 이제 담보·재임대·전매 등을 포함하는 자본주의적 의미에 가까워졌다. 단, ‘보상’만이 제한돼 있을 뿐이다. 중국의 도시 인근에서 토지 수용을 둘러싼 시위가 급증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토지 수용으로 지방정부가 거두는 이익은 보상비의 10배가 넘는데, 농민들은 수용 전 3년 평균 연작물의 6~10배의 보상금과 4~6배의 정착보조비를 받는다. 수용되지 않는 것보다 수용되는 게 낫지만, 자기 땅값이 수용 후 천정부지로 솟는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기 어렵다.

2005년, 전국인민대표회의는 “토지관리법을 일시적으로 조정·시행” 할 33개 시범구역을 지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따싱구는 이때 시범구역으로 선정된 33개 중 하나다. 베이징시 정부는 철거된 지역별로 개발 할당량을 설정했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말했다. “아마 일정 수의 도시 거주자들을 위해 구역별로 필요한 가정부와 배달부 숫자도 정해질 겁니다. 그들(살아남은 농민공)에게는 거주 등록을 해주고, 알맞은 정도의 거처를 마련해주겠죠.” 중국 경제 기적의 두 초석인 ‘부동산’과 ‘값싼 노동력’이라는 토픽이 절묘하게 마주친 셈이다.

철거된 주거 지역. 사진을 보면 상주 인구 2만 명인 피촌보다 훨씬 큰 지역으로 보인다. ⓒSouth China Morning Post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중국 정부는 ‘조화사회’(모든 인민이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자기가 있을 자리에 있는 조화 공존의 상태를 말함)와 ‘소강사회’를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지 않나? 일찍이 공자는 ‘만백성이 차별없이 모두 공유하는 사회’를 대동사회라 말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지도자들이 밝혀온 중국 사회의 지향인 ‘소강사회’(누구나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받는 사회)는 대동사회의 전 단계로 여겨진다. 시진핑 주석은 2020년까지 소강사회를 달성하고, 2050년에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달성하자고 공언한 바 있다. 소강사회까지 1년 밖에 남지 않았다. 가능할까? “중국이 독재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비판은 너무 쉬운 비판이다. 하지만 문제는 보다 복잡하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지난 2018년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40년을 맞는 해였다. 그 사이 중국은 연평균 성장률이 10퍼센트에 육박하는 고속 성장을 해왔다. 이와 함께 팽창한 부동산 개발의 병폐는 중국에 심각한 모순을 안겨줬다.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집단적인 시위들의 주요 요인으로 노동권 침해 문제, 토지 수용·강제 철거·보상금 미지급 등 부동산 개발을 둘러싼 불만이 꼽힌다.

중국에서 부동산은 1978년 개혁개방 전까지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었다. 개혁개방 후에도 주택은 정부가 건설하고 도시의 단위, 농촌의 생산대별로 계획적으로 공급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하지만 1991년을 기점으로 토지제도가 크게 바뀌었다. 토지의 무상공급이 유상공급으로 변경됐고, 무기한 사용권 제도가 폐지됐으며, 토지의 양도와 임대가 허용됐다. 토지 소유권에 눈 뜨기 시작한 중국 시민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바로 ‘집’이다. 도시로 떠난 1세대 농민공들은 돈을 버는 족족 고향의 가족들을 위한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 농촌 마을마다 3~4층 주택들이 다수 지어졌지만, 그곳에는 정작 살 사람이 없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지방정부 차원의 토지 출양(임대)과 부동산 개발은 더욱 확대됐다. 지방의 경제성장률 유지와 당·정간부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토지사용권이 공격적으로 출양·매각됐기 때문이다. 개발용지를 최대한 늘려 이를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팔아넘기면 지방정부 부채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지방의 성장률을 높이면 간부 승진도 더 잘 됐다. 거품은 말할 것도 없이 커졌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이 때문에 2010년 이후 후진타오는 강력한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으로 부동산 거품을 가라앉히는데 주력해야 했다. 한데 시진핑은 이른바 ‘신형도시화’라는 명목 하에 규제를 완화했다. 지방정부와 개발업자들이 막대한 개발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셈이다. 이런 난맥상은 결국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나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통제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의 정치적 조건에서는 양자 모두 쉽지 않아 보인다.

토지제도와 도시화 등을 연구해온 허쉐펑(賀雪峰)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신노동자들의 대량 실업(2천만 명)이 왜 중국에서 큰 문제로 야기되지 않았는지 설명한 적 있다. 당시 고향 혹은 농촌으로 돌아간 신노동자들은 비교적 나이가 많았고, 이미 생산라인에서 오랫동안 일했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금융위기는 그들의 계획을 3년 정도 앞당기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농민공들의 도시 이주엔 두 논리가 존재한다. 하나는 도시에서 일해 돈을 벌어 고향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에 완전히 정착하는 것이다. 1세대 농민공들은 귀촌을 원하지만, 80년대 이후 도시에서 출생에 한 번도 본적지에 가본 적 없는 신세대 농민공(즉, 신노동자)들은 도시에서의 정착을 원한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베이징에서 쫓겨나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이들은 대체로 연령대가 높은 농민공들에 한할 것이다. 농사 한 번 지은 적 없는 신세대 농민공들이 수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들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17년 말 기준 농민공의 숫자는 2억 9천만 명에 육박한다. 이들은 호적 상으로는 농촌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도시의 공장이나 서비스업 등에서 일하고 있다. 오늘날 신노동자의 처지는 과거와 달라졌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신세대 농민공’이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부모 세대처럼 농촌에 적을 두고 있지만 부모들과는 달리 농촌을 자신이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다. 계속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하며, 도시에서 안정적인 직장과 집을 구하기를 꿈꾼다. 이들은 자신을 ‘농민’이라고 여기기보다 ‘노동자’라고 여기며, 노동권에 대한 의식도 높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빈 집은 남아도는데 신노동자들이 살만한 집은 없다. 극도의 저임금 착취를 받는 이들은 평생을 일해도 비싼 대도시의 집을 살 돈을 마련하기 어렵다. 또 호적이 농촌에 남아 있는 한 다른 성에서 집을 매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택의 노예’라 자조할 정도로 불만이 높다. 토지 수용과 강제적인 주택 철거, 아주 미비한 보상 시스템은 이 불만을 배가시키고 있다. 중국의 신노동자들은 ‘남아 있을 수 없는 도시’와 ‘돌아갈 수 없는 농촌’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해있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도시 노동자로 보냈음에도 농촌 호적을 바꿀 수 없는 게 이들의 처지다. 사회학자이자 신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베이징 노동자의 집’ 활동가 뤼투는 “1세대 품팔이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 대우와 생활 조건인데 반해, 신세대 품팔이에게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의 주거권과 노동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열악한 임금과 노동조건, 안정적이지 못한 주거의 모순은 중국 사회의 거대한 시한폭탄이다. 한데 이는 농민공이 아닌 베이징 시민들의 처지도 그리 다르지 않다. 어학연수를 하면서 만난 선생님들조차 몇 번이고 ‘베이징 집값’에 대해 한탄하며, 베이징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아가 신세대 농민공들은 자신의 계급적인 처지를 점점 더 강하게 자각하고 저항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폭발적으로 증가한 연해지역 신노동자들의 집단적 쟁의는 ‘세계의 공장’을 견인해온 이들 신노동자들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주거 문제를 둘러싸고 도시 외곽에서 벌어지는 저항들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모순을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노동자들이 도시에서의 권리 박탈과 차별적인 이등시민 신분에 맞선 ‘정치’와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지가 향후 중국 사회의 향배를 가늠짓는 관건적 요소가 아닐까 싶다. 베이징, 상하이, 청두, 충칭. 중국의 초대형 도시들의 외연은 너무도 화려하고 거대하다. 대도시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조차 놀랄 정도다. 하지만 도시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진짜 면모를 보려면 도시의 외곽에, 도시의 어둡고 더러운 골목으로 가보아야 한다. 그곳의 형상이 드러내는 모호함과 의문을 쫓고, 질문하다보면 도시가 안고 있는 모순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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